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가 남긴 불가사의
  • 이흥환 기자 ()
  • 승인 2006.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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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는 낙선하고 ‘피고’는 금배지 달아 … ‘사법처리’ 아닌 ‘정치합작’



6공화국이 만들어낸 말 중에 ‘청문회 스타’라는 게 있다. 88년 말에서 89년 초까지 3개월 남짓 정가는 이 스타들을 탄생시켰다. 신문 잡지 방송 가릴 것 없이 언론 매체는 서로 앞다투어 이 스타들을 등장시켰고,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낸 국회 특별위원회의 청문회장이 스타들의 데뷔 무대였다. 盧武鉉·金光一·李海璨·李喆鎔·金 炫·金永鎭·朴?武 의원 등이 청문회를 통해 화려하게 등장한 신인들이다. 초선은 아니지만 金東周·李 哲 의원 등 재선 의원도 청문회 영웅 대접을 받았다.

 청문회는 죄인도 만들어냈다. 형식은 증인이었지만 실제로는 국민재판정에 끌려나온 피고인이나 마찬가지였다. 許文道·許三守·許和平 씨 등 3허씨와 鄭鎬溶·鄭周永·李相宰·張世東 씨 등이 청문회에서 고초를 겪었다.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당시 민주당 김광일 의원은 증인으로 출석한 정호용씨를 상대로 신문하던 중 “광주사태 이후 받은 훈장을 반납할 생각이 없느냐”하는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정씨로서는 딱 부러지게 답변하기 힘든 ’정답 없는 물음‘이었다.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라는 답변에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야당 의원들이 정씨를 무차별 공격했음은 물론이다. 어찌보면 매를 들기 위한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4년이 지난 현재, 한때 각광받던 몇몇 청문회 스타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자취가 없고, 대신 죄인 취급을 받았던 증인들은 어엿하게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여의도 국회로 출근하고 있다. 청문회에서 인기를 얻었던 의원과 국민재판을 받았던 증인들의 신세가 불과 3~4년 사이에 뒤바뀌었다는 사실은 정치의 무상함과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훈장 반납할 생각이 없느냐”하고 호통치던 김광일 의원은 14대 총선에서 낙선해 원외로 밀려났고, 반면 정호용씨는 한때 의원직 사퇴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다시 14대 국회에 진출했다.

초선 ‘스타’ 7명중 3명만 재선

 5공 실세였던 3허씨 중 허문도씨를 뺀 허화평·허삼수 씨도 14대 국회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두 사람 모두 청문회의 증인이었다. 허문도씨는 경남 고성군에서 출마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허문도씨는 5공 내내 실세였고 여전히 全斗煥 전 대통령 사람으로 분류되지만 원내에 진출하지 못한 반면, 5공에서 한때 실세였으나 권력핵심에서 밀려났고 6공에서는 해외로 전전하는 등 겉돌았던 허화평·허삼수 씨는 지역구민의 심판을 받아 당당히 원내에 진출했다.

 국회 문공위의 언론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80년 언론대학살의 ‘주범’ 중 1명으로 낙인찍혀 야당의원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던 이상재씨도 충남 공주시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지난 8월 민자당에 입당했다. 전 보안사 언론담당관이었던 이 의원은 특히 언론 청문회에서 위증 혐의로 불구속기소되는 등 야당의 모진 질타를 받았으나, 여덟 차례나 연이어 공판에 나오지 않음으로써 ‘소신’을 굽히지 않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일해재단과 관련해 5공비리특위 청문회에 증인으로 불려나갔던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씨는 현재 국민당 대표로 변신해 정치권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88년 11월 한 언론사가 한국갤럽조사연구소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김동주·노무현·김 현 의원 등이 ‘5공비리 청문회에서 신문을 잘한 국회의원’으로 뽑혔다. 이 3명중 김동주 의원은 아예 공천을 받지 못해 지난 14대 총선에 출마도 못했고, 노·김 두 의원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해 원내 재진출에 실패했다.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5공 특위의 권력형비리 조사위원장을 맡았던 김동주 전 의원은 청문회에서 걸걸한 목청과 특유의 제스처로 증인들을 신문해 “야당의원답다. 시원시원하게 잘한다” “의원 신분으로서 좀 지나치다“는 평을 동시에 받았는데, 특히 증인으로 나온 장세동씨와의 한판 대결로 주가를 올린 바 있다. 3당 합당으로 소속이 민자당으로 바뀌었다가 수서택지 특혜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지역구 공천에서 밀려났다.

 김씨는 과거 청문회 증인들이 원내에 진출 한 것에 대해 “옛 세력이긴 하지만 지역구에서 심판받아 당선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전국구나 다른 방법을 통해 권력층에 복귀하는 것은 무리수다”라면서 “5공과 6공은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 지난 청문회에서 위증이나 불출석으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은 차기 정권에서 재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재 자신의 옛 지역구인 경남 양산과 서울 마포에 사무실을 내고 활동중이다.

 노무현 전 의원이야말로 청문회 스타의 대명사격이었다. 청문회 직후의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으로 뽑히기도 했을 만큼 최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10여년 간의 변호사 생활에서 체득한 논리적 사고와 신문 기술이 그의 주특기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 행로는 청문회 이후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의원직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잠적했다가  번복했던 일, 민자당 참여를 거부하고 민주당에 잔류해 반김영삼의 목소리를 높였던 일 등 그 나름대로의 소신에 찬 정치적 언행을 현실정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지난 3·24총선에서 金大中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 공천을 받아 부산 동구에서 출마했다가 떨어졌다. 상대는 청문회의 증인 중 1명으로 金永三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허삼수씨였는데 13대 총선에 이은 두 번째 결전에서 허 의원 앞에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노 전의원은 현재 민주당 청년특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고, 지방 강연을 다니는 등 여전히 바쁘게 활동중이다.

 국민당 최고위원직에 있는 김광일 전 의원도 변호사 출신답게 논리적인 신문으로 청문회에서 돋보였던 사람이다. 역시 김영삼씨의 민자당행에 반대하며 민주당 잔류세력으로 남아 있다가 국민당에 참여, 부산 중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6공을 거치면서 시대 정신은 사라지고 세싸움만 남았다”고 말하는 김 최고위원은 청문회의 증인으로 나왔던 5공의 핵심 인물들이 국회에 다시 진출한 것을 “역사의 후퇴”라고 단정짓는다. “시대가 바뀌면 그 시대의 상징 역시 교체되어야 한다. 개인의 양심이나 능력은 둘째치고라도 5공과 유신 세력은 뒤로 물러섰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또 “5공세력이 자기를 변화시키는 세탁 과정을 한번 거치고 나서 정치에 다시 참여했다면 몰라도 자정 노력도 없이 그대로 눌러앉는다는 건 문제다”라고 지적한다.

 청문회를 통해 정치적으로 발돋움한 초선 의원 중 이해찬·김영진·박석무 의원은 지난 14대 총선 고지를 무난히 돌파해 현재 재선 의원으로 활동중이다. 노무현·김동주·김 현 의원이 청문회를 통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13대 의원 당시의 당적을 옮겨 14대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경우라면, 이해찬·김영진·박석무 의원은 당적을 변경하지 않은 채 재선에 도전해 성공을 거둔 경우이다.

 청문회에서 국민의 인기를 얻었던 일부 초선 의원들이 4년 남짓 짧은 기간에 정치적으로 큰 기복을 보인 것은 현실정치에 두터운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다. 정치권에서 20년 이상 정치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김영삼씨나 김대중씨에게 왜 ‘정치 9단’이라는 별명이 붙어다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김광일 전 의원은 “시대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 시대가 바뀌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말로 자신이 처해 있는 ‘원외’라는 정치적 위상을 평했다. 하지만 정치인이 시대의 흐름을 일시 정지시키거나 아예 그 틀을 바꾸어 버리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국회 특위 청문회는 우리 정치 현실에서 긍정적으로 기여한 바 크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청문회는 한계를 노출했다. 사법적 종결이 아니라 정치적 종결로 막을 내린 1노3김의 정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청문회를 겪고 나서 야당의 한 청문회 스타 의원은 “정치의 뒷면을 알았다”면서 정치인으로서의 비애를 이렇게 표현했다. ”5공 세력보다는 소속 당 핵심부와 권력층의 압력에 가까운 주문이 더 참기 어려웠다. 적당히 하라는 말이었다.“

 모난 돌이 먼저 정 맞는다는 속담은 정치판에서도 진리로 통한다. 새옹지마는 정치판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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