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털어낸 ‘금고털이’ 인생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4.09.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과 7범 ‘대도’ 백동호씨, 작가로 새 삶 쌍둥이 형제 비극 담은 자전적 장편 10월 출간

 “야 백동호! 나, 강력계 김반장이야. 9월22일 밤 동산유지 금고털이 사건, 네가 했지? 우리 피차 머리싸움이나 신경전은 벌이지 말자구. 우리도 너에 대해서 조사할 만큼은 다했어. 55년 4월28일생 폭력ㆍ절도 전과 5범. 본적 서울 현재 대전시 대사동 이층 양옥집에 살고 있지. 승용차는 충남 1다 8411 그라나다. 바둑 아마 5단. 더 말해볼까?”
  85년 10월31일 밤 10시 20분 전국을 누비던 ‘10억대 금고털이’ 백동호씨(당시 30세)는 대전 시청 앞 채권 사무실에서 잠복하고 있던 부산 중부경찰서 형사들에게 붙잡혔다. 그는 그해 9월22일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주)동산유지 경리과에 침입해 대형 금고 2개에서 약 3억원 상당의 현금과 채권을 털었는데, 채권 가운데 일부를 애물아비에게 넘기고 대금을 받으러 가던 길이었다.

6년간10억대 훔쳐…한때 한달 용돈 천만원
  강력계 김반장이 백씨에게 제시한 신상명세 사이사이에는 많은 ‘사연’이 접혀져 있다. 일란성 쌍생아의 동생. 쌍둥이 출산 직후 세상을 떠나버린 생모. 유곽에서 온 계모. 사주명리학에 빠져 있던 아버지. 그 아버지는 사기도박판에 뛰어들었다가 쌍둥이 형제가 다섯 살 때 피살되고 말았다. 계모는 자취를 감추고, 졸지에 부모를 잃은 쌍둥이 형제 가운데 형은 고아원으로, 동생은 온양의 자식 없는 한 가정에 입양되었다. 그때까지 쌍둥이 형제의 성은 황씨였다.

  양부모의 매를 견디지 못한 국민학생 백동호는 열세 살 나던 해 가출해 수원ㆍ인천과 서울 용산역 일대를 전전하는 밑바닥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열다섯 살에 처음으로 소년원에 들어갔고, 76년 나이 스물둘에 그는 이미 별 6개(전과 6범)를 달고 있었다. 80년부터 85년까지, 그러니까 세상의 금고를 자신의 주머니로 삼았던 금고털이 시절, 스물다섯부터 서른살에 이르는 5년10개월 간이 그의 ‘황금기’였다. 그가 겨냥한 금고 가운데 터는 데 실패한 금고는 없었다. 그 시절 그는 1년에 대여섯 번만 금고를 털었는데, 당시 한달 용돈이 천만원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1억원이 훨씬 넘는 액수다.

  40년 가까운 그의 생애에 빛은 없었다. 유년기부터 ‘어둠의 자식’이었다. 감옥을 드나들며 더 완벽한 범죄인이 되기를 꿈꾸던 그가 삶의 커브를 튼 적이 있었다. 다섯 살 때 헤어진 쌍둥이 형의 소식을 감옥에서 듣고 난 뒤였다. 그는 갱생을 꿈꾸었고, 그 꿈에 온몸을 던졌다. 운명을 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다시 좌절. 93년 봄, 공주교도소에서 황순헌 변호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더 거대하고 완벽한 범죄’를 계획하는 대도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살아왔던 백동호씨가 장편 소설을 펴내면서 작가로 데뷔한다. 밤의 세계에서 그는 이제 낮, 빛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전과 7범, 10억대 금고털이에서 소설가로. 40대 입구에서 벌어진 존재의 대전환이다.

  그가 10월 중순에 내놓을 세 권까지 장편소설〈대도〉(가제ㆍ포도원 펴냄)는, 수기에 가깝다고 하리만큼 체험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자전 소설이다. 작가의 이름과 소설 주인공의 이름이 같은 이 실명 소설 앞에서처럼‘삶은 문학에 앞선다’‘현실이 더 소설적이다’라는 말이 적절한 경우도 드물 터이다.

  85년 체포되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이 자전 소설은,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유년기와 성장 과정을 더듬어 나오는데, 그 긴박한 속도감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감옥살이, 감옥에서 만난 죄수들의 삶, 밑바닥 인생들의 야망과 절망, 첫사랑, 범죄의 심리학, 금고털이 수법, 삶과 인간에 대한 인식 등이 발빠르게 전개된다.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출소해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글쓰기이고, 또 돈이 필요합니다.” 그의 집필 동기는 의외로 솔직하고 담백했다.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는 따위의 ‘허위의식’이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나 자신은 부끄럽지요. 다만 이렇게 다양한 삶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굳이 의미를 달자면, 이른바 도덕적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과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단 한 편의 습작도 없이 써내려가는 소설이라 글쓰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소설 속의 백동호는 철저한 악인이어야 하는데 자칫 자기 변명과 합리화가 끼여드는 것은 아닌지, 소설적 기교가 부족한 것은 아닌지, 여자들이 너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도 없지 않다.

  그가 소설에 선뜻 달려든 것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독서 습관 때문이었다. 다섯 살 무렵, 짜장면을 사준다는 말에 구구단을 한나절에 외어버린 그는, 취학 전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쳐 일찍부터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대전 자양초등학교 3학년 때 지능지수 검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1백50이 나왔다. 전교에서 가장 높은 수치였다. 교사들은 벌써부터 손버릇이 나쁘기로 유명한 백동호가 아마 지능검사 시험지를 사전에 훔쳤을 것이라면서, 다른 곳에서 새 검사용지를 가져와 따로 재검사를 받게 했다. 결과는 1백48이었다.

  그러나 국민학교 내내 공부에 충실할 수 없었다. 여름에는 아이스 케이크 장사를 하느라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평범하고 양순했으나 성격이 워낙 급했던 부모로부터 매를 많이 맞았다. 자기의 혈액형이 양부모 사이에서는 나오기 불가능한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그의 가출은 더 잦아졌다. 마침내 열세 살 때 그는‘단독자’가 되고 말았다.

  76년 폭력범으로 징역 10월을 살고 안양교도소에서 나온 이후 그는 폭력범 딱지를 떼고 금고털이로 돌아섰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전과자들은 소매치기면 소매치기, 좀도둑이면 좀도둑 하는 식으로 한번 발 들여놓은 ‘분야’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금고털이로 돌아서기 직전 그는 쓰라린 첫사랑을 통과하는데, 소설보다 더한 우연 때문에 그 사랑에 실패하고 말았다. 소년원에서 배운 바둑으로 서울 남영역 앞에 있는 한 기원의 바둑 사범으로 있었다. 책읽기를 좋아하던 그는 기원 근처 서점에 자주 들렀는데, 그 서점 아가씨와 눈이 맞았다. 결혼 이야기가 오갔고 여자의 어머니를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신랑감’을 본 어머니는 고개를 젓다가 기절하고 말았다. 얼마 전 시장통에서 돈가방을 들치기하다가 면도칼을 들고 돈가방 주인과 실랑이를 벌인 적이 있는데, 그 시장에서 포목점을 하는 여자의 어머니가 그 장면을 목격했다는 것이었다.

영화 주인공에 반해 금고털이 변신 
  79년 전과 6범으로 출소한 그는 ‘지긋지긋한 감옥살이’를 청산하고 싶어했다. 대전 양부모에게 내려가, 포장마차를 차리겠으니 돈을 좀 융통해 달라고 했다가 심한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그의 눈에는 돈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때까지 그는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취직할 형편도 못되었다. ‘돈이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라고 중얼거리던 시절. 그는 우연히 서울 미아리의 한 재개봉관에서〈빅맨〉이란 영화를 보게 된다. 주인공이 금고털이로 나오는 영화였다. 그는 감동했고, 극장문을 나서는 순간 금고털이가 되기로 작정했다.

  이 때부터 두 달간 청계천 금고 전문 상가에 다녔다. 밤늦게 금고 가게 문을 따고 들어가 밤새도록 금고를 분해하고 그 원리와 구조를 익혔다. 다시 그 금고를 조립해 놓고 문을 닫아주고 나오기를 되풀이했다. 금고털이 훈련도 ‘훔쳐서’한 것이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금고털이는 흔치 않았다. 두 달 뒤에 ‘개업’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금고의 원리는 같기 때문에 금고를 여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다. 금고 담당자들은 대개 귀찮아서 마지막 번호만을 살짝 돌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금고는 30초 이내에 열린다. 네 자리 숫자를 다 들려놓았을 때는 40분 정도 걸린다. 이렇게 소리를 듣고 여는 방법 외에도 다이얼뭉치 뽑아내기, 다이얼의 중심축 뚫기, 뒷면 뜯기 등 다양하다. 금고 뒷면을 뜯어낼 때는 소음을 어떻게 방지하느냐가 가장 중요한데, 소리를 내면 10분, 소리가 나지 않게 하려면 20분 정도 걸린다.

  그러나 금고를 여는 일보다는 그 금고에 어떻게 접근하느냐, 어떤 금고를 선택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가령 부산 지역의 금고를 턴다고 했을 때, 그는 결산공고가 나와 있는 신문을 뒤져 현금이 잘 돌아가는 업체 서른 군데를 일차로 선정한다. 그리고 주소를 알아내 일일이 사전 답사를 한 뒤 다섯 군데로 압축하고 다시 꼼꼼하게 현장을 살핀다.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을 선택하는 것이다.

  85년까지 5년10개월 동안 그는 한두 차례를 제외하고는 늘 혼자 금고를 털었다. “공소장에는 그동안 털어온 돈이 8억이라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그 두배에 달하는 16억 정도”라고 백씨는 말했다. 1년에 2억~3억원씩 턴 셈이었다. 82년에 결혼해, 대전에 살림을 차리고 서울을 오고갔다.

  처음에는 돈을 좀 모아보려고 했으나 이내 방탕해졌다. “무엇이든 최고품을 썼습니다. 그때 돈으로 17만원짜리 안경을 썼고, 훔친 것이지만 8백만원짜리 시계를 차고 다녔지요. 아마 열등의식 때문이었을 겁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틈틈이 읽어온 책들이 ‘부잣집 아들 행세’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주로 검은 뿔테 안경을 썼고, 목소리도 낮게 했다. 아무도 그를 금고털이로 보지 않았다.

  그는 남다른 자존심과 승부욕을 지니고 있다. 서울구치소에서 감방 소지(청소 담당)를 할 때 상대가 ‘살인마’김대두인 줄 모르고 한판 싸움을 벌인 적도 있다. 그 싸움에서 김대두가 졌다. 곧 화해하고 절친해졌지만 그는 김대두와의 만남에서 인간을 새로 보았다.  “강간하다가 옆에서 우는 아이를 발로 짓눌러 버렸다는 살인범이 동료 죄수들을 ‘저 새끼, 인간성부터 나쁘다’고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악한 사람일수록 남을 정죄하는 데 가혹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85년 구속되었을 때, 그는 보다 완벽한 범죄인을 꿈꾸었다. 마취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어를 독학하고 밖에 있는 친구에게 원서를 부탁하기도 했다. 알리바이를 확보하는 법, 재벌 납치 계획, 경비원들에게 마취약을 쓰는 방법 등을 감옥 안에서 구상했다. 김대두를 만난 이후, 그는 ‘결코 남을 미워하지 말 것’‘보다 낮은 곳에 나를 둘 것’ 두 가지를 실천하기로 했다.

무기수 된 쌍둥이 형 소식 듣고 참회
  88년 봄, 청주교도소에서였다. 청주교도소는 전국 교도소에서 기술을 배우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었다. 체육대회가 있던 날이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달려오면서 알은체 하는 것이었다. “형님, 저 모르겠어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며 걸음걸이까지 똑같은데…” 기술을 배우려고 이감온 그 사람은 쌍둥이 형을 만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쌍둥이 형은 살인범이었고 현재 무기수로 복역 중이라고 했다.

  그날 밤 그는 ‘뺑끼통’(변기) 위에서 울었다.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칼침을 맞고 죽은 부모, 다섯 살 때 헤어진 쌍둥이 형제. 같은 죄인. 그는 그날 밤 완전한 범죄인이 되는 것을 포기했다. 이 운명을 거역하고 싶었다. 목표를 수정했다. 그는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가당찮게도 서울대를 목표로 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교도소 직원과 사투를 벌이며, 청주교도소를  몇 번 들썩거리게 한 후에 고시반에 들어갔고, 3개월 만에 고입 검정고시를 치렀다. 충청북도 수석이었다.

  그러나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그를 이혼이 가로막았다. 그는 아내와 헤어졌다. 이제 그를 찾아오는 면회객은 아무도 없었다. 영치금도 없었다. 감옥만큼 돈이 필요한 곳도 없다고 그는 말한다. “얻어먹은 만큼 한번은 써야 하는데 나는 돈이 한푼도 없었습니다. 잡범들로부터 ‘대도도 별 수 없군’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또 일부러 사고를 치고 독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이혼은 큰 충격이었다. 검정고시를 포기했다. 청주와 대전 교도소에서 ‘알아주는 인물’이었던 그는, 공주로 이감된 이후 글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읽을 책과 집필권이 없었다. 그는 교도소측에 ‘자매 결연’을 부탁했다. 교도소측은 ‘변호사님, 여기 아주 꼴통(문제 죄수)이 하나 있는데 한번 만나보십시오’라면서 황순헌 변호사를 백씨와 연결해 주었다.

 “황변호사님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입니다.” 황변호사는 백씨의 능력을 인정해 주었고, 책이며 운동기구를 넣어주었다. 출소하는 그에게 양복 한 벌과 석달치 생활비를 전해 주었다. 출소하기 전에 이미 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다잡은 뒤였다. 지난 4월1일 출소한 백씨는 친구의 소개로 전주 근방 염불암에 들어가 삭발했다. 소설을 쓰기 전까지 내려오지 않으리라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를 알아보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하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소 직후 그는 한 라디오방송에 편지를 띄운 적이 있었다. 그 방송을 들은 사람들이 수소문하여 찾아오는 것이었다. 결혼하자는 여자도 있었다.

범죄ㆍ추리 소설 작가가 꿈
  그는 인간세를 하나의 생태계로 이해한다. 생태적 관점에서, 지구에는 불필요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인간이 볼 때 파리ㆍ모기는 해충이지만, 파리ㆍ모기의 처지에서, 생태계 전체의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범죄ㆍ범죄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든다.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열대어를 수송하는데 처음에는 당연히 열대어에게 가장 쾌적한 상태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미국에 도착해 보니 절반이 죽어 있었다. 궁리 끝에 열대어의 천적인 뱀장어를 한 마리 넣었더니 극소수만 뱀장어에게 먹히고 나머지는 건강했다는 것이었다.

  인간세라는 생태계에서 범행과 검거는 천적이다. 감옥과 감옥 밖 세상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감옥과 감옥 밖 세상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는 절도ㆍ강도와 같은 폭력이 전무한 세상이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한때 그는 이 생태계 이론을 들먹였다. “내가 이 생태계에서 차지한 자리가 여기(금고털이)다. 인간에게는 생태계와 달리 양심과 이성이 있다고? 인간만큼 이기심이 강한 동물이 어디 있는가. 배추벌레를 죽이면서, 배추벌레가 베추를 먹어야 할 권리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라면서 금고털이를 ‘이 생태계 안의 당당한 직업’이라고 여긴 적도 있었다.

  글쓰기를 통한 새로운 삶을 그는 느꺼워했다. “나는 복이 있는 편입니다. 출소한 이들은 막일도 구하지 못해 쩔쩔맵니다.” 백씨는 9월이면 소설을 탈고한다. 앞으로 그는 범죄소설과 추리 소설 전문 작가가 되고 싶어한다. 그가 앞으로 쓸 소설들은 이미 교도소 안에서 구상을 다 해놓은 것들이다. 무기수로 복역중인 형을 뒷바라지하는 일 또한 그에 주어진 몫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섯 살 때 잃어버린 본명 ‘황삼주’를 되찾는 일이다. 자전소설을 발표하고 형을 보살피며 자기 본명을 되찾는 일만큼 자신의 새로운 일에 대한 확실한 ‘알리바이’가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