YS ‘신통력’ 힘이 부친다
  • 김재일 부장대우 ()
  • 승인 1994.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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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국 돌파할 묘수 없어 … 영수회담 통해 야당 협조 얻을 가능성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이래 최대 난국에 직면해 있다. 집권과 동시에 거센 개혁풍을 일으키며 국정을 장악해온 김 대통령이 계속 터져 나오는 악재들 속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YS의 신통력은 사라졌는가. 그는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통치권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이회창 총리를 해임한 사건은 청와대측으로서는 ‘뜻밖에도’ 여론을 악화시켰다. 그동안 휘몰아치는 개혁 분위기 속에서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야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 존재를 확인시키고 있다. 이총리 해임 사건은 야당의 입지만 강화시킨 것이 아니다. 시민운동 단체들도 새 정부의 개혁에 회의적인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총리 해임 직후 경실련·정사협 등 시민운동 단체들은 정부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시민운동 단체 대표들을 철수시키는 문제를 고려했었다. 개혁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참여했는데, 정부가 뒤로 간다면 굳이 참여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회의론이 제기됐던 것이다.

이같은 회의론은 시민운동 단체에서 아직은 소수 의견으로서 공식화하지 않았지만 새 정부 출범 때와 비교해 이들 단체의 달라진 시각을 반영한다. 시민운동 단체 대표로 정부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 인사는 여권 핵심부의 개혁 의지는 의심할 바 없으나 개혁에 대한 철학이 빈곤해, 실제 일하는 데 개혁과 수구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에는 대선 때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한약업자들의 이권 문제에 연루됐다는 혐의가 제기돼 청와대를 궁지로 몰고 있다. 청와대측은 야당이 노골적으로 김대통령의 도덕성을 공격 표적으로 삼자 당혹스러워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박지원 민주당 대변인은 논평에서 ‘김대통령의 가족 문제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으로 권력 핵심부의 민감한 부분을 자극했다. 그 전에는 성역으로 간주돼온 ‘가족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기 시작한 것이다.

청와대, 개혁 분위기 되살리려 안간힘
5월2일 이기택 대표의 기자회견 내용을 보더라도 정국이 당분간 꽁꽁 얼어붙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야당 의원은 “경색 분위기가 적어도 보름 정도는 갈 것”으로 전망했다. 이대표의 발언은 그 강도에 있어서 종래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높았다. 그는 ‘반의회주의적 폭거’ ‘신권위주의’ ‘중대한 결단’ ‘김대통령의 불행한 퇴임’ 등 극렬한 용어를 사용하며 “국회 파행의 책임이 전적으로 김대통령과 여당에 있다”고 몰아붙였다.

원래 이대표는 난국 타개를 위한 여야 동반 책임론을 주장해 왔다. 4월25일 미국 방문 일정을 앞당겨 귀국했을 때만 해도 그는 “우리 야당은 조계사 분규, 상무대 의혹, 이회창 해임 사건 등 모든 사태를 정치 공세를 위한 호기로 보지 않고 국가와 정국의 위기로 보고 타개하는 데 노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여당에 협조할 수 있다는 뉘앙스였다. 그런 이대표가 초강경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의 방향 선회는 민주당내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영덕 신임 총리 인준건이 민자당 단독으로 국회에서 처리된 뒤 민주당은 상무대 정치자금 의혹에 관한 국정조사에 온 당력을 쏟는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대표 비서실장인 문희상 의원은 “만약 여당에서 상무대 국정조사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려 할 경우 민주당은 장외 투쟁은 말할 것도 없고 정권 퇴진 투쟁도 불사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민주당의 결의를 내비쳤다.

김대통령으로서는 이처럼 꼬인 정국을 풀 묘안이 없다는 데 고민이 있다. 김대통령은 이영덕 총리와 이홍구 통일 부총리에게 임명장을 준 다음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역설했다. 김대통령의 발언은 실종한 듯한 개혁 분위기를 되살리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최근 청와대는 민자당과 각 정보기관에 앞으로의 정국 운영과 관련한 아이디어를 제출하라고 재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보기관은 우선 정치권에 대한 조사를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야 정치인들이 어떤 구상과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지에 대한 현황 파악과 함께 그들의 아이디어를 취합하는 작업이다. 이와 관련해 한 여권 소식통은 국정을 주도하는 민주계 쪽에는 가용 인력이 한정돼 있을 뿐 아니라 아이디어가 빈약하다고 전한다. 그러다보니 자연 안기부 등 정보기관으로부터 올라가는 보고서가 많아져 김대통령의 정보기관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이 점차 보수화 경향을 보이는 데는 이같은 배경이 있다고 그는 분석한다.

한 청와대 고위 비서관은 언론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의 언론관은 청와대측의 기본 시각인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새 정부 출범후 청와대와 언론은 개혁의 두 축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언론이 청와대와 개혁을 물어뜯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언론의 등 돌리기로 말미암아 개혁의 부메랑 현상이 나타날 조짐을 우려했다. 개혁 흐름에 단절과 공백이 생기면서 소집단간 갈등 등 개혁의 부정적인 지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최악의 경우 개혁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 개혁 무감각증을 거쳐 개혁에 대한 보수 반동 현상이 나타나는 단계로까지 진행될 수 있음을 경계했다. 그렇게 되면 개혁을 시도하지 않은 것보다 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우려는 청와대측이 개혁 분위기의 실종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잘 말해 준다.

충격 요법도 쓸 수 없는 상황
그러나 그는 청와대측이 국면을 전환할 수 있는 묘수가 없음을 인정했다. 충격 요법으로 다시 국민을 긴장시키는 일이 부담스러울 뿐 아니라 딱히 쓸 카드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청와대는 이미 정부로 하여금 일을 차분하게 간추려 가면서 잘 해 나가도록 방향을 잡았다. 그는 “그러다 보면 정황이 잡혀가지 않겠느냐”며 희망 섞인 전망을 했다. ‘언론만 제길로 가주면’ 돌파하기 어려운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야 대치 정국은 언제쯤 풀릴까. 한동안 강경 입장으로 치달은 뒤에는 대화 카드가 나오게 마련이다. 한 관측통은 5월 중순 무렵부터는 민주당의 강경 분위기가 점차 누그러져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그 즈음 김대통령과 민주당 이대표의 여야 영수 회담 분위기가 조성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측은 김대통령에게 갈수록 야당의 협조가 더욱 절실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김대통령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야당의 협조를 구할 것인가. 취임 14개월이 지난 지금 야당을 무시하고 국정을 이끌어 가기에는 김대통령의 힘이 부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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