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열도의 ‘화풀이 과소비’
  • 도쿄·채명석 객원편집위원 ()
  • 승인 1991.1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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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투기가 만든 ‘주택난민’…‘집 없는 귀족생활’ 대중화 고급외제차 5년새 1백만대 돌파…구입 43%가 봉급쟁이

 과소비 현상은 한국만의 전유물인가. 80년대 후반 ‘財테크’라는 유행어와 함께 불어닥친 일본의 소비붐을 들여다보면 한국인의 씀씀이는 차라리 애교에 가까울 정도이다.

 도쿄의 동쪽 지바市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고급주택가 ‘원 헌드레드 힐스’. 17.3ha(약 5만2천평)에 달하는 널따란 부지에 61채의 영국풍 초호화주택이 들어선 모습은 마치 미국의 베벌리힐스를 방불케 한다.

10억엔 호가하는 별장용 호화주택
 대리석 목욕탕, 수영장과 옥외 온천장이 갖춰진 이 호화주택들의 가격은 10억엔, 즉 57억원. 새집에 때가 묻는다는 이유로 집 보러온 사람들에게 흰장갑을 끼도록 강요한 부동산회사의 불친절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이 호화주택들은 즉시 매진되는 인기를 끌었다.

 일본의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이 호화주택을 구입한 어느 중소기업 사장은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살림집이 아니라 주말에만 들르는 세컨드 하우스로 이용하겠다”며 어깨를 폈다. 이 고급주택가를 조성한 도쿄부동산 관계자도 “이 일본판 베벌리힐스가 널리 선전되면 ‘일본인들은 모두 토끼집이나 새집에서 살고 있다’는 서양인들의 고정관념도 바뀔 것이다”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이 호화주택의 구입자를 보면 대개 중소기업의 사주와 의사 변호사 등이다. 그리고 주식투자나 부동산투기로 떼 돈을 번 벼락부자도 빠지지 않고 얼굴을 내민다.

 그러나 일본의 과소비는 이러한 ‘신 부유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86년 ‘엔高불황’을 계기로 초금융완화정책이 실시되자 일본열도는 주식·토지투기 열풍에 휩싸였다. 그 여파로 대도시권에서는 집없는 ‘주태 난민’이 크게 늘어났다. 이 때 유행한 것이 이른바 ‘야케쿠소(화풀이)소비’. 천정부지로 올라 버린 토지가격으로 말미암아 아예 내 집 마련을 포기한 샐러리맨들이 대신 화풀이로 고급차나 비싼 외재 브랜드 제품을 찾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작년 수입 외제차를 구입한 사람 중 43%가 샐러리맨이었다는 조사결과는 이러한 웃지못할 현상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수입 외제차 판매회사로 널리 알려진 ‘야나세’의 관계자도 이렇게 말한다. “집 장만을 포기하고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벤츠를 사겠다고 나타난 고객을 처음 본 것은 88년경이었다. 5백만엔의 현금을 직접들고 온 30대 후반의 맞벌이 부부였다. 월부로 고급 외제차를 사는 고객들의 2~3할은 거의가 내 집이 없는 사람들이다.”

 ‘신 부유층’과 이러한 ‘주택난민’의 화풀이소비로 일본의 외제차 수입은 급격히 늘어났다. 주식과 토지투기로 거품처러 부풀어올랐던 일본의 ‘버블(거품)경제’가 시작된 85년 외제차의 등록대수는 51만대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5년 새에 1백만대를 돌파하고 작년 한 해 동안만 22만대나 팔려나갔다. 그 중 ‘신 부유층’이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사들인 벤츠는 재작년 판매량이 40%나 늘어났고, BMW 매상고도 23%나 증가했다. 특히 페라리 같은 고급스포츠카가 대량 수입되어 높은 프리미엄이 붙자 자동차매매 그 자체가 투기의 대상으로 변하기도 했다.

일본, 전세계 다이아몬드 20%소비
 젊은이의 거리 도쿄 하라주쿠의 한 모서리에 작년말 문을 연 ‘FR 레어 쥬웰스’라는 가게는 희귀한 보석만을 전문으로 취급한다. 5캐럿 이상의 다이아몬드와 세계 보석시장에서 경매되는 유명한 목걸이 반지 등만을 거래하는 곳이다.

 가장 값싼 보석이 3백만엔이고 비싼 것은 5억엔을 호가한다. 이 가게의 주인은 “억대 이상의 고객이 대부분이고 오히려 백만엔대의 거래는 한산한 편이다”며 자신의 ‘신 부유층’을 겨냥한 영업전략을 자랑하고 있다.

 일본의 이러한 소비붐은 세계의 보석, 유명 브랜드 제품 회사들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이다. 전세계 다이아몬드의 20%를 수입하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고, 루이비통 회사는 전세계 매상고의 50%를 일본에서 올린다.

 크리스티안 디오르는 연간 매상고 6백억엔의 황금시장 일본을 공략하기 위해 새로운 판매전략 수립에 여념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숫자에는 일본인들이 현지에서 직접 쇼핑한 몫이 빠져있다. 파리 로마 홍콩 등지에서 유명브랜드 제품을 사기 위해 긴 행렬을 만들고 있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쇼핑금액을 가산한다면 그들의 과소비금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저팬 머니’로 이들이 세계의 부동산과 그림들을 매점했던 것도 바로 엊그제이다. 재작년 일본인들의 해외부동산 구입액이 1백억달러를 돌파하자 하와이 시드니 등지에서는 일본인 배척운동이 일어난 적이 있다. 마구잡이로 부동산가격을 올려놓아 집 장만이 어려워 진 현지인들이 일본 거품경제의 집중호우식 수출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다.

 다이쇼와제지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도 작년 뉴욕의 크리스티와 소더비 경매장에서 이 저팬 머니의 위력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불과 이틀 사이에 고흐의 “의사 가쉐의 초상‘을 8천2백50만달러에, 르누아르의 ’가레트의 풍차‘를 7천8백10만달러에 낙찰시켜 서양화 경매사상 최고금액을 일거에 70%나 상향 갱신시켰던 것이다.

 모두 1억6천60만달러에 달하는 그림을 서민들의 장보기처럼 사들인 그의 소비행위에 대해 일본 언론들은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처사”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는 “그림 한 장에 1백25억엔이나…하는 식의 서민감각차원으로는 나의 고상한 그림취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의젓하게’ 대꾸했다.

 작년 소득세 고액납세자 1백명 중 64명이 부동산과 주식양도로 돈을 번 벼락부자였다. 이러한 졸부들이 일본 소비붐의 주범이지만 일본식 사회·경제구조가 이 붐의 직접 연출자라는 지적도 있다.

 우선 연간 5조엔에 달하는 접대비를 꼽을 수 있다. 일본 국세청이 조사한 작년도 접대비 총액은 4조9천7백억엔, 매일 같이 1백40억엔이라는 거액이 골프장이나 밤의 네온가로 흘러들어갔다. ‘접대비 천국’ ‘社用族’이란 말이 한창 유행하던 지난 82년 일본 국세청은 사회문제로 등장한 대기업 접대비에 전액 과세 조처를 내렸다. 이에 따라 한때는 접대비 자숙움직임도 일었으나 호경기와 거품경제를 맞으며 금전감각이 마비된 기업들은 접대비를 다시 대폭 늘렸다.

 경제기획청도 최근 10년간 50%이상 늘어난 기업 접대비가 “물가 상승의 한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을 정도이다. 기업의 선물·접대는 속성상 가격이 높을수록 효험이 있기 때문에 과소비를 유발하기 쉽고 그것이 결국 물가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경제기획성이 구체적인 예로 지적한 것 중의 하나가 골프장 회원권. 일본 전국을 휩쓴 골프붐이 실은 이 접대비 때문이며 골프장 회원권 하나에 최고 5억엔을 호가할 정도로 투기붐이 일었던 것도 바로 접대비가 원인이라는 애기이다.

 일본인의 독특한 贈答문화인 ‘오가에시’습관도 이러한 소비붐과 무관치 않다. ‘오가에시’는 결혼식 장례식 명절 때 돈이나 물건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반드시 그 일부를 돌려주는 습관을 말한다. 한 앙케이트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주부들이 제일 먼저 없애야 할 나쁜 습관으로 ‘오가에시’를 들었으나 거품경제의 활기로 증답문화는 오히려 더욱 확대되었다. 예를 들면 그동안 일본의 선물·상품권시장의 전체 규모가 1조엔으로 늘어났고, 백화점의 상품권시장이 매년 10%씩 증가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일본의 소비파티 촛불도 서서히 꺼져가고 있다. 일본 제일의 환락가라는 신주쿠에 명멸하던 네온들도 거품경제 주역들의 파탄으로 하나둘씩 꺼져가고 있다. 하늘을 찌를 듯 기염을 토하던 ‘재테크’의 열기로 가득차 있던 긴자의 밤거리에도 이제는 빈 택시 행렬만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을 뿐이다.

 80년대 후반을 휩쓸었던 일본의 거품경제와 과소비 열풍이 남긴 유산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회주의국가”라는 일본인 자신들의 평등의식이 무너졌다는 허탈감이다.

10억엔을 호가하는 초호화주택을 별장용으로 구입하는 ‘신 부유층’이 무더기로 태어났는가 하면, 평균 샐러리맨들은 주택난민이 되어 교외로 밀리다 이제는 왕복3시간으로 늘어난 통근지옥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다.

 또 하나는 일본의 젊은이들을 쾌락추구형 인간으로 변모시킨 점이다. 거품경제가 한창 진행중일 무렵 ‘산리오문화연구소’라는 한 단체는 일본에 대중귀족화사회가 멀지 않아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개인당 국민총생산이 이대로 순조롭게 늘어나면 2000년에는 의식주를 생산하는 고통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귀족들처럼 편안히 놀고 먹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이른바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3K 직종’을 경원하기 시작한 것도 이 거품경제가 가져온 소비붐의 영향 때문이다. 결혼이나 주택을 구입하는 것보다 그야말로 귀족과 같은 호사스런 독신자생활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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