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총리 정치생명 위기
  • 런던ㆍ강원택 (자유 기고가) ()
  • 승인 1994.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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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보수당, 지방의회 선거에서 최악의 참패…당 내부마저 시끌



 ‘멍들고 터지고 망신했다.’ 이런 제목의 기사라면 폭력 사건에 관한 것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영국의 지방의회 선거 결과를 보도한 <이브닝 스탠더드>의 5월6일자 머리기사 제목이다.

 이 제목에서 생략된 주어는 영국의 집권 보수당이다. 지난 5일 실시된 영국 지방의회 선거에서 존 메이저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은 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런던 지역과 스코틀랜드를 포함해 모두 5천45명의 지방의회 의원을 선출한 이번 선거에서 보수당은 4백29석을 잃고 18개 지방의회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다. 이번에 보수당이 얻은 의석수는, 노동당은 말할 것도 없고 제3당인 자민당보다도 2백여 석이 적은 8백88석으로 3위를 차지하고 말았다.

 이번 선거의 득표율 27%는 보수당이 선거에서 얻은 사상 최저 기록이며, 말썽 많던 인두세 문제로 인기가 바닥이던 90년 대처 총리 때의 지바의회 선거 결과보다 낮은 것이다. 마약 이번 결과를 그대로 총선거에 적용하면 보수당은 현재의 3백33개 의석 가운데 2백석 정도를 잃게 될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쯤되면 <이브닝 스텐더드>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의회 선거 때 또 한차례 재앙 있을 듯
 당연히 야당은 좋은 결과를 얻었다. 노동당은 보수당에 비해 14%포인트나 높은 41% 득표율을 보였다. 선거 정에 비해 88석을 늘렸으며 4개 지방의회의 통제권을 더 획득했다. 노동당은 과거 보수당의 아성이던 런던 외곽과 에섹스 등 몇몇 의미 있는 지역에서 승리함으로써 내용 면에서도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가장 두드러진 약진을 보인 것은 바로 제3당인 자민당이다. 자민당은 보수당과 같은 27% 득표율을 보였으나 선거 정에 비해 무려 3백88석을 늘렸으며, 모두 9개 지역의 지방의회를 새로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보수당 지지자들의 반발표를 대부분 흡수한 데 성공했고, 일부 노동당 지역에서도 선전하여 가장 알찬 수확을 거두었다. 지방의회 선거 결과가 총선거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선거를 통해 자민당은 영국 정치에 3당 구도를 확연하게 심어 주는 성과를 거두었다.

 안되는 집안은 시끄러운 법. 보수당이 예상대로 지방선거에서 대패하자 메이저 총리에 대한 당내 불만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영국 정치에는 한국처럼 불리한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정치적 책임을 대신 짊어지고 물러날 국무총리 같은 속죄양이 없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메이저 총리 자신이 직접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다. 메이저 총리는 자기는 사임하지 않을 것이며 당내의 어떤 도전에도 맞서 싸우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무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다가올 6월 선거가 유럽의회 선거이기 때문이다. 보수당은 유럽통합 문제를 놓고 사실상 분열되어 있다. 지난해 마스트리히트 조약 가입 여부를 놓고 우여곡절을 겪은 보수당은, 메이저 내각이 출범하기 전부터 유럽연합과 유럽단일 화폐 문제를 놓고 내부적으로 심한 몸살을 앓아 왔다. 현재 메이저 내각에는 허드 외무장관ㆍ클라크 재무장관 등으로 대표되는 유럽연합 지지파와, 포틸리오 재정위원회 수석총무ㆍ하워드 내무장관 등의 반대파가 내각에 함께 몸을 담고 있다. 분열 가능성이 항상 존재해온 셈이다. 지도력이 취약하다는 메이저 총리에 대한 비판이라든지, 지방선거에서의 참패는 바로 보수당이 당내 분열을 제대로 무마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현재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진다면 다음달 9일의 유럽의회 선거는 보수당에 또 한번의 선거 재앙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보수당내 분열은 더욱 심해질 것이고 메이저 총리의 정치 생명은 큰 위기를 맞을 것이다.

“이번 고비 넘기면 96년까지 집권 무난”
 그러나 정치 평론가들은 또 한편으로 메이저 총리가 이번 정치 위기만 넘길 수 있다면 96년 총선까지 무난하게 집권할 것으로 예상한다. 최근 메이저 총리는 그동안 당내 일부에서 제기해온 유럽 단일 화폐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 요구를 수용할 수 있다고 내비침으로써 유럽 통합 문제를 둘러싼 당내의 뿌리 깊은 갈등과 유럽의회 선거에서의 재앙을 막아보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다음달로 예정된 유럽의회 총서에서 보수당은 당 내부의 불협화음이 어떤 식으로든 표출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메이저 총리는 생존과 실각 사이에서 그의 정치 인생 가운데 아마도 가장 뜨거운 여름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런던ㆍ강원택 (자유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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