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통치자 용서 못한다"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0.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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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대하소설 《임진왜란》 펴낸 작가 金聲翰씨

원로작가 金聲翰(70)씨가 장편대화소설 《임진왜란》(전7권·행림출판)을 펴냈다. 10년 동안의 방대한 자료조사를 거쳐 6년간 쓴 이 대하소설은 작가의 표현 그대로 “16세기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세밀한 풍경화??이다. 이순신과 풍신수길 그리고 원균 등으로 대표되는 한?중?일의 삼각관계는 4백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아도 새삼스런 ??거울??로 다가온다.

 작가는 “무능한 통치자들은 용서받지 못할 범죄자??라는 엄연한 사실을 인진왜란의 경위를 조사하면서 절감했다고 한다. 그 무능한 통치자들은 조선시대 중기의 위정자들이지만, 대의와 명분을 중요한 척도로 생각하고 있는 오늘의 정치가에게도 적용되는 따가운 지적이다.

 작가에 따르면 임진왜란은 일본의 느닷없는 기습이 아니었다. “풍신수길은 조선에 보낸 國書에서 침략을 공언했으며 대마도에는 네차례나 사신을 보내 일본의 침략을 경고하고 그 시기까지 정확히 알렸다??는 것이다. 조선의 사신도 일본에 다녀와 전쟁대책을 호소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일본이 침략해올 ??아무런 명분??이 없다며 허송세월을 보낸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주자학은 명분과 선·악을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은 정직된 시대였다. 강약·利害·美酷 등의 기준들은 무시되었다.  일본을 평정한 풍신수길은 힘이 있었다. 강했던 것이다. 작가는 이 강약의 원리에 의해 조선은 침략당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1592년 부산 동래에 일본군이 닿으면서 시작된 7년전쟁은 인구의 8할이 희생된 대참극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신무기로 등장한, 잘 훈련된 20만 대군이었는데 우리의 병력은 겨우 7천명이었다. 文과 武가 불균형을 이뤘기 때문이다. 무인은 설자리가 없는 풍토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떨쳐 일어났다. 이순신 같은 불세출의 명장이 있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과 승병이 일어났다. 초야에 묻혀 있던 선비와 직업군인들이 외병을 지휘, 도처에서 유격전을 벌인 것이다.

 이 대하소설은 이순신이 노량대첩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에서 끝난다. 작가는 40여개의 지도가 삽입된 데서 보듯 ‘정확한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는 ??일체의 선입견을 배재하고 당시 우리 민족이 겪은 진실을 묘사해내고자 했다??고 말하면서 이순신에 대하여 ??인류가 바다에서 싸움을 시작한 이후 전무후무한 海將??이라고 표현했다.

 현대소설에 비해 역사소설은 ‘작가의 재량권??이 적지만, 인간과 시대를 총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는 ??매력??을 작가는 높이 사는 것 같았다. 이번 소설을 준비하면서 우리에겐 기록분화가 없다는 ??자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작가에겐 큰 의미로 남는다. 우리의 족보는 실록의 정확성과 맞먹는 ??위대한 기록문화??인 것이다. 또한 이번 저술은 외병정신과 같은 ??우리 민족이 가진 잔재력??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임진왜란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그가 소중하게 느낀 것은 ??선입견과 전체를 모두 배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물과 세계를 보는 자세의 필요성??이다. 역사를 꼼꼼하게 살피면서 또하나 체득한 사실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이 세상을 긍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는 어제와 오늘과의 대화??, ??역사는 모두 현재의 역사??이기에 ??모든 역사는 권력에 의해 재구성된다??고 말하는 원로작가의 표정은 고요하고 밝아보였다.

 그는 1919년 함경남도 풍산에서 태어나 5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했으며 단편집으로 《오분간》《개구리》역사소설《이성게》《삼국지》《왕건》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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