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망나니’국우 테러단
  • 워싱턴 ●이석열 특파원 도쿄 ●채명석 통신원 본 ()
  • 승인 1990.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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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동유럽권의 대변혁이 시작된 이래 세계는 새로운 국제정치질서를 형성하기 위한 진통을 겪고 있다. 현재의 세계질서 재편 움직임은 공산주의의 위축과 함께 나타난 양상으로, 몇몇 국가에서 극우세력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야기하고 있다. 본지 해외특파원과 통신원을 통해 극우세력이 부상한 대표적 현장들을 점검해본다.

 미국
현직경찰이 핵심간부

 살림이 거덜나서 길가에 나앉게 된 위인을 모셔다가 칙사대접을 하고 값진 선물까지 듬뿍 안겨 보낸 인심좋은 영감에 대한 가솔들의 입방아가 만만치 않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에게 너무 깊이 빠져 있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얼마전 워싱턴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에서 부시가 두가지 실수를 저질렀고 이것은 부시가 보수진영과 손을 끊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군축문제에 지나친 양보를 한 것과 리투아니아 독립과 관련, 당연히 해야 할 말조차 하지 못한 것은 부시가 고르바초프와 공동운명체임을 천하에 드러낸 일로서 對공산주의 우위정책을 신봉, 주도해온 보수주의 진영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 외교정책상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보수주의자들의 시각에 가까운 선에서 입안, 추진되어 왔기 때문이다.

 반세기 가깝게 냉전체제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힘의 외교를 주창해온 보수주의자들은 지난 1년반 동안 동유럽과 소련을 휩쓸고 있는 변화의 바람을 보면서 반가워하는 눈치도 보이지만 저으기 당황해 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념적인 싸움의 승리를 축하해야 할지, 계속 경계심을 가지고 전의를 가다듬어야 할지 이들에게는 아직 뚜렷한 판단이 서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딱 집어서 무엇이 보수주의라고 잘라 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보수주의 세력과 맞먹는 진보주의 세력이 있거나 진보주의 정당이 집권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 보수주의만 존재하는 곳이라는 말도 된다.

 이념적으로 볼 때 미국의 양대 정당인 공화당과 민주당은 모두 보수계 정치집단이다. 다만 어느쪽이 더 보수적이고 덜 보수적인가 하는 상대적인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공화당이 더 보수적인 정당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대기업과 재벌 위주의 정강정책을 우선 시키고 있다는 평가 때문에 서민과 노동조합등 소시민의 이익을 앞세워 복지정책에 힘써온 민주당과는 거리가 있는 셈이다.

 미국 보수주의는 레이건 집권 8년에 황금기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흑인이나 소수민족의 권익 향상을 내세운 민권운동의 결과로 어렵게 확보해놓은 일들이 서리를 맞아 20년 뒤로 후퇴했다는 아우성도 들렸다.

 무엇보다도 레이건의 신우파 정권하에서 사법부가 두드러지게 우경화했다는 말을 듣고있다. 대법원장격인 연방최고법원 수석대법관을 비롯해서 다른 대법관 3명이 레이건과 부시에 의해 임명된 이른바 보수파 인물로 대법관 9명 중 과반수가 우파 성향이다. 지난 10년 동안 우파정권하에서 극우 테러단체들이 때를 만난 듯 활개를 치고 나온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권운동가들은 몇해 전까지만 해도 KKK단을 비롯, 한두개에 불과했던 극우 테러단이 요즘에는 2백50여개로 부쩍 그 수가 늘어났다고 밝히고 있다. 이 우파 테러단들은 대개가 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운 인종주의자들이 만든 ‘증오단체’로 한조직의 회원수는 몇백명에서 몇천명밖에 안되지만 그 가운데는 유사 군대 조직까지 갖추고 있는 전투적인 단체도 있고, 그들 중에는 단순한 테러에 활동목표를 한정하지 않고 무력에 의한 정부전복까지 꾀하는 단체도 있어 연방수사국(FBI)의 특별감시를 받기도 한다.

 1백23년의 역사를 가진 KKK단은 1925년 전성기에는 회원수가 5백만명으로까지 늘어났지만 지금은 5천명 선으로 줄어들었다. 1981년 KKK단은 미국 나치당과 손을 잡고 도미니카 공화국 정부전복을 시도한 일도 있다. ‘마지막 살아남은 자’라는 별난 이름을 가진 테러단은 백인 개신교 목사들이 주동이 되어 인종간의 전쟁이 필연적이며 자기들만이 살아남는다고 믿으며 운영하는 것이다.

 ‘스킨 헤드’로 불리는 단체는 新나치주의자들의 행동대인데, 단체이름은 단원들이 머리를 박박 깎은 데서 나왔다. 백인아리안저항운동 · 기독교애국방위연맹 · 포세 코미타투스 · 민족주의자회 등이 인종편견을 내세운 증오단체들 중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이 증오단체들은 흑인 · 유대인 · 동양인 등 백인계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살인 납치 고문 구타 등 신체상 위해를 가할 뿐 아니라 집을 폭파하는 등 재산상의 피해를 입히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그뿐 아니라 동성연애자, 성문란행위자, 주일을 지키지 않는 기독교인들조차 이들의 테러대상이 된다.

 이념적으로 이들은 한결같이 반자유주의 · 반사회주의 · 반공산주의여서 당연히 반노동조합 쪽이다. 얼핏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는 단체들인데도 핵심간부진이나 지도부는 현직 경찰관 판사 목사 시장 지방의회의원 등 영향력 있는 공직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선거에 이들의 입김이 작용하는 경우도 생긴다고 한다.


일본
“천황폐하 만세!”

 지난달 17일 오후, 1주일 후로 다가온 盧泰愚대통령의 방일준비로 눈코뜰새없이 바쁘게 돌아가던 주일 한국대사관 앞 언덕길을 10여대의 대형차량이 줄을 이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차량행렬은 대사관 정문 앞에 잠시 멈춰서더니 일제히 스피커를 통해 “한국인은 일본이 싫으면 돌아가라”고 외쳐댔다. 특별경계중이던 경찰의 제지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차량행렬은 이번에는 스피커의 볼륨을 더욱 높여 옛날의 일본군가를 흘려보내기 시작, 우리 대사관 직원들은 떠나갈 듯한 소음 때문에 바쁜 일손을 잠시 놓아야만 했다.

 우리 정부와 여론의 일본왕 사죄요구에 불만을 품은 이런 우익집단들은 같은날 민단 나고야본부에 방화했고 엿새 후에는 히로시마시의 평화공원 옆에 서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의 방화를 기도했다.

 이들은 또 우리나라의 언론보도에도 불만을 품고 각 언론사 주일특파원 사무실에 매일 같이 협박전화를 걸어 일본왕 사죄요구 보도철회를 강요했다.

 반공의 탈을 썼을 때는 親韓성향을 보이기도 하고, 역사교과서 왜곡이나 일본왕 사죄문제  등이 거론될 때는 反韓캠페인에 앞장서고 있는 이들 우익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일본 공안당국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일본내 우익집단은 약8백40개, 그 구성원은 약 12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중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우익의 수는 약 2만3천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계보별로 보면, 가두선전차나 일본 군가를 금방 연상케 하는 이른바 ‘행동우익’이 절반을 훨씬 넘는 1만5천명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좌익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60년 안보투쟁’을 전후해서 주로 반공의 기치를 내걸고 생겨난 집단이다. 또 이들 속에는 70년대초 일본경찰이 폭력단조직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자 ‘야쿠자’조직에서 우익단체로 위장전환한 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일본경찰이 추산에 의하면 이런 위장 우익집단은 3백40개단체, 약 4천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일본 국내에서는 우익을 야쿠자와 동렬로 보는 시각이 점점 정착되어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익이라고 하면 이런 ‘유사 우익’보다는 2차대전 전의 玄洋社 · 黑龍會 등의 흐름을 이어받은 ‘본류 우익’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현재 3천여명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덴노’( 天皇)중심주의 · 반공 · 헌법개정 · 군사력증강 등을 주장하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 ‘70년 안보투쟁’으로 신좌익 운동이 활발해지자 이에 대항하는 이른바 ‘신우익’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현재 약 3천명으로 집계되고 있는데 反蘇뿐만 아니라 反美까지 주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반체제 · 국가혁신을 주된 활동목표로 삼고 있다. 이밖에도 민족파 학생단체 · 반공단체를 우익의 범주에 포함하면 일본내 우익세력의 수는 더욱 늘어난다는 것이 일본 공안당국의 분석이다.

 일본에서 현재와 같은 우익단체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메이지’(明治)시대 초반이다. 당시 서구화정책에 반대하는 일파가 메이지 14년(1881) 국회개설 등을 주장하는 자유민권운동과 연대, 玄洋社를 설립하고 “皇室敬戴”“本國愛重”등을 주장한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나중에 이들은 자유민권운동과 결별, 국가주의 운동의 원류가 되는 黑龍會 등 많은 단체를 잉태하게 된다.

 그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해지자 폭력으로 이를 저지하는 폭력우익이 등장하게 된다. ‘쇼와’(昭和)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대동아공영권과 같은 초국가적인 세계지배체제 확립을 주자하는 파쇼적 우익사상이 대두하여 이들의 테러활동은 군부의 비호 아래 절정을 이루었다.

 ‘一人一殺주의??를 내건 血盟團사건(1932),이누가이 츠요시(犬養毅)총리를 사살해 정당 정치의 종식을 가져온 5 ? 15사건(1932), 군부의 파시즘체계 확립 계기가 된 2 ? 26사건(1936) 등은 우익과 군부가 결탁해 일으킨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후 군국주의체제 강화와 전쟁확대 과정에서 침략전쟁의 첨병으로 날뛰던 우익들은 일본의 패망 직후인 1946년 미 점령군사령부의 공직추방령에 의해 단체강제해산, 지도자 추방조치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추방조치가 해제되어 단기적인 제재에 그치고 말았다.

 전후 일본 우익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한 것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체결된 이후라고 볼 수 있다. 그후 60년과 70년의 안보투쟁을 거치면서 좌익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자기증식을 거듭하였고, 이에 따라 자민당 보수정권에 대한 영향력과 일본사회 전체에 있어서의 입지는 날로 강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들은 입지강화와 자기실현의 유력한 수단으로 대전 전과 같은 테러활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사회당 당수 피살사건(1960), 송산당위원장 습격사건(1973), 經團連 습격사건(1977), <아사히신문> 코베지국 습격사건(1987), 나가사키 시장 총격사건(1989)등 그들이 전후 자행한 테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우익집단의 잠재적인 테러위협이 전후 일본내 과거사 청산문제의 진전을 가로막아온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일본의 우익들은 ‘천황제??국가를 지향하는 것을 공통적인 사상기반으로 갖고 있다. 따라서 전후 일본 사회가 ??천황제??그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금기로 여기며, 히로히토(裕仁)전 일본왕의 전쟁책임에 대한 역사적 판결을 아직껏 유보하고 있는 것은 이런 우익집단의 압력과 테러위협 때문이라는 지적도 많다.

 

독일

동독에도 ‘파쇼??활보

 이탈리아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월드컵 축구대회에서는 여러모로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이미 국제적으로 악명을 얻고 있는 영국의 ‘홀리건??(Hooligans)을 앞질러 광적인 서독팬들이 가장 먼저 다른 나라 응원단에게 폭행을 가하고 기물을 파괴한 사건도 하나의 이변이었다.

 “나는 독일인인 것이 자랑스럽다??는 스티커를 가슴에 붙이고 국제축구대회장을 찾아다니면서 ??독일! 독일!??을 외쳐대는 축구광들이 서독에서는 극우파의 온상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배타적 민족주의는 ??대독일??을 꿈꾸는 극우파의 논리와 쉽게 접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독에서 극우파는 여러 단체로 조직되어 있다. 폭탄테러도 주저하지 않는 ‘방위스포츠단??, 나치이데올로기를 공공연하게 추종하는 ??민족집회??, 그밖에 반유대인주의와 독일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독일민족민주당??,??독일민족동맹??,??자유노동자당??이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정치적 역량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연방의회는 주의회에는 어느 한 조직도 진출하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일부 시의회에서 몇 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공화당은 작년 1월의 베를린선거이래 지방의회와 유럽의회 선거에서 계속 7~8%를 득표함으로써 서독의 정치판도를 바꿔놓을 듯했다. 그러나 금년들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3차례의 주의회 선거에서 공화당은 2% 정도의 지지밖에 얻지 못하는 참패를 겪었다. 작년에 급속히 확산되던 이 단체의 대학생 조직이 점차 해체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거패배의 후유증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셴후버(Schoenhuber)당수가 바이에른주 지구당 간부들과 벌인 권력다툼에서 짐으로써 사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반해 동독의 상황은 자못 심각하다. 호네커체제가 무너짐으로써 갑작스레 생긴 권력 공백상태에서 신나치가 서독 극우파의 지원을 받아 급속히 확대되고 있으며 이들의 외국인에 대한 폭력사태가 자주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동독은 반(反)나치투쟁에 참여한 공산주의자들과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세워진 국가였기 때문에 반파쇼가 ‘국시’처럼 되어 있었다. 이들의 반나치 전통은 전쟁 후 나치 유산을 청산하는 데 소홀했던 서독에 대해 도덕적 정통성을 확보해주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또한 과거 동독정부는 베트남 · 모잠비크 등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후진국과 폴란드에 대한 원조의 일환으로 이들 나라의 노동자들을 동독기업에 취업시키기도 했었다.

 그러나 반파쇼와 국제주의를 공식 이데올로기로 갖던 체제가 무너지자 동독에서는 서독에서 보다 더 노골적인 극우파가 나타나고 있다. 모잠비크인 노동자를 폭행한 동독의 한 신나치 대원은 경찰이 출동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잃어버리고 갔던 안경을 되찾기 위해 태연히 되돌아온 사례도 있었다.

 지난 4월말 히틀러의 1백1회 생일에는 수백병의 신나치들이 동베를린시내 한복판에서 나치구호를 외치고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면서 행인과 경찰에게 돌과 빈병을 던지는 난동을 부렸다. 동독에서 신나치의 잠재력이 더 커지는 원인은 무엇보다도 동독인들이 서독인들에 대해 가지는 열등감을 외국인에 대한 우월감으로 보상받으려는 심리에 있다고 지적된다. 서독의 일간지<타게스차이퉁>은 이러한 현상을 커다란 서독인의 발에 밟히는 동독인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폴란드인을 짓밟고 있는 풍자화로 묘사했다.

 게다가 통일과정에서 최소한 1백만명의 실업자가 동독에서 발생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어 신나치의 준동은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이 큰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는 과거에 나치가 저지른 죄과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통일된 독일에서도 이들이 작으나마 폭력집단으로서 오랫동안 존속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들이 외국인 탓으로 돌리고 있는 실업문제, 주택난, 노후문제 등 제반의 사회문제가 가까운 장래에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무덤까지 파헤진 패륜

 유럽에서 극우세력의 대두가 가장 심각한 나라는 프랑스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장 마리 르 펜이 이끄는 극우단체인 프롱 나쇼날(Front National · 국민전선)이 정당 지지도를 측정하는 여론조사에서 15%의 지지를 획득하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르 펜에 대한 지지는 특히 남부지방에서 강한데, 이곳은 북아프리카에서 온 이슬람계 이민들의 문화적인 이질성에 대한 반발이 심하게 나타나고 있는 곳이다.

 프랑스는 원래 배타적인 나라는 아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프랑스가 최근 20여년 동안에 받아들인 정치적인 피난민들만도 16만5천명에 달한다. 이중에는 8만7천명의 아시아인이 들어있는데 그 대부분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난민이다. 유럽 난민은 6만명, 북아프리카 난민은 2천명, 아프리카 흑인난민은 5천명으로 각각 집계되고 있다.

 프랑스는 현재 국민의회(하원)선거에서 소선거구를 택하고 있으므로 르 펜의 의회 진출은 사회당과 보수연합세력의 협공에 의해 대체로 봉쇄되어왔다. 현재 국민전선이 차지하고 있는 의회 의석은 하나뿐이다. 그러나 여론의 지지도는 만만치 않다. 그 때문에 미테랑 대통령이 이끄는 사회당과 자크 시락 파리사장(전 총리)등이 이끄는 보수정당들은 이민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르 펜 지지의 상승세를 꺾으려고 애쓰고 있으나 적당한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지난5월 남부의 카르팡트라라는 소도시에서 괴한들이 유대인 묘지를 마구 파헤친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집권 사회당을 비롯한 모든 주요 정당들이 인종차별주의를 배격하는 규탄행사에 총출동했다. 르 펜의 추종자들이 그 사건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으나, 르 펜은 반유대주의적 · 이민배척 발언을 함으로써 그러한 사건을 유발한 분위기를 조성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비난받았다.

 인종차별주의를 배격하며 대중계몽활동을 벌이고 있는 ‘SOS라시즘’이라는 단체의 부책임자인 말렉 부티는, 프랑스의 극우 정치활동의 추이를 특히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역사상 프랑스가 유럽에서 사상 · 정치 등의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으므로 프랑스의 극우조직 활동이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퍼져나갈 우려가 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그는 프랑스의 우파가 드골 같은 큰 인물을 중심으로  결속되고 안정되어 있을 때와는 달리 요즘은 분열되어 있으므로 르 펜 같은 극우 정객이 파고들 틈이 생겼다고 분석했다.

 인종차별주의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현상은 프랑스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최근 유럽의회의 한 위원회가 유럽 각국을 답사하여 파악한 내용을 보면 거의 모든 나라에서 그러한 형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민 문제가 직접적인 요인이 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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