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뒤에 숨지 말라
  • 안병찬 (편집인) ()
  • 승인 1994.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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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활성화 조짐이 있다고 정치 실종이 면책되진 않는다. 정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력을 확립하는 일이다.”

 아시아개발은행(ADB) 총회가 5월초 프랑스 지중해변도시 니스에서 열렸다. 국제 금융기구인 아시아개발은행 회원국은 55개국 미국ㆍ일본ㆍ중국ㆍ이 단독 이사국이고 다른 나라는 9개 조를 짜서 가각 이사국을 뽑아 대표성을 갖도록 하고 있다. 한국은 대만ㆍ스리랑카ㆍ파푸아뉴기니와 한 조를 이룬 이사국인데, 88년 아시아개발은행 차관 졸업국이 됐다.

 홍재형 재무부장관은이번 총회에서 두 가지 색다른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고 전한다. 그 하나는 베트남이 한국이 이사국인 그룹으로 옮겨 오겠다고 신청한 일이다. 인도 그룹에 속한베트남의 이적 신청을 받고 홍장관은 처음에는 놀랐다고 했다. 베트남 중아은행 총재가 제기한 이적 문제는 한국이 다른 회원국과 협의해 결정할 사항이지만, 베트남이 이사해 오면 한국조는 그만큼 발언권과 투표권이 커지므로 좋은 일이다.

 자년 5월 마닐라에서 열린 제26차 총회때 홍장관은 기조연설을 통해 경제체제 전환 과정에 있는 베트남에 5천만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고 밝힌 일이 있다. 이처럼 한국과 베트남이 경제 협력을 확대하고 있는 길목이고 보면, 김영삼 정부의 재무장관이 베트남의 이적 신청을 한국의 달라진 경제적 위신과 상관 관계가 있다고 여긴들 이상할 것은 없다.

 홍장관이 경험한 또 하나는 총회 개막 연설을 한 에두아르 발라뒤르 프랑스 총리가 일본과 한국 재무장관을 따로 만나자고 자청한 일이다. 홍장관은 이를 예외적인 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발라뒤르는 파리에 본부를 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한국이 언제 들어오느냐고 묻고, 홍장관은 프랑스 고속열차(TGV)의 한국 진출을 축하하는 정도의 대화가 오갔지만, 대화주제는 경제 교류와 협력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역시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변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중국 촌극’ 후 점점 커진 정치력 난조 비판
 홍장관은 김영삼 정부가 경제 분야 개혁의 기둥 줄거리로 삼은 금융실명제를 주관한 장관이다. 그의 니스 총회 경험은 최근의 경기 활성화 추세에 상당한 안도감을 느낀 나머지 한층 인상 깊었던 듯하다.

 그는 금리가 안정세를 보이고 주가가 오르고 또 실명제도 큰 탈 없이 정착하고 있으므로 8월의 실명제 1주년에는 경제적 성과를 자축할 수 있으려니 기대하고 있다. 그는 문민 정부가 들어선 후 공들인 것들이 작용해서 근래 경기 활성화의 힘이 붙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홍장관이 금융실명제 정착에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정치 실종이 문제다. 사정과 개혁 바람을 일으키며 단독 질주한 김영삼 정부가, 법과 제도의 준비 부족과 독단성으로 말미암아 금년 들어 사면초가 속에 가파른 언덕을 자전거를 끌고 어렵고 숨차게 넘어가는 모습을 우리는 복 있다. 김영삼 정부의 정치력을 향한 비판이, 지난 3월 말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때 드러난 청와대 수석비서관들과 주중대사 사이의 노골적 불협화음을 출발점으로 하여 점점 커진 것은 모두 보아서 아는 일이다.

민자당 정세 보고서도 “국민과의 괴리 심화”지적
 김영삼 정부는 문민 정부라는 정치 이념의 새 깃발을 세우고 개혁의 자전거 바퀴를 굴리면서, 페달을 끊임없이 돌리지 않으면 자전거가 넘어져서 코가 깨지든지 무릎이 벗겨지든지 다칠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위기감을 느꼈다. 김영삼 정부 내의 개혁파 중에도 특히 민주계가 이런 자전거 페달론에 집념을 가진 일도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이다.

 개혁의 자전거 바퀴가 한창 굴러갈 때는 김영삼 정부에 경제 회생이 없는 정치 개혁은 무의미하다는 주문이 쏟아졌던 것이 사실이다. 되돌아보면, 작년에는 개혁 정치가 있었으되 경제 국면은 매우 어두웠다. 경제 활성화 조짐이 나타난 오늘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뒤바뀌어 다시금 정치 실책과 난조를 따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때 김영삼 대통령은 피난처를 경제에서 찾고 있다. 5월 중순 과천 정부 제2청사를 방문하여 국장급 공무원과 만난 자리에서 그가 한 말은 “국내에 이런 저런 문제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경제만 잘되면 큰 문제가 없다. 대도를 갈 수 있다. 다른 문제들은 대수롭지 않다”였다.

 그의 참모들도 “정치권은 시끄러울지 모르지만 경제가 잘되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하는 말로 청와대의 시국관을 보여주고 있다. 일전에 민자당 국채자문위원회가 내놓은 정세동향 보고서를 보라. 최근 정부ㆍ여당과 국민 사이의 정서적 괴리가 심화하고 있다고 뼈아픈 지적을 하지 않았나. 한국물가협회가 이 달에 50개 생활필수품 가격을 작년 5월과비교해 보니 35개 품목이 70%나 올랐다고 한다. 경제도 앞뒤가 오로지 분홍빛만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가 지금 요구받는 사항은 정치력 확립이다. 그 정치력이란 권력을 바탕으로 한 유아독존이나 신권위주의가 아니다. 합의를 존중하는 민주적 질서와 화합이다. 다소 형편이 좋아진 경기회복세를 피난처로 삼으려는 자세는 저자세다. 하는 얻는 대신 더 중요한 또 하나를 버리는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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