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실종자는 ‘유령’인가
  • 김당 기자 ()
  • 승인 1994.05.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방부 발표에 담긴 5가지 의문 … 명예 때문에 전투상보 조작했을 가능성



≪시사저널≫이 92년 5월7일자 특집 기사(베일에 싸인 ‘하얀 전쟁’-한국군 ‘MIA'는 단 3명뿐?)에서 처음으로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 실종자(MIA) 및 포로(POW) 처리 조작 의혹을 제기한 이후 이에 대한 공방이 해마다 연례 행사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 4월16일 全京秀 교수(서울대·인류학)는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이 문제를 제기했다. 전교수가 이 날 한국사회사연구회 발표회에서 발표한 ‘베트남전쟁 동안의 한국군 포로와 실종자’라는 논문은, 전교수가 지난해 5월에 발표한 ‘월남전쟁, 한국군 포로 과연 몇 명인가’라는 논문을 보완·발전시킨 것이다.

전교수의 논거는 간명하다. 그것은 ‘지상군 전투 병력이 참전한 전쟁에서, 그것도 치열한 접전을 벌인 베트남전쟁에서 포로나 실종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전교수가 ‘전쟁에서는 포로와 실종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나’는 상황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근거 자료는 △월맹 정부의 전황보고기록 △하노이 군사박물관에 소장된 사진 △일본 <아사히 신문> 종군기자의 본 등 세 가지이다.

우선 전교수가 주목한 것은 지난 68년 1년 동안의 모든 전투를 기록해 영문으로 발간한 월맹 정부의 공식 자료 가운데 한국군의 피해 상황과 관련된 부분이다. 이 기록은 ‘4월10일 : 다낭에서 백명 섬멸, 빈딩성에서 3백명 사망·부상·포로…(중략)…7월26일 : 다낭에서 6백50명(이중 일부가 한국군) 사망·부상·체포’ 등 한국군 포로와 체포에 대해 적고 있다. 물론 대개의 전과가 그렇듯이 전과 기록 또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국방부 공식 발표나 기록상으로는 단 한명의 포로도 없다.

전교수가 제기한 두번째 근거 자료는 하노이의 군사박물관에 소장 전시된 한장의 사진이다. 일단의 군인들이 제복을 입은 월맹 정규군에게 포로가 되는 장면인데 사진에는 베트남어로 ‘남조선 군인의 얼굴들’이라고 적혀 있다. 원본이 아닌 오래된 복사본이어서 분명히 식별하기는 어렵지만 항복의 표시로 손을 들고 있는 병사들의 방탄용 조끼 사이로 얼룩무늬가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청룡부대원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국방부 측은 “사진이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라는 말로 일축했다.

전교수가 주장한 마지막 근거 자료는 하노이에서 출판된 ≪안녕 베트남-서방기자가 본 베트남≫이란 책에 실린 일본 <아사히 신문> 이카와 기자가 쓴 기사이다. 이 기사는 ‘한국군 중에는 신경질환으로 사상한 사람도 많았으며, 그밖에 상관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처형당한 병사들이 속출했다. 현재 행방불명자(MIA)는 약 3천명 이상으로 미군의 실종자를 앞지른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3천명 실종’ 주장은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전교수도 “그 숫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만, 진실의 일부는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한국군은 신출귀몰?
그 진실의 일부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전교수의 추론은 “허위 보고와 축소 조작의 메커니즘이 작용하여 전과·손실 보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상황이었음에 비추어 상당수의 포로와 실종자가 전사자로 계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추론은 국방부의 기록 및 공식 발표에 대한 분석, 참전자들의 증언 그리고 특히 당시 백마부대 중위로 베트남어 교육을 받고 정보작전협조센터에서 근무한 金永時씨(현 성동고 교사)가 전장에서 수집한 심리전(귀순) 전단 등으로 뒷받침된다. ≪시사저널≫이 제기하는 논거는 이렇다.

첫째, 베트남전에 동참한 미군 실종자 및 포로 통계와의 엄청난 차이이다. <표 1,2,3>에서 보듯 미군과 한국군의 작전중 사망(전사)자 비율은 거의 비슷하다. 한·미 양국군의 전사자는 참전 연인원(한 30여만명·미 3백여만명), 최고 주둔병력(한 5만여명·미 50만여명) 등과 대비할 때 양국 모두 연인원대비 60명에 1명꼴, 주둔병력 대비 10%선 사망으로 일치한다. 그런데 실종 및 포로 통계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연인원 대비 미군의 작전중 실종자(3천6백32명) 비율은 줄잡아 천명에 1.2명꼴인 데 비해 한국군(총 8명)은 4만 명에 1명꼴이다. 40배 가까이 차이가 날 만큼 한국군은 신출귀몰했단 말일까.

참전자 및 군사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전투력이나 작전 유형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는 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지적되는 것은 군기와 전투 방식의 차이이다. 제2대 청룡부대장을 지낸 김연상씨는 한국군은 군기가 엄하고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있지만 미군은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해 탈영 실종자가 많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김영시씨는 “한국군이 군기가 엄해 이탈자가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월남인들의 반한 감정이 상당히 컸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목격 경험에 비추어 외출외박을 나갔다가 실종된 병력들이 전사 또는 다른 형태로 분류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전과의 엄청난 차이이다. 71년 전쟁기간에 주월사가 발간한 화보집 ≪주월 한국군≫에 따르면, 파월 6년간 한국군이 올린 전과는 △사살 3만6천8백42명 △포로 4천5백86명 △귀순2천4백22명이다. 한편 국방부가 85년에 펴낸 ≪파월 한국군 전사≫에는 포로와 실종자가 단 한명도 없다. 적아의 손실 비율이 아무리 크고, 설령 적이 맨손으로 싸웠더라도 이국 땅의 정글 속에서 포로를 단 한명도 발생시키지 않는 완벽한 전투가 가능한 것일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월맹측이 그렇듯 한국측 전과(손실) 또한 과정(축소)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당시 주월사 작전참모부 전사과장을 지낸 송대원씨(현 의료보험조합 대표이사)는 이에 대해 “전사를 기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는 ‘전투상보’이다. 전투상보가 정확해야 전사가 정확해지는데 전투상보가 실제보다 과장될 가능성은 있다”라고 말했다. 송씨는 그러나 “실종자 문제는 단순한 실종자 또는 포로 기록을 조작했다기보다는 전사 처리상의 문제일 것으로 본다”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이를테면 군인사법 시행규칙은 원칙적으로 시체를 확인한 뒤에 전사처리하게 돼 있으나 실제로는 원칙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송씨는 전교수가 추산하는 9백명이라는 수치의 근거는 없지만 군과 국가의 위신에 관계된 만큼 진상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그 동안 자의로 실종자 및 포로 문제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

셋째, 실종자 및 포로 문제에 대한 국방부의 비밀주의와 소극·방어적 자세이다. 기록상으로 보면 국방부가 실종자 명단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73년 3월27일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국방부가 실종자 명단을 밝힐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전사자’가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73년 3월15일 주월사령부가 철수한 데 이어 같은 달 27일에, 72년 4월18일 안케 전투에서 포로가 된 유종철 일병(맹호부대)이 포로생활 11개월 만에 석방되어 살아 돌아왔다. 당시 국방부 선우진 대변인이 발표한 실종자 7명의 명단은 이렇다(이하 괄호 안은 소속과 실종 날짜).

△박승렬 병장(맹호 1연대, 병장, 65.11.3) △안학수 하사(건설지원단 201병원, 67.3.22) △정준택 하사(주월사, 67.5.7) △안삼이 상병(청룡 3대대, 69.7.27) △이용선 병장(청룡 본부중대, 69.12.2) △김인식 대위(주월사 태권단, 71.7.14) △조준범 중위(100군수사, 73.3.29)

실종자 수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국방부는 그로부터 19년 뒤인 92년 2월29일 월남전 전사자 현황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했다. 국방부가 전사자 현황(〈표2〉)을 느닷없이 발표한 것은 그날 <경향신문>에 보도된 ‘실종 파월 장병 3명 살아 있다’는 기사 때문이었다. 이 신문은 정확한 출처는 밝히지 않았지만 미국 재향군인회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박우식 대위(백마 29연대, 67.12.2) △박성렬 중사(65.11.30) △김인수 상병(65.2.18) 등 3명이 베트남과 제3국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당일 국방부는 전사자 현황과 함께 “월남전 실종자는 (위의) 3명뿐이고 이들은 군인사법에 의거해 실종 2년 경과후 모두 전사처리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만인 94년 4월22일 국방부는 다시 ‘베트남전 한국군 인명피해 현황(〈표〉3, 4)을 발표했다. 전경수 교수가 실종자 문제를 다시 제기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이 날 밝힌 실종자 현황에서 실종자는 8명이고 그중 3명은 월북했다고 발표했다. 그 현황은 〈표 4〉와 같다. 그러나 이같은 ‘방어적??발표 내용은 국방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오류로 이어진다.

네번째 의문으로 지적되는 ‘오류’는 국방부 공식발표와 통계의 허술함이다. 우선〈표 1〉에서 보듯 미군의 사상자 통계는 사상 원인별로 분류되어 있을 뿐더러 사망자의 경우에도 △전사 △부상중 사망 △실종중 사망 △포로 또는 구금중 사망 등 누계식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견주어 한국군의 ‘피해 현황’은 그런 분류가 없어 허술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한국군 통계는 92년과 94년에 발표한 각각의 피해 현황이 서로 다르고 실종자 수효와 명단 또한 73년, 92년, 94년 모두 다르다. 전체 피해 현황과 오기나 착오에서 비롯된 이름과 실종일의 차이는 그만두더라도 몇명 안되는 실종자 수마저 7명에서 3명 그리고 8명으로 고무줄처럼 줄었다 늘었다 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국방부 스스로 군인사법을 지키지 않고 있거나 그 내용을 잘 모르고 있음을 실토했다는 점이다. 앞서의 기록과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유종철 일병은 72년 4월18일 안케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는데 실종 열흘도 채 안되어 전사처리되어 유족에게 전사통지서가 전달되었고 △박우식 대위 또한 실종 1년 만에 유족에게 전사통지서가 전달되었다. 이는 군인사법 시행규칙 제73조 ‘행방불명자의 처리’규정을 어긴 것이다. 규정은 △전투 중 행불자는 당해 전투가 종료한 날로부터 2년 △재해중 행불자는 행불된 날로부터 2년 △일반 행불자는 행불일로부터 1년이 경과한 뒤에도 생사가 불분명할 때 각 군의 전사 확인조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각각 △전사 △순직 △사망으로 처리하게 돼있다. 그런데 국방부는 92년 발표에서 “월남전 실종자는 3명뿐이고 이들은 군인사법에 의거해 실종 2년 경과후 모두 전사처리했다”고 허위 보고한 것이다. 게다가 국방부는 그 허위 보고마저 잘못했다. 왜냐하면 89년 10월 동 시행규칙이 개정되기 이전에는 전투중 및 재해중 행불자의 경과기간이 3년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결과적으로 국방부는 베트남전에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다. 그 배경의 하나는 베트남에서 또다시 남북대결이라는 고도의 심리전을 편 북한을 의식한 결과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군의 파월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연구한 미국의 프랭크 볼드윈 같은 학자는 68년에 북한이 감행한 두 가지 모험, 즉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1·21 사태와 미군 첩보함 푸에블로 납치사건을 북한이 한국군의 파월을 견제하기 위한 기습공격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특히 전후방이 따로 없었던 베트남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은 물론 한국과 북한에게도 정보 수집을 위한 최고의 무대였다. 실제로 북한의 군사고문단과 정보원들이 베트콩과 월맹군을 교육·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을 상대로 심리전을 폈다.

특히 김영시씨가 파월 기간(69.6~71.12)중 수집한 심리전 전단들은 자의건 타의건 적어도 국방부에서 밝힌 월북 실종자(3명)보다는 더 많은 월북 실종자가 있음을 입증해 준다. 그중 민족해방전선 중부위원회 명의로 된 전단은 박성렬 병장(맹호), 안학수 하사(비둘기) 등을 거론하며 ‘조국 인민의 열광적인 환영 속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미국 양키들의 값싼 희생물이 되지 말고 민족해방전선 편으로 의거하라!’고 적고 있다. 또 다른 전단에는 김인수 상병(백마)과 실종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사병 1명(청룡)이 적시돼있고, 그밖에도 김교사는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작전중 실종된 ROTC 출신 맹호부대 소위 1명이 북한에 있다는 내용의 사진과 전단을 본 적이 있는데, 이소위 또한 전사로 처리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남부월남 민족해방전선 중앙위 명의의 다른 전단에서는 서툰 한국어로 구체적 전황을 담은 기록이 눈에 띈다. 이 전단은 △꽝남주 타빙군 지역에서 40여명 남조선 국군 떼죽음, 1명 생포 △호이안(청룡 주둔지)에서 ‘불벼락’등을 적시하며 ‘총알받이’로 나서지 말고 투항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같은 전단 내용은 자중에 공작원으로 남파된 뒤 귀순한 북한 사람들의 증언에서도 확인되었다. 지난 69년에 귀순한 정상환씨는 92년 5월에 “67년 4월부터 ‘의거자 학교’에서 당시 베트콩에게 포로로 잡혀 평양으로 송환된 안학수 하사와 1년 동안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정씨는 또 “의거자 학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해온 자들을 대상으로 사상 개조 학습을 벌이는 곳으로 당시 60여 명이 수용됐었다. 또 다른 포로인 박성렬 병장은 다른 내무반에서 생활했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장교 1명은 평양초대소에 수용돼 교양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밝혔다.

결국 공산주의와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는 이국 땅에서의 북한군 존재는 ‘포로 및 실종=북송’이라는 등식으로 이어져 지휘관들에게 거대한 강박관념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자신의 부대에서 ‘의거자(월북자)’가 발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지휘관에게는 치명적인 불이익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전투중 행불자건, 재해 또는 일반(탈영, 외출외박중) 행불자건 이들의 일부가 실종 또는 포로로 보고·기록되지 않고 전사 또는 순직 등으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또한 전투상보를 조작했을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북한으로 넘어갔을까 봐 지휘관들 긴장
특히 많은 참전자들은 베트남전 초기 캄란만에 상륙해 나트랑에서 퀴논 북방 지역까지 밀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고, 그후에는 군사분계선 최북단에 미군(다낭)과 인접해 주둔하면서 미군과 함께 정규전을 치렀던 청룡부대에서 단 1명의 포로나 실종자가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국방부의 실종자 통계에는 전쟁 초기는 물론 베트남전을 통틀어 가장 치열했던 68년 구정(테트) 공세 때에도 청룡에서는 단 1명의 포로나 실종자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방부 인사근무과에서는 최근 “93년부터 파월전사를 광범위하게 재검토하는 작업을 시작했으며 실종자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확히 재조사하려면 전투상보 자체를 조작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미군 및 월맹군 전투상보와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실종자 문제는 이듬해에도 또 그 이듬해에도 유령처럼 다시 나타날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