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지식인의 전쟁 영상 보고서
  • 파리 . 양영란 통신원 ()
  • 승인 1994.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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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레비, 유고 내전 다룬 영화 <보스나!> 칸 출품

70년대 프랑스 지성계를 풍미했던 신철학의 기수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올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자기가 제작한 영화를 출품해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보스나!>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옛 유고 내전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로서, 레비가 자기 목소리를 직접 녹음했다.

 폭격으로 죽어가는 사라예보 시민들, 불타는 건물, 핏자국으로 얼룩진 시가지, 즐비한 시체, 뼈만 앙상하게 남은 퀭한 눈의 포로들, 팔다리가 잘려 불구자가 된 생존자…. 이같은 처참한 장면 사이사이에는 이 전쟁의 중재자로 나선 서방 정치가 . 외교관들이 지금까지 벌여온 말의 향연을 삽입했다.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등 세계 지도자들의 소극적인 불간섭주의 노선 발언이 전쟁의 참화를 생생하게 담은 영상과 중첩되면서 관객들로부터 조바심을 자아낸다.

 서유럽과 미국은 왜 방관하고 있을까? 레비는 프랑스 외무부 전직 고위 관리의 입을 통해 이 의문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제시한다. 즉 옛 유고 내전이 세르비아의 승리로 끝나면 유럽의 화약고로 불리는 발칸반도에는 나름대로 새 질서가 확립된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세르비아가 우위인 현상황에 변동을 가져올 만한 정책을 추진하지 말아야 하며, 따라서 방관만이 이 지역에 평화를 가져오는 가장 신속한 대응책인 셈이다. 이 대목에 이르면 조바심은 의문으로 바뀌고, 의문은 곧 정치 혐오감을 낳는다. 서방 지도자들의 적극 개입을 호소하는 이제 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의 숨가쁜 해외 순방은 번번이 ‘소 귀에 경 읽기’로 끝나고, 그럴 때마다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의 미소 짓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서구 사회가 눈앞의 비극을 못본체 외면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고 해설자 레비는 강조한다. 히틀러의 등장, 스페인 내전, 유태인 학살, 프라하의 봄, 폴란드 사태 등등 20세기 역사의 잦은 위기가 언급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스페인 내전에서 보스니아 전쟁과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그가 자신의 모델로 삼는 앙드레 말로의 영향 탓일까?

사상의 깊이보다 행동으로 인정 받아
 BHL 이라는 약자로 더 잘 알려진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프랑스에서 가장 ‘매스컴을 잘 타는’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의 유명도는 몇 해 전 인기 여배우와 결혼식을 올렸을 때에도 드러났다. 레비의 신부가 입은 웨딩드레스에서부터 꽃다발 . 구두 . 하객 등이 빠짐 없이 여러 잡지에 소개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철학 저서로는 우리말로도 번역된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외에 《신의 유언장》《프랑스의 이데올로기》등이 있다. 그런데 이 저서들은 학자들로부터 역사 인식의 오류와 원전의 자의적 해석이 빈번하다는 신랄한 비판을 자주 받는 만큼, 그의 유명세가 사상적 심도에서 비롯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설 . 희곡 . 수필 등 다방면에서 수상 경력이 있으나 그의 인기는 글재주만이라고 하기에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철학자라는 공식 직함에 걸맞지 않게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가며 매스컴의 총아가 된 배경은, 아마도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고자 전력투구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르트르와 카뮈가 대표하는 실존철학의 퇴조와 더불어 참여지식인이라는 개념도 퇴색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레비의 경력을 살펴보면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참여지식인이 완전히 멸종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그는 방글라데시 . 나이지리아 . 에티오피아 . 아프가니스탄 . 쿠르디스탄 등 분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희생자들을 옹호해 왔다.  그의 저서가 지니는 논리의 빈약, 역사 인식 부족을 탓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행동을 통해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을 고발했다는 점만은 모두 인정한다.

‘참여지식인’ 부활의 기수?
 그러므로 파시즘과 공산주의야말로 20세기를 피로 얼룩지게 한 가장 치명적인 해악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그가 바로 지척에 있는 옛 유고의 사태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또한 영화 <보스나!>가 공산주의 체제 붕괴로 서방 민주 사회가 승리감에 도취해 있는 사이에 파시즘의 이데올로기가 다시금 고개를 쳐든다는 해설로 시작되는 것도 결코 우연한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파쇼 경향을 부각하다보니 ‘보스니아=천사, 세르비아=악마’라고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평가들은 꼬집는다. 보스니아측이 제공한 영상자료를 상당 부분 이용했기 때문에 보스니아 홍보 영화가 되어버렸다는 혹평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러나 비평가들의 논쟁에는 아랑곳없이 영화 개봉 이틀째인 5월19일 오후 극장을 가득 메운 관람객들은 영화가 끝나자 우렁찬 박수로 답례했다. 레비 자신이 칸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밝혔듯이, 과연 카메라가 펜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이니만큼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할 터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 <보스나!>가 점차로 마비되어 가는 시민 의식을 일깨우는 강력한 자극제가 되리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레비가 6월로 다가온 유럽의회 선거에 ‘유럽은 사라예보로부터’라는 기치를 내걸고 독자적으로 입후보자를 모집하기 시작한 사실도 흥미롭다. 그는 <보스나!>에서, 자유와 관용을 추구하는 유럽의 이상은 사라예보와 더불어 죽어버렸다고 개탄했다. 유럽을 되살리는 데에 전념할 ‘유럽 . 사라예보’ 소속 후보자로는 거의 문필가나 학자들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멸종 위기에 놓였던 참여지식인이 부활하는 징조일까?
파리 . 梁永蘭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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