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또 산불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1994.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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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측 고소 고발로 세 번째 수난 … 영화화도 중단 위기



작가 趙廷來씨(52)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또 한 차례 수사당국의 심판대에 올랐다. 경찰청 보안국은 지난 4월11일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李仁秀씨(명지대 정외과 교수)와 한국전쟁참전총연맹·대한파월유공전우회 등 8개 우익 단체가 조씨와 한길사 대표 김언호씨를 국가보안법 위반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 고발해옴에 따라 수사에 착수했다. 1백20장에 달하는 고소 및 고발장에 의하면, 이 소설은 ‘한국 현대사를 왜곡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거나 기여한 사람들의 명예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했을 뿐 아니라 북한 김일성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며 공산주의 혁명 사상을 고취해 대한민국을 미국 식민지로 인식시켰다’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가 소설 ≪태백산맥≫에 어떻게 반응해 왔는가를 지켜보면 이 기간에 우리 사회가 어떤 갈등을 겪어왔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지난 89년 전 10권으로 완간된 소설 ≪태백산맥≫은 지금까지 모두 3백50만권이라는 판매 부수를 기록하면서 분단 이래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한 소설로 꼽히고 있다. 특히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 중의 하나인 여순사건을 소설의 들머리에 내세워 53년 종전 시점까지 포괄함으로써 완간되기 이전부터 문단은 물론 사회과학·역사학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영화 개봉하면 극장에 불” 압력
모두 4부 10권으로 엮은 소설 ≪태백산맥≫은 지난 83년 9월 ≪한국문학≫에 연재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집중적인 평가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이 작품이 우리 사회에서 받은 첫 비판은 ‘지나치게 중도적’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일부 운동권에서는 ‘안기부 돈을 얻어 쓰는 것이 아니냐’고 공격하면서 자체적으로 1년간 판매금지 조처를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거부감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김범우가 해방공간에서 극단적 좌익과 우익을 거부하고 민족주의자 입장을 보이기 때문이다. ‘계급 관점 결여’라는 비판에는 일부 문단이나 진보적 사회과학자들까지 가세하여 한때 작가를 좌절시키기도 했다. 80년대 초엽의 상황은 그만큼 이념의 과잉 반응을 보인 시대이기도 했다.

작가를 괴롭힌 이념 과잉의 작품 분석 태도는 정반대 쪽에서도 강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공권력과 동행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91년 대검 공안부가 ≪태백산맥≫의 이적성을 문제삼고 나선 것이다. 검찰이 문제삼은 부분은 민족주의자요 회색분자 외양을 하고 있던 주인공이 결국 공산주의를 택하고,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수뇌부에 대한 숙청을 김일성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혁명을 완수하려는 남로당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묘사했다는 점 등이다. 이 부분의 이적성이 입증되는 대로 작가를 사법 처리하려 했던 공안당국은 ‘출판 탄압’이라는 반대 여론에 밀리자 ‘문제삼지 않겠다’고 후퇴한 바 있다.

이처럼 ‘절충주의’와 좌익 소설이라는 명분으로 좌·우익 세력으로부터 번갈아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태백산맥≫이 이제 세번째 도전을 맞은 것이다. 이번 도전의 성격은 무엇일까. 문단의 한 관계자는 이를 국사 교과서 파동을 계기로 분출된 우익과 보수주의자들의 위기론과 연계시켜 설명한다. 그는 “북한의 불바다 파문, 국사 교과서 파동 이후 강화된 신우익의 움직임은 ≪태백산맥≫을 그 주요 타깃으로 삼은 것 같다”라고 말한다. ≪태백산맥≫을 고소 고발한 이인수씨와 8개 반공단체대표들은 지난 4월27일 한국전쟁참전총연맹의 임부택씨를 대표로 선출하면서 ‘정당한 우익의 목소리를 내야 할 시점’임을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인수 교수는 ≪태백산맥≫을 가리켜 ‘천민 소설’이라고 지칭하면서 이번 고소 고발은 “지속적으로 해야할 정화 사업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고소 고발 사건의 대변인인 崔鍾泰씨(한국전쟁참전군인연맹중앙회 사무차장)는 “지난 91년 검찰 조사가 유야무야 끝난 것은 구체적인 고소 고발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검사 혼자 총대를 메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우리 나라에 아직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 ≪태백산맥≫작가는 처벌을 받아야 하고 책은 판매를 금지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작가 “마녀사냥식 매도 중단하라”
≪태백산맥≫이 초간된 지는 10년, 완간된 지는 5년이 지났다. 이들은 왜 지금에 와서야 고소 고발을 하고 나선 것일까. 최씨는 “나라가 알아서 처리해 주기를 기대했다”라고 대답하고 이인수씨는 “작년 말에야 이 소설을 봤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는 일본의 가장 중요한 출판사의 하나인 집영사가 ≪태백산맥≫ 10권의 번역을 끝내고 올 여름부터 이를 시판할 예정이며, ≪태백산맥≫이 영화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태백산맥>은 올 추석 개봉을 목표로 이미 절반 가량 촬영을 끝낸 상태이다.

이들은 이미 지난 92년 초 태흥영화사가 ≪태백산맥≫ 판권을 사들인 직후부터 영화화 반대 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해 6월25일 6·25참전동지회 전국지부장회의에서는 물리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영화화되는 것을 저지하자고 결의하고 ‘만일 외국에서라도 촬영해 들여올 경우 노병 수천만을 집결시켜 죽을 각오를 하고 영화관을 불질러버린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한 바 있다. 최종태 사무차장은 “이 결의문을 즉시 태흥영화사측에 전달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인수씨 등은 이번 고소 고발장에서 “‘빨갱이의 아들’인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빨치산과 좌익과 김일성 정권의 위대함을 부각해 선전함으로써 자신의 가족사에서 비롯된 한을 풀겠다는 비원까지도 깔고 있다”라고 비판하며 임권택 감독에게 좌익 선전 소설 ≪태백산맥≫의 영화화를 당장 중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의식한 때문인지 임권택 감독을 비롯한 제작팀은 이 영화의 제작방향에 대해 매우 신중을 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사의 한 관계자는 “시나리오가 수없이 달라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원작대로 김범우가 자기의 신념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가기는 매우 힘들지 모른다”라고 밝혔다. <태백산맥>의 시나리오 작가 송능한씨는 “우익 세력의 압력이 심리적으로 제작팀을 위축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80년대에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의 기대와 90년대 우파들의 감시를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어려움이 크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우익진영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부분, 즉 박헌영의 숙청에 대한 빨치산 지도부의 연설 장면은 시나리오에서 아예 삭제했으며 민족주의자 김범우는 원작처럼 공산주의를 선택하는 대신 ‘매우 초라하고 불쌍한 처지의 인물’로 그려진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작가는 “아직 시나리오를 건네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원작의 의도와 상반되는 경우 강력히 항의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작품이 분단조국의 허리잇기를 기원하며 쓰여진 하나의 소설임을 강조하고 “1만6천5백장의 원고지 위에서 2백여 명의 등장 인물이 움직이고 말하는데 그 중 몇 장면을 토막쳐서 문제시하는 것은 정당한 태도가 아니다”라고 항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91년 검찰 자체 조사 결과 일단락 된 일을 다시 문제삼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는 좌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작가가 철저한 계산하에 배치한 인물들의 성격이나 역사적 기록과 해석을 간과한 “마녀사냥 식의 매도는 중단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즉 인공 치하에서 인민군이 현물세를 과도하게 징수하는 장면, 인민군 강제 징집 사실, 김일성이 김 구의 공개 강연을 막는 사실이나 심재모·김사용 등 우익 인사들의 행적을 묘사한 것들은 ‘우익을 무조건 비판하고 좌익을 미화하는 소설’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태백산맥≫과 관련한 고소 고발 사건에 대해 한길사의 김언호씨는 “지금까지 한국 역사가 극우적인 관점에서 기술되어 온 것이 사실 아닌가. ≪태백산맥≫은 좌파와 우파의 관점을 자유롭게 개진한 문학 작품이며,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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