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기 모독과 표현의 자유
  • 안재훈 객원편집원 ()
  • 승인 1990.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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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식 민주주의의 만화적 요소가 최근국기 소각 문제를 둘러싸고 떠들썩한 논쟁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예산적자, 교육, 마약, 살인, 외교, 세법 개정 등 수없이 많은 중요한 안건은 제쳐두고 국기 모독, 애국심 발로, 헌법수정, 표현의 자유 등의 문제를 놓고 문자 그대로 국력을 낭비하고 있는 게 요즘의 미국이다.

  미국의 2억 인구중에 정치적 불안을 국기 소각으로 항의하는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도 충분히 꼽을 수 있을 만큼 미미한 정도인데 대통령과 국회, 그리고 언론과 대법원이 ‘국기모독’에 집중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 국회의원은 인기가 있어야 선거에 당선되므로 정치인이 ‘인기물’을 이슈화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미국의 유일한 ‘성역’문서인 연방헌법을 지키고자 하는 이상주의적 노력 때문이다.  별 50개와 13개의 줄로 된 성조기의 흰색은 순정 (purity), 빨강은 용맹(valor),파랑은 정의(justice)를 표시하며 그 별명은 ‘오래영광’(old glory)이다.

  인간이란 이런 상징물을 만들어 내어 울고 웃으며 살다가 죽는다.  올림픽 입상식에서 자국기가 올라가면 감격에 벅차 눈시울을 붉히는 것이 인간이다.  ‘선명한 태극마크’에서 한국인이 감동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조기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하늘에 펄럭이는 저 기치(banner)’를 보고 흥분하는 게 미국인이다.  국기를 통한 ‘애국심 조장’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동일하다.  그런데 미국에는 헌법에 보장된 의사표현의 자유를 내걸고 주요 공공장소에서 국기를 소각하거나 땅에 놓고 짓밟는 시위꾼들이 가끔 있다.  좌경 외국학생의 반미시위가 아니라 자국민이 항의할 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시위대와 흥분한 구경꾼 사이에 주먹다짐이 벌어지기 일쑤다.  국기 모독죄 여부가 시끄러워지면 지방정부. 주정부 법의 차원을 넘어 결국 대법원까지 올라가게 된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국기 모독은 처벌해야 한다”

  미 의회는 지난 몇 달간 국민간에 격렬한 논쟁을 야기해온 성조기 모독 금지법안을 최근 부결시켰다.  6월초에는 연방대법원이 국기 훼손에 체형을 줄 수 있도록 한 모든 법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분명히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시대통령과 공화당 전략가들은 “헌법을 고쳐서라도 국기 모독은 처벌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미국인 대부분도 대법원의 권리장전(Bill of Rights) 수호는 법적으로 옳지만 국기 소각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믿고 있다.  이 논쟁은 올 가을 선거에 새 이슈가 될 것이다.

  각 나라마다 국기 모독 금지법이 있는데 영국은 이 점에서 퍽 관대한 편이다.  국기란 상징물 말고도 자랑스런 전통이 많기 때문이란 그럴듯한 주장이다.

  미국인 20명중 1명은 일주일에 한번 이상 성조기를 자랑스럽게 게양한다고 한다. 6월14일은 ‘국기의 날’이고 독립기념일의 국기게양은 장관이다.  워싱턴 기념비는 50여개의 대형 성조기에 둘러싸여 있다.  이런 애국심의 표상을 놓고 몇 사람의 몰지각한 행동이 국회의원의 시간을 뺏고 있다.

  이슈가 생기면 왈가왈부 입씨름 벌이는 것을 업으로 삼고 사는 일부 지식인은 마치 아이들이 소풍날 흥분하는 것처럼 신이 나서 논쟁을 한다.  보수파. 온건파 칼럼니스트들은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고 유머 칼럼니스트는 나름대로 신바람이 난다.

  국기 때문에 헌법을 고치자면 상.하 양원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과 50개 주 가운데 38개 이상의 주 의회에서 비준을 해야 하는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성조기 패션.액세서리 늘 인기

  한편 성조기 패션이 늘 인기있는 곳이 미국이기도 하다.  옷.모자.목걸이뿐 아니라 컵.그릇.수저와 여타 장식품도 성조기를 변용시켜 만든 디자인이 많다.  20여년 전에는 구멍난 청바지를 성조기로 꿰매 입었던 사람이 6개월 징역살이를 한 일도 있다.  어느 선까지가 디자이너의 미적 감각에 속하고 어느 선부터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국기 모독 금지법이란 이렇게 애매할 수 있는 것이다.

  선거 때 후보자가 유권자를 열광시키는 30초짜리 텔레비전 광고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국기 모독 운운..’하는 짧고 효과적인 정치광고는 쉽게 만들 수 있다.  유권자인 국민을 멸시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득표작전을 준비중인 광고인에게는 편리한 무기인 셈이다.

  미국 헌법의 처음 10개 수정 조항이 ‘권리장전’인데 이것은 세계적으로 퍽 독특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나 언론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도 국회는 제정할 수 없다”라고 명시한 것이 헌법 수정 제1조이다.  내년이 이 권리장전 제정 2백주년이다.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60세 이상인 사람은 30세 미만의 사람들보다 두배 이상 국기를 자주 게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의 경우는 연령별로 어떤 차이를 보일까.

  미국의 성조기 모든 금지법을 둘러싼 시끄러운 논쟁은 결국 국회의원의 수치스런 패배로 결말이 내려지고 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국민이 ‘얼간이’몇명의 행적에 초연한 입장인데 비해 인기에 민감한 정치인들이 불필요하게 법석을 떨었다는 판단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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