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바티칸 ‘가톨릭 종교전쟁’
  • 홍콩·이성훈 (자유기고가) ()
  • 승인 1991.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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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망명 주교 ‘추기경 임명’ 둘러싸고 첨예 대립 …국내 개방·지하교회 갈등도 심화

 소련과 동유럽에서 벌어진 사태를 주시해온 중국정부는 사회주의 정권의 위기와 몰락이라는 역사적 드라마의 중요한 배후지원 세력 가운데 하나로 바티칸을 지목한 바 있다. 중국정부는 특히 동유럽 민주화운동의 기수였던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역할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주의깊게 관찰을 해오는 한편, 국내적으로는 ‘애국협회’와 ‘지하교회’ 사이에 점차 심화되는 갈등에 대처하기 위해 고심해왔다.

 정치적으로 다소 민감한 시기였던 금년 6월2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새 추기경 23명을 임명했는데 이중에는 현재 미국에서 망명상태로 생활중인 중국 상해교구의 주교 ?品梅 추기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티칸과 관계를 끊지 않은 채 중국공산당이 승인한 가톨릭 집단 ‘애국협회’를 거부한 혐의로 30년간 옥살이를 한 공추기경을 바티칸은 이미 79년 비밀리에 추기경에 임명했지만 신변안전을 이유로 발표가 지연 되어왔었다.

 이날 임명된 새 추기경 명단에는 체코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1952년 28세의 나이로 비밀리에 주교로 임명되어 주교활동을 한 지 9년만에 발각돼 12년을 감옥에서 지내고 이후 공장노동자로 지내오던 체코 지하교회 얀코레츠 주교도 포함되어있었다. 이 두 추기경은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비타협과 교황에 대한 충성심의 모범적 사례로 치하되었다. 이들의 추기경 임명은 지난 수년간 진행된 공산주의 정권의 몰락에 대한 바티칸의 입장을 상징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내주었다.

 예상대로 공추기경의 임명은 중국정부를 자극하였고, 중국 외교부는 이에 대한 성명서에서 이를 ‘중국의 내부문제에 대한 간섭 행위’로 규정하여 유감을 표명하고 이 사건이 향후 중국·바티칸의 관계개선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한편 중국 천주교회의 주교회의 애국협회 종교사무위원회 등 3개 대표적 기구는 동시에 성명서를 발표, 공추기경의 임명을 지역 교회의 독립성과 자율성 원칙을 위반하는 내부문제 간섭행위로 간주하여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중국 내부문제 간섭 말라”
 이와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상해의 范忠良 지하주교(75) 체포는 천안문사태 이후 종종 발생하던 지하교회 소속 성직자 및 신자들 구속사태와 함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바티칸은 중국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1949년 이후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중국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지속해왔다. 80년대 초 중국의 개방정책과 함께 바티칸과 중국은 대화를 시작했고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교황의 중국방문 소문이 나돌 정도로 그 관계가 급진전되기도 했으나, 89년 천안문사태 직후 다시 악화되어 아직까지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관계정상화의 조건으로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함과 동시에 북경정부를 중국의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중국내부의 종교(천주교)문제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바티칸은 관계 정상화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수십년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애국협회를 거부하고 교화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지켜온 지하교회의 반응을 고려해 다소 소극적인 자세를 보여왔다.

 작년말 애국협회 劉柏年 대변인이 “교황은 70년대 말 이래로 20명 이상의 중국인을 비밀리에 주교로 임명했다”고 밝혔듯이 바티칸은 지하교회에 대한 은밀한 지원을 통해 외교적 협상에서의 유리한 위치를 마련하고자 해왔다.

 이 사건은 중국교회와 바티칸의 관계가 애국협회가 성립된 1957년 이후 1년도 채 안돼서 단절된 후 바티칸에 의해 처음으로 취해진 획기적 조처이다. 전문가들은 이 조처를 지난 몇 년간 소련과 동유럽에서의 공산주의 몰락에 따라 자신감을 갖게 된 바티칸이 중국 교회문제에 보다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천안문사태 이후 중국정부는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의 ‘인권’을 내세운 외교적 압력에 시달려왔다. 9월초 중국을 방문한 존 메이저 영국총리는 李鵬 중국총리와의 회담에서 중국 인권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구체적으로 37가지 사례를 제시했는데, 이중 8개는 하남성 지하교회 소속 劉冠東 주교를 비롯한 종교인 구속에 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바티칸은 이러한 서방세계의 인권공세를 계기로 삼아 적극적으로 중국교회의 문제해결에 착수 한 것이다.

 바티칸의 발표는 중국교회 내부갈등을 더욱 첨예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중국정부는 60여명의 주교 가운데 20명의 ‘비애국적’주교를 찾고자 감시를 더욱 강화할 것이며, 확인이 될 경우 처벌하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지하교회의 공개적인 도전
 이 사건 훨씬 이전부터도 중국교회는 내부적으로 애국협회와 지하교회의 갈등이 종종 표출되곤 하였다. 이같은 갈등은 81년에 설립돼 중국정부에 의해 승인받은 주교회의와 별도로 이를 거부하는 지하교회 소속 주교들이 독자적 주교회의 구성을 위해 89년 11월 산서성의 한 마을교회에서 비밀집회를 가지게 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회의의 선언문에서 지하교회 주교들은 “새로운 주교회의의 구성은 우리의 의무이자 중국천주교회의 일치와 생존을 위한 핵심적 과제”임을 강조하였다. 이 회의에서 선출된 3명의 대표지도자 중에는 이번에 추기경으로 임명된 공품매 주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비밀 주교회의는 중국정부와 애국협회를 극도로 긴장시켰고 집회에 참석한 일부 주교와 사제들은 후에 구속되었다. 한편 이러한 예기치 못한 회의 결과에 당황한 바티칸은 경고성 메시지를 통해 그러한 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지하교회의 과감하고도 공개적인 도전에 직면한 애국협회의 입장은 분명하고 단호하다. 애국협회 회장이며 주교회의 의장인 文祖章 주교(50)는 “종교의 자유가 주어져 있는 지금 지하에서 비밀리에 활동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이러한 활동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잘라 말하면서 “불교나 이슬람교에는 지하에서 활동하는 세력이 전혀 없음”을 그 예로 들었다. 그러나 정치적 색채가 보다 덜한 주교회의는 이 사건이 발생하기 수개월전인 89년 3월 회의에서 아래 3개항에 동의하면서 바티칸 및 지하교회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전향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첫째 교황은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신자들이 교황을 위해 기도하는 것 또한 허락해야 할 것이다. 둘째 주교회의가 교회업무 전반을 관장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결혼한 것으로 알려진 주교들은 주교회의와 종교사무위원회의 회원이 될 수가 없다.

 이러한 갈등은 젊은 성직자들을 좌절감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하북성의 한 교회에 부임한 젊은 신부는 단지 애국교회의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서품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신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결국 사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연변 조선족 출신 엄태준 신부(29)도 비슷한 이유로 지하교회 소속의 같은 조선족 사제인 80여세의 진신부(하얼빈 거주)와 관계가 불편하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오직 극소수의 사제들만이 누가 지하교회의 주교인지 알고 있어 심지어는 결혼한 애국교회 주교 사망시 교회에서의 장례식이 거부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도시지역 신자 급격히 증가
 이러한 복잡한 내부문제에도 불구하고 도시지역의 교회는 새로운 입교자, 특히 청년층의 괄목할 만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과거엔 노인들이 미사 참석자의 대부분이었으나 이젠 화려하게 정장하거나 청바지 차림을 한 젊은이들을 북경이나 상해 등의 교회에서 쉽게 볼 수 있게 되었고, 사제직을 희망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증가하여 신학교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이 문화혁명의 극단적 경향과  80년대 초반 이래의 개방정책이 가져다준 복합적 결과라고 분석한다. 즉 과거(문화혁명)의 금기가 현재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개방정책으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거나 천안문사태로 중국공산당에 대해 실망과 좌절을 느낀 젊은 세대들은 그 대안으로 교회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문조장 주교는 “최근 많은 젊은이들이 삶의 도덕적이며 정신적인 의미를 찾아 교회에 오는데 이러한 현상은 10여년 전 문화혁명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또 자신이 5년 전 50여명의 사제 가운데 최연소자였다면서 그 동안의 젊은 사제의 수적 증가를 다소 감격적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80년대초의 개방정책과 함께 종교적 자유를 되찾은 지 10년이 지난 현재 중국의 기독교는 4백만명에 달하는 개신교도와 6백만명으로 추산되는 천주교도 모두를 합해도 그 수가 아직 전체 인구 11억의 1%에도 못미치는 소수종교에 불과하다. 지난 10년 동안의 괄목할 만한 수적 증가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져다주었지만 아직 내외적으로는 산적한 과제들을 안고 있다.

“양국 외교관계 수립이 시급한 과제”
 중국 교회문제의 저명한 권위자인 鄧守成씨는 가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한 문제해결의 시나리오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바티칸과 중국정부 사이에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이에 따라 주교를 임명할 때에는 중국정부와 사전상의를 거쳐 선택권과 거부권을 지닌 바티칸에 후보자 명단을 제출해야한다. 외국과의 관계에 있어 중국교회는 정치협상(자문)회의를 통해 정부의 조언을 구해야 한다. 애국협회는 그 역사적 임무가 성취됨에 따라 점차 축소되어 사라지고 대신 보다 강하고 응집력있는 주교회의가 교회의 전반적 임무에 대한 실질적인 결정권과 운영권을 확보해야 한다. 애국협회와 지하교회 모두 주교임명을 중지하고 현 수준에서의 주교 수를 유지해야 한다. 결혼한 주교는 독신을 준수하는 새로운 사제들로 점차 대체시켜 나가야 한다.”

 그에 따르면 이후 교황은 중국을 방문하여 이전에 이뤄진 합의에 대해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며, 고난 속에서 신자들이 지켜온 신앙과 충절의 가치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전개된 변화에 대한 합법성을 동시에 보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국교회가 여러 차원에서 외국 교회기관·단체와의 본격적 교류를 증진시키고, 결국에는 중국 주교회의가 정식으로 아시아 및 세계 교회에 임원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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