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세습’ 방치할 것인가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1.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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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변칙거래로 국민경제 희생… 21개 재벌 ‘대물림’ 끝마쳐

“재벌 총수들은 남들보다 덜 쉬고 덜 자면서 부를 축적해왔다. 사회의 귀감으로 보진 못할 망정 왜 성토 대상이 돼야 하느냐”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식거래를 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 최근 재벌에 대해 당국의 세무조사와 여론의 비난이 잇따르자 업계나 관련 회사 일부에서는 이런 반응이 나오고 있다.

부를 혼자 쌓아올린 것인지 정당한 방법으로 축적한 것인지에 대해선 시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부를 물려주는 것에 대해서도 그럴까. “몇몇 사람이 주식을 변칙으로 거래해 ‘사전 상속’을 함으로써 재벌이 대를 잇는다. 재벌 승계는 막아야 한다”라고 건국대 崔延杓 교수(경제학)는 말한다. 소유 분산뿐만 아니라 기회 균등이라는 차원에서도 부를 세습할 수는 없게 해야 하므로 정부의 조치를 환영한다는 견해다.

재벌이 부를 세습한다는 것은 국민의 희생이 세습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소득의 역분배와 경제력 집중은 중소기업과 일반대중이 주축을 이뤄야 하는 국민경제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고려대 李弼商 교수(경영학)는 “최근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재벌문제는 부의 세습화 자체보다는 국민희생이 세습된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주장한다.

현대, 국세청 추징액에 불복
변칙적인 주식거래를 통한 사전상속을 막기 위해 현대를 비롯한 재벌에 대해 세무조사가 진행중이지만 이미 49개의 재벌 가운데 21개 재벌이 대물림을 마쳤다(강철규 장지상 최정표 공저 《재벌》 54쪽). 물론 이들 모두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명실상부한 한국 최대의 재벌인 삼성그룹의 상속세액이 1백74억원에 불과했던 예에 비추어 볼 때 대권 승계를 마친 재벌들이 얼마나 착실하게 상속과 증여를 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서슬퍼렇게 시작됐던 이번 세무조사는 21개 재벌의 전례와는 다를 것이가. 한라그룹 鄭仁永 회장과 두 아들에 대한 59억원의 증여세 부과가 부당하다는 국세심판소의 판정때문에 국세청은 한때 난처한 처지에 빠졌다. 국세청은 현대에 대해 지난 10월22일 세금추징액으로 사상최대인 8백55억원을 통보했다. 현대측은 곧바로 대책반을 편성해 소명자료 작성에 들어갔다. 국세청은 현대쪽의 소명자료를 토대로 심사를 하게 되며 그 결과 양측이 고지하기 전 심사단계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할 경우 현대측은 국세심판소에 제소할 것이 확실하다. 여기서 만약 현대측이 승소하게 되면 국세청의 강한 의지와는 무관하게 국세청은 판결에 무조건 승복해야 한다.

지난 10월18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서 열렸던 정책공청회 ‘재벌의 증여 · 상속, 이대로는 안된다’에서 주제발표를 한 세종대 李載琪 교수(경제학)에 따르면 “현행 상속 · 증여 과세제도는 과세대상을 포착하는 데 미흡할 뿐만 아니라 포착된 재산에 대한 평가가 낮아서, 국세에서 상속 · 증여세가 차지하는 비중(89년 0.67%)이 일본(88년 3.33%)에 비해 크게 낮다”고 한다. 교묘하게 현행 상속 · 증여 과세를 빠져나가기 때문에 재벌총수가 현행 세법에 따라 제대로 세금을 낼 경우 부의 세습은 3대 정도면 끝나야 하는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명계좌 · 물타기…’로 교묘한 탈세
이교수와 세제전문가들이 지적하는 교묘하고 변칙적인 상속 · 증여의 유형을 살펴보자. 여러 유형들은 크게 주식거래를 통한 방법과 공익법인을 통한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주식거래를 통한 방법은 87년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금융실명제가 유보된 후에는 더욱 활발해져서 변칙적인 상속 · 증여 유형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이교수는 “89년 국세청에 포착된 주식관련 증여재산 가액은 3백76억원 정도였으나 91년에는 1천억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한다.

가명과 차명을 이용하는 경우 : 증권거래법에 따르면 상장법인의 임원이나 그 회사의 주식을 10% 이상 가진 주주는 주식을 사고 팔 때 신고를 해야 한다. 따라서 창업자는 ‘홍길동’과 같은 가명계좌를 통해 자녀에게 주식을 넘겨주거나 신고대상자가 아닌 주주의 이름을 빌려 물려준다. 많은 재벌들이 이렇게 사전상속을 했거나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지만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어 가명과 차명 계좌로 거래하는 것이 금지되지 않는 한 적발하기는 힘들다. 다만 이번 국정감사에서 李龍萬 재무부 장관은 신고대상자를 상장법인의 주식을 5% 이상 가진 주주로 확대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을 뿐이다.

주식 거래조건을 사전담합하는 경우 : 창업자는 자녀에게 자신이 가진 주식을 정상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팔거나, 그들이 가진 주식을 높은 가격으로 사들여 실질적인 증여를 할 수도 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84년 현대건설, 89년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강관 현대정공 현대종합상사 금강개발의 주식이 당시 1만~3만원 수준이었으나 액면가인 5천원에 일가족에게 양도했다.

유상 · 무상증자를 이용하는 경우 : 창업주가 자본금을 늘려 새로운 주식을 발행할 때 그 새로운 주식은 옛주주들이 우선적으로 사들일 수 있다. 이때 주주가 자신의 몫만큼 새로운 주식을 인수하지 않으면 이 주식은 실권주가 된다. 창업주는 고의적으로 새로운 주식을 인수하지 않고 이 실권주를 자녀로 하여금 인수하게 한다. 이와는 달리 자본금을 늘리면서 새로이 납입금을 내지 않고 현재의 몫에 따라 주식을 받는 무상증자의 경우는 원칙적으로 지분율을 변화시키기가 힘들다. 공개하기 직전에 이런 유상 · 무상 증자(물타기)를 하면 가진 주식이 크게 늘어나므로 주식가격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 한 큰 이득을 보게 된다. 현대그룹과 함께 조사를 받은 한라그룹과 한일합섬 강원산업 대림 부산파이프 등은 이런 예다.

減資를 이용한 경우 : 감자란 자본금을 줄이는 것을 말한다. 자본금을 줄이면서 회사는 그에 해당하는 만큼의 주식을 돈을 주고 사든지 강제로 회수해서 없애버린다. 이 때 창업자는 자기의 지분을 일부 포기한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다른 주주의 몫이 눌어나 자연히 증여를 한 것과 같게 된다. 한진그룹의 계열사인 정석기업의 자본금을 줄이는 과정에서 조증훈 회장은 자신의 지분을 일부 포기했다. 조회장을 제외한 나머지 대주주인 아들들과 계열사인 한진관광의 지분이 늘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공익법인을 이용하는 경우 : 문화재단 복지재단 장학회 등의 공익법인에는 상속 · 증여세가 면제된다. 창업자는 자신의 전재산을 공익법인에 내놓고 자녀나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을 재단 이사장에 앉혀 실질적으로 증여를 한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국정감사에서 한 의원은 재벌이 소유한 60개의 공익법인이 변칙상속의 수단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불공정한 합병을 이용하는 경우 : 주식시장에서 주식가격이 2만원에 거래되는 ㄱ회사와 1만원에 거래되는 ㄴ회사의 주식을 1 : 1로 합칠 경우 ㄴ회사의 주주들은 막대한 이득을 보게 된다. 상장회사인 (주)한진과 비공개회사인 대한종합운수를 합쳐서 趙重建씨를 비롯한 일가족 6명이 막대한 이익을 본 것이나, 현대중공업이 현대종합제철을 흡수합병한 것을 비롯해 잇따른 현대계열사들의 합병과정에서 정씨 일가가 막대한 이득을 본 것도 이런 방법을 통해서이다. 그룹 주력기업인 한보철강과 부실기업인 한보종합건설을 합병해서 鄭泰守 전 회장이 막대한 자본이득을 본 것도 사전상속의 의미는 없지만 비슷한 수법이다.

기타 : 공정거래법상 그룹내 계열사에 대해서 서로 출자를 하는 데는 제한이 있다. 상호출자한 부분은 실제 재산이 뒷받침되지 않는 빈 부분이니까 상호출자가 지나치면 두 기업이 부실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이 한도를 넘어선 부분에 대해선 처분을 해야 하는데 이 주식을 자녀가 사들이는 방법도 있다. 이외에 창업주가 지신이 소유한 회사의 재산을 아들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에 증여하고 이 회사에서는 이것으로 손실을 메우는 방법이 있다. 또 창업주가 2세를 거쳐 3세에게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3세에게 상속시켜 줌으로써 상속세를 아끼는 기발한 방법도 있다.

금융실명제 실시해야
이런 각각의 변칙적인 수법을 막을 수 있게 세법을 보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물론 90년 세법개정으로 상속과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상당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거기에 더해 상속세 비과세대상의 조건을 더 엄격히 하고, 과세평가액을 시가에 더욱 가깝게 하며, 과세대상 재산의 평가방법을 합리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개발연구원(KDI)의 李奎億 연구위원은 “재벌규제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한다면 몰라도 세법을 강화하는 것은 안된다. 세법을 잘못 손대면 일반국민도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막강한 두뇌집단을 거느린 재벌은 아무리 교묘한 법망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국민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견해인 것이다. 다만 변칙적인 방법을 쉽게 적발해내기 위해선 금융실명제가 실시돼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물론 언제 실시해야 하느냐의 문제를 두고는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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