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은 성공했으나 환자는 死忘”
  • 김승웅 편집국장대리 ()
  • 승인 1990.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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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ㆍ소정상회담 북한 반발…여유와 세련미 부족한 외교 문제

한ㆍ소정상회담 이후의 동북아정세, 그중에서도 남북한간의 관계변화를 진단하는 한 서방측 고위외교관의 표현이 자못 흥미롭다.“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환자가 숨을 쉬지않습니다.”환자(북한)를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단행한 수술(한ㆍ소정상회담)이 의료기술상으로 완벽했으나 환자가 소생하지 않는다는 외교적 修辭이다.

 그 북한으로부터 예상됐던 반응이 터져나왔다. 13일, 남북국회회담 준비접촉을 위한 북한측 대표단장 全琴哲과 고위급회담예비위 白南俊단장이 연명으로 한국측에 보낸 전언통신문은 샌프란시스코 한ㆍ소정상회담 이후 평양측이 서울을 향해 내보인 첫 공식반응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북한측은 한마디로 盧泰愚대통령이 제의한 남북정상회담을 공식 거부한다고 했다. 수술은 외형상으로만 성공을 거두었을 뿐, 당장에는 실패한 셈이다.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일차적인 원인은 외교와 국방을 혼돈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외교와 국방은 국익추구를 목표로 하는 국가원수의 통치행위에 속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외교와 국방의 전개양식은 판이하다. 국방을 전쟁 또는 작전이라는 매개개념으로 따질 때, 가장 이상적인 전개양식은 상대를 완전섬멸 또는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지도록 강타하는 것이다.

작전개념으로 진행된 샌프란시스코회담

 외교는 다르다. 외교에도 승패는 따르되, 상대와 나와의 공존을 전제로 한 승패다. 따라서 외교적 승리를 위해서는 고도의 세련미가 요청되며, 이기고도 진 것처럼 처신할 줄 아는, ‘외교적 노련’까지도 구비해야 한다. 이번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은 외교보다는 작전개념으로 진행됐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대안은 무엇인가.

 ‘북한도 언젠가는 바뀌겠지’식으로 대범하게 넘기고, 향후 한·소수교의 결과와 이에 따른 북한측의 현실긍정의 시점이 빨리 도래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작 신경이 쓰이는 것은, 북한이 지금과 같은 사면초가의 궁지에 빠져 있을 때, 나름대로의 탈출구라 여기고 취할지도 모를 돌발적인 행동이다. 서울주재 모 외국특파원의 우려의 말을 들어본다.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세칭 마유미(金賢姬)사건은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의 발생배경이나 성격을 재고해야 한다. 그와 비슷한 사건이 재발할 개연성이 높은 시점이 지금이다. 마유미사건은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에 대한 북한측의 저지 노력이 좌절된 시점에서 발생했으며, 소련과 중국 그리고 동유럽국가의 올림픽참가 결정에 반발한, 개인으로 치면 정신질환적 발작이었다.”

 지금에 와서 아시안게임 정도는 평양측에 양보했던들, 아니면 올림픽게임 중 일부를 북한에 할애했던들… 하는 식의 희한의 말을 되뇔 필요는 없다. 다만 북한을 다루는 기량이나 여유면에서 마유미사건의 악몽은 지금도 우리가 유념해야 할 反교사기능을 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에 앞서 북한측에 이 회담의 성사내용을 통고할 만한 여유가 없었는지 아쉽다. 북방외교에 관여해온 한 관계자의 지적처럼 직접통보가 무리였다면, 당사국인 소련을 통한 간접통고,아니면 이웃 일본을 경유한 간접통보 정도는 충분히 감안했어야 마땅하다. 한ㆍ소정상회담 일주일 전에 치러진 한ㆍ일정상회담에서 일본측에 사전에 귀뜸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점도 아쉽다.


소련의 對韓 의중 정확히 파악해야

 외교란 물론 극비사항에 속할 수 있다. 다만 그 충격이나 반발을 미리 가늠하고, 극비와 충경이 충돌할 경우의 파장을 극소화하기 위해서라도 관련국에 귀띔하는 것이 서로의 선린과 신뢰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일이 되기 위해’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미ㆍ일ㆍ중ㆍ소의 사전보장과 교감이 해결의 정석일 터인데, 정부가 유독 소련만을 통해 남북한관계의 정상화를 기도했다면 자칫 부분적인 접근이 되기 쉬운 것 같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제일 먼저 지적돼야 할 일은 한·소정상회담 이후 소련에 대한 과민기대를 극복하는 일일 것이다. 수교날짜만 따지는 단견에서 벗어나 저쪽의 속사정을 꿰뚫어보는 炯眼을 키울때가 지금이다.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서울특파원 심재훈씨가 보는 고르바초프의 당면 난제는 한반도 문제가 아닌 국내문제다. △경제개혁의 성패△옐친의 저항△리투아니아문제△러시아공화국의 독립△소련의 남부중앙아시아 5개공화국의 불길한 저항 등 소련의 국내문제가 상위권 순위를 이룬다. 한국과의 수교문제는 이 5위권 밖의 문제로, 그것도 내년 5월 일·소간의 관계모색과 별도로 독립시켜 다룰 만한 문제가 아니다. 동북아문제에 대한 고르비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구체적인 사례로 심씨는‘캄차카 선언’의 취소를 든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방미일정을 끝내고 귀로에 오른 고르비는 캄차카 반도에 내려 동북아문제에 대한 중대 선언을 계획했다가 취소한 바 있다. 고르비는 집권 이후 2년 간격으로 동북아에 대한 소련 입장을 현장감있게 선포해왔다. 소련이 태평양세력의 일원임을 강조한 86년의 블라디보스토크선언, 그로부터 2년 후인 88년의 소련과 신흥공업국가들(NICs)간의 경협확대를 다짐한 크라스노야르스크 선언등이 바로 그것이다. 캄차카 선언 취소를 통해 소련의 對韓 의중을 함께 판독할 수 있는 형안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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