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에 난리났다
  • 경남양산ㆍ박성준 기자 ()
  • 승인 1994.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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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양산군 주민들 핵쓰레기장 유치 반대 시위



 경남 양산군 동부 지역에 분노의 회오리가 일고 있다. 정부가 이 지역에 핵쓰레기 영구 저장고를 세우려는 과정에서, 주민 전체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밀실 작업’으로 일관했다는 의혹이 일자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부 계획의 직접 대상이 된 양산군 장안읍 주민들은 지난 12일 마을 안팎의 주요 도로를 점거해 원전시설 유치 반대 시위를 벌였는가 하면, 자녀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막아 5월16일까지 읍내 여섯 학교가 정상 수업을 못하고 사실상 문을 닫는 사태가 벌여졌다.

해외시찰은 미끼?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게 된 직접 원인은, 정부가 주민 전체 의사에는 아랑곳없이 일부 핵쓰레기 처리장 유치 찬성파를 이용해 마치 마을 전체 주민이 유치를 찬성하는 것으로 대외에 선전하면서 계획을 강행하려 한 데서 비롯됐다.

 정부가 핵쓰레기 처리장을 물색하고 있던 지난 91년까지만 해도 경남 양산은 적절한 후보지 목록에 오르지 않았다. 양산군 관내에는 이미 핵발전소 4기가 가동되고 있어 원전 관련 시설을 더 이상 세울 수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난 상태였다.

 실제로 핵쓰레기 처리 문제가 주민의 저항으로 난관에 부딛혔던 ‘안면도 사태’ 이후, 정부가 91년에 서둘러 선정해 발표했던 중점 검토 대상 6개 지역에도 이번에 문제가 된 양산군 장안읍은 빠져 있었다.

 장안읍이 술렁거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1월부터였다. 이 마을 주민 30여 명이 정부의 주선으로 영국 ㆍ프랑스ㆍ일본 등지에 원전 시찰을 다녀온 뒤 핵쓰레기 처리장 유치에 찬성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찬성 주민은 홍보활동 벌여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처는 이러한 일부 주민들의 찬성 의견을 근거로 장안읍에 핵쓰레기 처리장을 세우는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창성→유치신청’ 과정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애초에 주민들이 해외원전시설을 시찰하게 된 것은 과기처의‘속임수’에 넘어간 까닭이며, ‘일부 찬성파’가 내세우는 명분이 되었던 ‘장안읍 발전계획’도 핵쓰레기 처리장 유치를 위한 실현성 없는 미끼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장안읍 발전계획은 원전 주변지역이어서 개발이 제한돼 인구가 크게 감소하는 등 정체를 면치 못했던 장안읍을 대학까지 있는 인구 5만명(현재 1만2천여명)의 소도시로 가꾸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다수 주민들은 그렇지 않아도 인구를 억제하는 곳에 인구를 대폭 늘리겠다는 이 계획에 진실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핵쓰레기 처리장을 세우는 데 찬성하는 주민 일부는 이 계획에 따라 ‘장안발전추지위원회’까지 조직해 홍보 활동을 벌이고 있다.

경찰과 충돌해 부상자도 생겨
 정부와 지역 주민의 마찰은 지난 2월15일 양산군내 24개 부락대표가 ‘핵폐기물 처리장 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면서부터 본격화했다.

 각 부락의 이장ㆍ새마을지도자로 구성된 반대투쟁위원회는 3월1일 좌천리 시장에서 첫 궐기 대회를 연 데 이어, 임랑리에서 열린 2차 대회에서는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을 참석시켜 ‘주민의사에 따르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4차 대회(4월18일)에서는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그린피스’와 연계해 대규모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읍장 퇴진을 요구해 이를 관철시키고, 지서와 도로를 점거하는등 반대 운동이 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5월 들어서이다. 그리고 마침내 5월13일에는 시위 군중과 경찰 병력이 충돌해 부상자까지 생기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때문에 시위에 가담한 주민 7명이 구속되고, 투쟁위원회 공동대표인 강현호씨(장안읍 투쟁위원장)를 비롯한 몇몇 간부는 경찰 수배를 피해 외지로 빠져나갔다.

밀실 행정이 실책
 장안읍을 비롯한 양산군 동부지역 사람들은 일부 외지인이 핵쓰레기장 유치를 반대하는 행위에 대해 지역이기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을 매우 잘못된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번 시위사태로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는 강현호씨는 5월16일《시사저널》취재진과 만나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장안읍은 울산ㆍ부산 사이 한 가운데 끼여 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보아도 핵쓰레기장을 이렇게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 가까이에 건설한 사례는 없다. 더욱이 우리 관내에는 이미 원전이 4기나 들어서 있다. 거기서 더운물을 배출해 바다가 죽어가는 등 부작용도 심각하다. 그런데도 이곳에 주민 의사를 왜곡하면서까지 핵쓰레기장을 또 짓는다면 누가 온당한 결정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5월13일의 시위는 경찰이 전경 44개 중대 6천여 명을 투입해 진압했다. 하지만 핵쓰레기 처리장 반대 파문은 양산군 전체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파문의 한가운데에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주민을 설득하지 않고 ‘공작’ 차원에서 주민의 여론을 일방적으로 몰고가려는 정부 당국의 실책이 앙금으로 가라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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