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O 낙오병’ 한국 선택 기로 섰다
  • 이흥환 차장대우 ()
  • 승인 1994.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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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위상 걸맞는 자리매김 필요 “유엔에 대한 병역 의무…적극 참여해야”



아프리카 서부 사하라 유엔평화유지활동(PKO)에 참여할 국군 의료 지원단 선발대가 출국한 다음날인 8월 10일, 국방부 정책기획관실의 PKO 실무 담당자가 경제기획원을 찾아갔다. 95년 예산안 중 PKO 관련 항목을 왜 증액 편성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PKO 업무와 관련돼 국방부에 책정된 94년도 예산액은 2천2백만원이었다. 이는 PKO와 관련된 일종의 업무추진비 성격일 뿐, 평화유지군의 현지 활동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국방부가 95년분으로 신청한 예산액은 94년의 3배가 넘는 7천만원이다. 경제기획원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당장 국방부 담당자를 만나자고 했고, 국방부 정책기획관실 실무자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달려간 것이다.

예산안 설명회가 있었던 그날은 국방부가 2백63쪽에 달하는 <유엔평화유지활동의 실체>라는 보고서를 발간한 날이기도 했다. PKO 업무를 맡은 정책기획관실의 ‘작품’으로, 국방부로서는 숙원 사업 한 가지를 마무리지은 뜻깊은 날이었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정책기획관실 채홍섭 중령은 “2년 만에 PKO라는 신상품을 우리 손으로 개발해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보고서를 가리켜 ‘국내에 유일한 PKO 바이블’이라고 자평했다.

서부 사하라 의료지원단 파견, PKO 예산 증액 신청, PKO 보고서 발간이라는 세 가지 사안은 별로 주목받지 못한 채 파묻혀버렸다. 그러나 8월9~10일 이틀 사이에 벌어진 이 사건들은 국내 PKO 문제에 획을 그을 만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우선 42명 규모의 서부 사하라 의료지원단(무궁화부대) 파견은 지난해 공병부대(상록수 부대)의 소말리아 파견에 이은 두 번째 PKO참여이다. 의료지원단 파견은 이미 지난 7월14일 국회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이번 파견에 대해 국내 여론은 잠잠했다. 92년 6월 소말리아 파견 문제를 놓고 찬반 양론으로 여론이 들끓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외무부와 국방부 실무 담당자들은 보병이 아닌 의료지원단이라는 점 때문에 관심이 덜했거나, PKO 파견에 대한 인식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보고서 발간.예산증액 신청 ‘변화 신호’
이같은 무관심 또는 인식 부족 속에서 PKO 예산 증액 신청은 PKO에 대해 주무부처가 비로소 관심을 갖고 적극 대응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보고서 발간도 마찬가지다. 이제야 걸음마 단계에 들어선 셈이다. PKO의 실체에 대한 사회 인식도가 낮고 정보가 거의 없던 2년 전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92년 6월, PKO 파병 내용이나 방법론은 고사하고 참여 자체에 대한 찬반 논쟁이 달아올랐을 때, 국방부 내의 일부 장군들 사이에서조차도 PKO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많았다. ‘단 1명이라도 우리 병력을 해외(전쟁터)에 내보낼 수 없다’는 것이 파병 불가론의 이유였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실무 부처 담당자 몇 명을 빼고는 대부분이 PKO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국내에서는 ‘PKO 전문가’를 찾기가 힘들다. 외무부와 국방부 정책담당 부서의 실무자 2~3명이 그나마 실무 차원에서 PKO업무를 파악하고 있는 정도이며, 학계나 관련 연구원의 연구도 유엔의 공식 자료를 인용한 보고 자료 외에는 거의 전무한 상태다. 국방부 정책기획관실 송영근 대령은 <유엔평화유지활동의 실체> 서문에서 ‘안개 속을 더듬어 길을 찾아나온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실무를 맡았던 한 고급 장교는 “처음에는 PKO에 대해 무지했다. 정책 자체가 없었다. PKO 종주국이라 불리는 핀란드의 PKO 교육센터를 다녀오고, 일본 자료를 수집해 분석을 끝낸 후에야 감을 잡았다”라고 말한다.

유엔 가입 직후인 91년 19월, 한국과 PKO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의 상황은 차라리 희극적이다. 유엔은 회원국이 된 한국에 PKO 참여에 대한 설문서를 보냈다. 인적.물적 자원을 어느 정도 보낼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한국은 우여곡절 끝에 병력을 7백30명 파견할 수 있다고 회신했다. 당시 답변서 작성에 참여했던 한 실무자의 증언은 한국이 PKO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7백30명 중에는 군 옵서버 36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94년 6월말 현재 PKO 주요 참여국이 특정 1개 지역에 군 옵서버를 파견하는 숫자는 평균 10명 안팎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숫자가 많았을까. 실무자의 답변은 이렇다. “솔직히 말해 당시에는 군 옵서버가 뭔지도 몰랐다. 군 옵서버도 단위 부대 별로 파견되는 줄 알고 1개 소대 병력 수를 기준으로 계산하다 보니 그런 수치가 나왔던 것이다.”

논란이 되었던 보병 5백40명 파견 건도 PKO에 대한 인식 부족을 드러낸 사례이다. 일반인은 물론 언론이나 학계.정치권에서조차 설문 답변서에 적어 보낸 대로 우리가 ‘곧 보병 5백40명을 파견’하는 것으로 알았다.

PKO 담당 부서인 외무부 국제연합정책과 최종문 사무관은 “설문서에 대한 회신 내용은 일종의 데이터 베이스일 뿐이다. 참여국이 입장을 표시하면 유엔이 각국의 자료를 모아 검토한 후, 인원이나 범위를 정해 구체적인 인원을 요청하는 절차를 밟게 되어 있다. 반드시 답변 내용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변서의 성격을 설명한다.

설문서 회신에 보병을 포함했다고 해도 파병 여부는 국회 동의를 얻어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므로, 설문서 회신에 처음부터 참여 가능성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은 93년 국내 여론 때문이 아니라 유엔의 요청에 따라 소말리아에 보병 대신 공병을 보냈다. ‘PKO의 꽃’이라 불리는 보병은 PKO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 PKO 참여국 대부분이 공병이나 의료단 등 특수 지원부대보다 보병 파견을 선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외무부나 국방부도 보병 파견을 희망한다. 그러나 PKO 참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보병 파견 얘기만 나오면 신중해진다. 전투 부대의 인명 피해를 우려해서다. 외무부나 파병 당사자인 국방부는 PKO가 분쟁 지역에 배치되기 때문에 인명 피해가 생길 가능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보병일지라도 전투 행위에 가담하지 않으며, 지금까지의 PKO 인명 피해율이 0.149%로 극히 낮다는 점을 들어 보병 파견을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한다.

한국 소극적 태도에 회원국 눈총 따가워
외무부와 국방부 실무자들은 안팎으로 시달린다. 국내외 무지와 싸우면서 국제 사회의 압력에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엔 회원국이 되고도 유엔평화유지활동에 소극적인 한국을 쳐다보는 국제 사회의 눈초리가 고울리 없다. 외무부의 한 관계자는 “유엔 한국대표부는 죽을 맛이다. 회원국들 사이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힘들 정도다. 한국도 이제는 먹고 살 만한데 왜 유엔평화유지활동에는 나 몰라라 하느냐는 눈총이 여간 따갑지 않다. PKO 참여 활성화는 유엔 한국대표부의 최대 현안이다”라고 말한다.

94년 6월말 현재 PKO에는 1백84개 유엔회원국 중 68개국이 참가하고 있다. 전체 참여 인원은 7만1천5백43명. 한 나라가 평균 천여 명씩 파견한 셈이다. 우리나라는 8월10일 현재 소말리아에 남아 있는 개별 요원 6명과 서부 사하라에 파견한 의료단 42명 등 모두 48명이 참여하고 있다. 세계 랭킹 21위(유엔 정규 분담금 납부 순위)인 국가치고는 턱없이 저조한 참여도다.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 4개국과 호주 캐나다 등은 PKO의 ‘슈퍼 파워’라 불린다. 파견한 인원이 많을 뿐 아니라 자국 비용으로 ‘PKO 교육센터’를 설치해 운영하는 등 적극 참여하기 때문이다(59쪽 상자 기사 참고).

48년 ‘유엔 예루살렘 정전감시단(UNTSO)’이 처음 평화유지활동을 편 이래 PKO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소말리아와 캄보디아에서 PKO가 시작된 이후로는 그 활동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문제가 논란거리로 대두되었다. 평화적인 방법만 고수하던 전통적 개념에서 벗어나 강제력을 행사하는 쪽으로 성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소말리아에서는 의약품과 식량을 원조하기 위해 군사력을 행사한 점이 문제되었고, 캄보디아에서는 특정 국가의 행정에 개입함으로써 주권을 침해하지 않았느냐 하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PKO는 6과 4분의 3’이라는 말도 이 때문에 나온 것이다. PKO가 유엔평화유지활동의 전통적 개념을 규정한 유엔헌장 6장고, 평화 강제 집행권을 부여한 7장 중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어중간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굳이 헌장상의 근거를 대라면 평화유지(6장)보다는 강제력을 규정한(enforcement) 7장 언저리에 가깝게 가 있는 상황을 비꼰 말이다. 4대 유엔 사무총장 하마슐드에 의해 ‘PKO는 6과 2분의 1’이라고 불렸던 것과 견주어보면 이제는 훨씬 더 7장 쪽에 접근해 있는 상황이다. 걸프전 당시 다국적군 참가는 PKO 성격 변질의 대표적 예로 꼽힌다.

“PKO는 6과 4분의 3” 성격변질 비판도
PKO에는 강대국은 물론 제3세계 국가도 다수 참여하고 있다. PKO는 평화 해결을 위한 다자적 방법의 일환이다. 그러나 PKO 예산의 30%를 부담하고 있는 미국 내에는 다자적 방법에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만약 다자적인 방법을 고수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정책과 어긋나는 일이 벌어진다면 돈은 돈대로 쓰면서 자칫 국익과 관계 없는 분쟁에 휘말리는, 난처한 입장에 처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제기구 문제를 전공한 박재영 박사는 “전통적인 PKO의 원칙이 많이 깨지고 있다. 결국 PKO 강화가 PKO의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48년 이후 88년까지 40년 동안 13건에 불과했던 PKO 참여 건수는 88년에서 93년에 이르는 5년간 15건으로 늘어났다. 탈냉전 이후 새 국제 질서 아래에서 분쟁 발생 건수가 늘어나면서, 자연히 PKO 참여율이 높아진 것이다.

PKO는 유엔 사무국의 지휘.통제를 받는다. 이것이 PKO에 대한 또 하나의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평화유지활동 임무가 다양해지고 이에 따라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군사 활동 또한 확대.강화되면서, 유엔 사무국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한계가 지적되는 동시에 총괄적인 통제 장치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PKO 참여 문제가 처음 국내에서 대두되었을 때 반대론자들은 국방부와 외무부를 공격했다. 국방부는 군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해외 파병을 주장하는 것이며, 외무부는 비상임이사국 가입을 위해 PKO 참여와 보병 파병을 강조한다는 비판이었다. 해당 부처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무자들도 할 말은 있다.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PKO 참여는 유엔회원국으로서 병역 의무를 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했다.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징집 기피자’처럼 기죽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외무부의 한 관계자도 이와 같은 주장을 편다. “한국은 유엔 정규 분담금 순위에서 세계 랭킹 21위 국가다. 이제 우리도 체면 유지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국제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한 존경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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