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홍보’냐 원시적 ‘買票’냐
  • 이흥환 기자 ()
  • 승인 1991.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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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광고사·· 선거꾼 총선대목 힘겨루기… PP TT SS MM 등 판매기법 다양

선거꾼들이 또 움직이기 시작한다. 4개월 앞으로 다가온 총선거 대목을 노리고 시 · 도의회 선거 직후 풀어놓았던 구두끈을 다시 고쳐매는 중이다. 막후의 선거꾼들이 거동을 시작하면 또 하나의 상품 시장이 기지개를 켠다. 정치인을 ‘파는’시장, 정치광고 시장에 불이 붙기 시작하는 것이다.

광고는 경쟁의 산물, 경쟁이 있기에 광고가 있다. 경쟁치고 국회의원 선거만큼 치열한 것도 드물다. 정치광고의 비중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정치판 안팎에서 벌써부터 정치광고를 ‘광고’하는 자리가 마련되는 것은 정치광고가 대접받는 시대풍조를 반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집권당인 민자당은 선진국 주관으로 지난 22~23일 이틀 동안 중앙당에서 ‘정치선전 워크숍’을 열었다. 중앙대학교 이대룡 교수(광고홍보학과)는 ‘광고기법을 어떻게 정치선전에 활용할 것인가’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정치 캠페인은 사람을 파는 것”이라고 전제, 후보자의 친화력을 강조했다. 선거공보에 실리는 후보자 대부분의 사진이 마치 범인 수배전단의 사진 같다고 지적한 이교수는 친화력 외에도 효과적이 주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주된 주장과 부수적인 주장이 서로 상충되어서는 안된다”면서 만화가의 작업이 좋은 예라고 지적했다. 한 인물을 나타낼 때 인상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만을 부각시켜야지 여러가지 요소를 모두 다 강조하려 했다가는 실패하기 쉽다는 것이다.

‘정치 광고’대접받는 시대로
그는 또 “어떻게 팔 것이냐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외국 사례로 광고계의 거목인 데이비드 오길비가 정치집단 고객을 거부한 네 가지 이유를 소개했다. 정치집단은 신용도가 낮으며, 반대편 정당 인물이 당선되었을 경우 적이 된다. 정치 캠페인에 따르기 마련인 정치책략의 희생물이 되기 쉽고, 정당 일을 할 경우 그 동안 봉사해온 기업에 빚을 지게 된다.

민자당 워크숍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양당 구도하의 선거전략’이라는 주제였다. 강사인 경희대학교 주관중 교수는 “현재 집권당의 선전활동은 영점”이라면서 “한손에는 마이크(선전), 한손에는 증거물(업적)을 가져야 한다. 증거물 없이 유권자를 유인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민자당과 민주당을 강자와 약자로 비유한 주교수는 ‘강자의 분산논리’가 민자당에, ‘약자의 집중논리’가 민주당에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즉 민자당의 경우 독수리나 호랑이가 무리를 이루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것처럼 강자들은 서로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민자당을 ‘전전 다노 2김’이라고 표현했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전전), 신TK 구TK 등 노대통령 휘하의 여러 진영(다노), 김영삼 · 김종필(2김)씨를 일컬은 것이다.

주교수는 또 선거 전략과 관련해 “전략은 선택”이라면서 케네디와 닉슨의 선거전을 예로 들었다. “케네디는 5개 주만을 골라 헬기 두 대를 동원, 집중적이고 여유 있는 선거운동을 했다. 닉슨은 50개주 전체를 돌아다녔다. 결과는 케네디의 승리였다. 선택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사례다.”

그가 소개한 PP TT SS MM 시스템은 참석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옳은 인물(right person)을 적절히 지역구(right place)에 배치하고, 시간을 잘 선택해(right time) 분명한 주제를 가지고(right theme), 전략을 잘 짜서(right strategy) 조직을 효율적으로 가동하되(right system), 깨끗한 돈(right money)으로 효과적인 매체를 동원해야(right media) 한다는 것이다.

워크숍은 이밖에도 ‘집권당 선전 활동의 문제점’과 ‘선전실무’ 등 정치광고의 실무에 대한 토론 자리도 마련했다. 특히 집권당 선전 활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자리에서 강사로 나온 코래드 기획본부의 정만석 국장은 지난 87년 노태우 대통령후보의 선거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선거전략 수립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특히 노태우후보의 선거전략이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 등 다른 대통령후보 진영의 선거전략에 비해 짜임새나 규모, 시기나 조건면에서 월등히 나았다고 지적했다.

정치광고 전문인들은 한결같이 선거의 ‘과학화’를 주장한다. 이에 반해 각 정당의 공조직이나 사조직에 흡수되어 있는 이른바 선거참모들 또는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선거꾼들은 정치광고의 필요성을 인정하긴 하지만, 선거전략 수립에서부터 집행까지 일괄적으로 대행사에 맡기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우리의 선거 풍토에서는 직접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부대끼는 방법과, 지역구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자신들의 득표활동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주장이다. 구관이 명관이고, ‘첨단과학 제품보다는 수공업 제품이 더 믿음직스럽다’는 것이다.

선거의 승패는 ‘전략’에
광고업체의 ㅈ씨는 “이른바 선거꾼들의 ‘매표’를 통한 원시적인 선거방법과 정치광고 대행사의 과학적인 선거방법 중 어느 것이 득표에 더 효과적인지 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느 쪽이 옳은지는 자명하다”고 말한다. 과학적 선거를 주장하는 광고 전문인들도 선거꾼들의 구식 선거운동이 일면 효율적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오랜 기간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후각’이나 ‘표 동원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권자 의식이 정착되어 있지 못하고 매표가 성행하는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과학적인 선거운동 방식이 절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편 현역 정치인은 선거꾼의 ‘수공업’과 대행사의 ‘기계화’를 적절히 활용,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전략을 수립하기 마련이다.

광고인 전문연수기관인 한국광고연구원에서는 10월23일부터 나흘 동안 ‘선거전략과 정치광고’ 세미나를 개최했다. 정치광고 해외사례연구, 정치광고 제작의 주안점 등 정치광고 실무에 역점을 둔 이번 세미나에는 ‘92년 정세전망’‘현행 선거법과 개정방향 해설’ ‘민자 · 민주 양당의 선거전략’ 등 정치권의 현안들도 포힘시킴으로써 정치광고의 정상적인 궤도 진입을 시도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 연구원의 김민기 원장은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나서 정치광고회사에 대한 평점이 내려지고 기여도가 평가되면 정치광고 시장이 94년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치광고 대행사인 ㅁ기획을 운영하면서, 지난 기초의회 의회선거에서 의뢰인 25명 후보를 전원 당선시켰고, 광역선거에서는 15명 중 10명을 당선시키기도 한 김원장은 “14대 총선의 경우 제대로 된 정치광고 기획사에 3~4차례의 여론조사까지 포함해 업무 전반을 대행시킬 경우 줄잡아 2억여원의 비용이 들 것”이라고 내다본다. 현재 전국의 정치광고대행사는 30여개로 추산된다. 하지만 이중 코마콤 등 불과 4~5개만이 정상적인 활동을 할 뿐인데, 본격적으로 선거바람이 불면 소규모 인쇄업자 등 3백여개의 군소회사가 난립할 것으로 보인다.

‘홍보’대 ‘買票’대결
지난 지방선거의 특징 중 하나는 꽤 많은 후보자들이 인쇄홍보물 제작에 한해 대행사의 손을 빌렸다는 점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그같은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이 정치광고 전문인들의 전망이다. 이들은 국회의원 출마자들이 홍보물만 대행시킬 계획이라면 아무리 늦어도 12월에는 대행사와 계약을 마쳐야 하리라고 조언한다. 한 예로 서울 서초갑구를 겨냥해 활동하고 있는 전 총무처장관 김용갑씨의 경우 이미 한 정치광고기획사와 단독 계약을 맺고 지역구 조사활동에 들어갔다고 알려져 있다.

14대 총선은 차기 권력의 향배를 결정짓는 정치일정이라는 점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여야간의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한국광고연구원의 이병주 대표이사는 “또 한번의 금권선거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현행 선거법으로는 유권자가 후보자의 됨됨이를 파악할 기회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거법 등 제도적 장치만 가지고는 깨끗한 선거를 기대하기 힘들다. 과학적인 선거 운동을 정착시켜 매표를 없애는 동시에 유권자가 후보자를 잘 알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권자와 정치인이 각각 소비자와 상품으로 둔갑, 잠시나마 소비자의 선택권이 대접받는 정치의 계절에 앨빈 토플러의 말이 생각난다. “현대의 정치지도자들은 줄도 없는 빈 전화통에 대고 얘기하는 사람들이다.” 정치광고가 과연 ‘전화줄’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정치지도자들의 ‘전화’에는 애초부터 ‘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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