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천문학자의 비극
  • 아이작 아시모프 (과학칼럼니스트) ()
  • 승인 1991.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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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리아왕조 시대의 영국에서 ‘숙녀들’은 전혀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다. 교육이라고 해봤자 그림그리기나 피아노를 배우는 게 고작이었으며 돈푼이나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옷을 사거나 파티에 참석하거나 연애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숙녀들’이 아닌 여성의 경우는 당연히 먹고살기 위해 일을 했다. 이 경우에도 교육적 배경이 없이 일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예외는 있는 법. 독일여성 캐럴라인 루크리셔 허셸이 여기에 속했다. 1750년생인 그는 일찍이 영국으로 건너가 오르간연주자로 일하던 오빠 윌리엄을 찾아가 성악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후에 두 사람은 천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에 음악을 포기해버렸다.

 캐럴라인은 결혼까지 단념하고 천문학에 탐닉했다. 오빠가 만들어준 작은 망원경을 가지고 천체를 관측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해 최초로 유명한 여류 천문학자가 되었다. 그는 특히 혜성을 열심히 추적해 혜성 8개를 발견했다. 오빠가 죽은 뒤 그는 독일로 돌아왔는데 조카인 존 허셸이 아버지와 고모의 뒤를 이어 천문학적 업적을 쌓아나갔다.

 미국의 첫 여성 천문학자는 마리아 미첼(1818년생)이었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그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아마추어 천문학자인 아버지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천문학을 공부했다. 1847년 10월1일 그는 혜성 하나를 발견해 과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1849년 미국해상청에 들어가 천문학 관련 계산작업에 몰두했다. 1865년에는 뉴잉글랜드 지방에 신설된 바사여자대학 천문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여성에게도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하는 역할을 할 것인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여성교육을 위해 일했다.

옥스퍼드대학 첫 명예박사학위 수여자 애니 캐넌
 그의 천문학적 업적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나 아무런 사회적 도움없이, 그리고 여성에 대한 온갖 편견을 무릅쓰고 이룬 것이었다. 그는 억압받는 여성으로 상위 신분을 획득한 표본으로서 미국과학원의 첫 여성회원이다.

 애니 점프 캐넌(1863년생)은 주 상원의원 딸로 태어났다. 그는 1884년 웰즐리대학을 졸업했는데 1894년 천문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왔다. 그후 래드클리프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으며 1896년 하버드대학 천문대에 들어가 평생 동안 그곳에서 일했다.

 캐넌은 별의 스펙트럼 번호를 분류하는 작업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는데 그가 개발한 분류법은 하버드대학에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는 극소수의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 별의 스펙트럼이 연속적 형태로 분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업은 마침내 9등성이나 10등성보다 밝은 22만5천3백개 별의 스펙트럼 분류를 포함하게 된 ‘헨리 드레이퍼목록’의 토대가 되었다. 1925년 그는 옥스퍼드대학의 첫 명예박사학위 수여자가 되었다.

 헨리에타 스윈 리빗(1868년생)은 목사의 딸로 1892년 래드클리프대학을 졸업하고 1902년부터 하버드대학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별의 광도를 측정하는 과정에서 그는 2천4백개의 변광성을 발견해 당시 알려져 있던 변광성의 수를 배로 늘렸다.

노벨상은 남성이 차지
 1912년 그가 하버드 대학의 페루 소재 관측소에서 외부은하계의 대규모 성단인 마젤란성운을 연구하고 있을 때 그에게 중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성운 속 별들의 지구로부터의 거리는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전체 거리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기 때문에 마젤란 성운의 별들은 모두 지구로부터 거의 같은 거리에 있는 것이다. 그는 성운 속의 케페우스형 변광성들을 연구했다. 이 별들은 맥동현상을 보이는 별들이다. 1904년 그는 빛의 변광기간이 길면 길수록 별의 평균광도는 더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12년에 리빗은 여러 가지 케페우스형 변광성들의 상대적 거리를 판단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

 케페우스형 변광성들은 극대의 거리를 판단하는 최초의 방법을 제시해주었으며 그 결과 우주에 대한 지식을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 방법을 상세하게 완성하여 영예를 얻은 것은 할로우 섀플리였다(그는 남성이었다).

 그런 일들은 종종 일어난다. 1969년 조슬린 벨은 펄사를 발견했으나 펄사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그의 상사였다(물론 남성이었다). 당시 벨은 어깨만 으쓱해보이고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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