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아지는 유럽의 人種장벽
  • 진철수 유럽지국장 ()
  • 승인 1990.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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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여러 공산정권이 차례로 뒤집히자 사람들은 동·서유럽간의 왕래가 자유로워졌다고 기뻐했다. 자기 국민의 발을 꽁꽁 묶어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공산정권 시절의 제약이 사라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단기 관광이라면 몰라도 동유럽 사람들이 서유럽에 가서 일을 하겠다거나 또는 아주 이주하겠다고 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민족 대이동식으로 노동인구가 동유럽에서 몰려든다면 감당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 서유럽의 입장이다. 따라서 이민을 제한하기 위해 새로운 장벽을 쌓지 않을 수 없으며, 구체적으로 비자발급·이민규제에 관한 유럽공동체(EC)의 공동정책이 조만간 생겨야 될 형편이다.

 그 단적인 예로 영국정부가 헝가리인들에 대한 비자발급을 기피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민주화와 시장경제 도입정책이 진전을 보임에 따라 헝가리인들의 입국에는 비자를 요구하지 않기로 한 나라가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제국등으로 늘어났지만, 영국만은 여전히 비자를 요구할 뿐 아니라 까다로운 조건까지 붙이고 있다. 초청장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초청자가 부다페스트의 영국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어야 되며 비자발급 수수료로 2천3백포린트(미화 36달러)나 요구하고 있다.

 목적이 관광이든 상용이든 헝가리인의 영국방문을 되도록 힘들게 만드는 것은, 이들이 영국에 눌러 앉아 불법 취업이민이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예로는 동독에 있는 베트남 근로자들이 딱한 사정을 들 수 있다. 동독의 공산정권이 제3세계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려고 해외에서 초빙해온 근로자는 모두 10만명이 넘으며, 그중 베트남 모잠비크 앙골라 사람들의 수가 가장 많다. 돈벌이를 위해 5년 계약으로 동독에 온 이들은 중도에 모국에 돌아가봐야 취업이 힘든 형편이다. 동독에 남아 있자니 서독과의 경제통합 과정에서 실직자가 될 뿐 아니라 인종편견이 노골적으로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 견디기가 쉽지 않다.

 

노점상으로 변한 동독의 베트남 근로자들

 인종차별은 또한 폭행으로 번져 라이프치히에서는 최근 인종문제와 관련된 살인사건이 일어나 외국인 근로자 2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외국 근로자들의 숙소인 호텔을 극우분자들이 습격하려는 것을 경찰이 출동하여 막아준 사건도 생겼다. 동베를린에서도 폭한들이 호텔을 습격하여 외국인 근로자 20여명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이 있었다. 그동안 베트남 사람들은 주로 방직공장에서 일했으며, 아프리카인들은 농장일을 많이 거들어왔다. 요즘 동독의 기업들이 경영합리화를 위해 직원을 줄일 경우 해고 대상에 가장 먼저 오르는 것은 역시 외국인 취업자들이다. 기자가 최근 동독 포츠담시에 들렀을 때 한국에서 6·25때 흔히 보던 광경처럼 베트남 사람들이 담배 몇갑을 거리에 늘어놓고 앉아 노점상 노릇을 하고 있는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독일인들과 아프리카 흑인들의 피가 섞인 혼혈청년들은 비백인에 대한 폭력이 증가하는 추세에 대응하기 위한 인권단체를 라이프치히에서 조직했으나 이들은 자위책에 몰두할 뿐 아프리카계 근로자들의 이민문제에는 손이 못미치고 있다.

 서유럽의 인구통태를 보면 출산율이 낮아 인구가 점점 고령화하고 있으며, 특히 젊은 노동력이 부족하다. 간호원 웨이터 포장공청소원 건축공사 근로자로 일할 인력을 국내에서 구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상황에서 외국인력을 들여오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수요는 외면한 채, 외국인 고용이나 이민에 대한 내국인들의 반발이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종교와 문화배경이 판이한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계 이민들에 대한 반대는 날카롭다.

 

“이민은 유럽에 혜택 가져온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유럽의 정치인들이 이민의 물결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느냐하는 소극적인 발상에서 벗어나 이민은 활력, 창의성, 새로운 피와 젊음을 제공함으로써 혜택을 자져온다는 적극적인 발상을 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러나 EC의 이민정책이 같은 유럽인을 선호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은 뻔하다.

 서유럽이 대량으로 이민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이며 70년대에는 국내 정치의 압력으로 일시 뜸해졌으나 그래도 친척들이 선착이민들과 합류하는 형식으로 이민은 계속 진행되었다.

 현재 EC 12개국의 인구는 약 3억2천7백만명, 그중 1천2백만명은 이민 또는 이민의 후예들이다. 나라별로는 프랑스 4백50만명, 영국 2백50만명, 서독 1백80만명 등이다. 60년대의 이민 중 프랑스에는 알제리 사람들이 많이 왔으며, 영국에는 인도사람과 파키스탄 사람이 많이 갔다. 서독에는 초청 노동자로 터키와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이 많이 갔다.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북아프리카에서 오는 이민을 억제하려면 경제적인 매력을 덜 느끼도록 해야한다는 취지에서 북아프리카 나라들의 경제발전에 서유럽 국가들이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원조체제를 마련하자는 협의가 요즘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간에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EC를 통해 구체화되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우선 원조강화의 첫걸음은 내디딘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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