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지'불안한 연수생 노동자
  • 허광웅 기자 ()
  • 승인 1994.10.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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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우 등 현실 불만, 이탈 잦아…‘배치 앞서 충분한 교육 필요'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의 부흥산업사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노동자 로디 사이드씨(24)의 두툼한 입술은 ‘가을 추위'에 벌써 트고 있다. 1년 내내 열대성 기후에서만 지내던 그에게 한국의 가을 날씨는 꽤나 매섭다. 회사가 지급하는 털작업복을 일찌감치 꺼내 입었지만 앞으로 겨울을 날 생각을 하면 걱정이다.

 그는 지난 7월12일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주관하는 산업기술 연수생으로 한국에 왔다. 사진현상재와 화공약품을 생산하는 이 기업에는 인도네시아 기술 연수생 9명이 배치됐다. 이들은 3교대로 화공약품을 생산, 포장하는 공정에 투입돼 작업하고 있다.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잔업을 원하지만 회사 사정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현재 이들은 기본급으로 2백40달러(19만2천원)를 받고, 잔업이나 야근 수당을 따로 받는다. 모두 합치면 한달에 30만~32만원을 번다. 이 돈의 대부분을 집으로 송금하고, 한달에 4만원 정도만 용돈으로 쓴다. 이 회사 생산부 김강채 차장은, 아직 의사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단순 작업을 하고 있지만, 섬세함에서는 한국 사람을 앞선다고 말했다.

 사이드씨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로니 율리스티안토로씨(25)는 인도네시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반 공작기계의 제어 측정 일을 하다 한국으로 왔다. 그는 한국에서 연수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돈도 벌고 기술도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해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슬람교를 종교로 갖고 있지만, 지금 그가 경전처럼 갖고 다니는 책은 학생 때부터 쓰던 영어 사전이다. 손때 묻고 표지가 해진 그의 사전은 작업 지시를 받고 의사를 전달하는 데 더없이 긴요한 ‘장비??이다

불법 체류자보다 임금 훨씬 낮아
 중소기업의 인력난이 심해지자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정부가 외국 인력 수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동안 비공식의 그늘에 가려져 왔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미 우리 산업계에서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10만명에 이르는 외국이 불법 체류자들이 중소기업에 취업해 있다. 이들은 주로 한국인 노동자들이 작업을 기피하는 이른바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은 현실적 노동력으로 존재하지만 법과 제도가 인정하지 않는 이중적 상황을 겪어 왔다. 불법의 굴레를 쓰고 있다 보니 불리한 일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동안은 사업주가 임금을 주지 않거나 산업재해를 당하더라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추진중이 산업기술 연수생 인력 수입은 이같은 외국이 노동력의 필요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불법 취업자를 연수생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 문제가 됐던 외국인 노동자 불법 취업 문제를 해소하고 인력난을 덜어보자는 목적이다. 지난 1월  말 중소기업 관계자들이 연수생 배당 신청서를 받으려고 부리나케 중소기협중앙회에 모여든 것은 이들이 겪고 있는 인력난의 깊이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중소기협중앙회는 올해 동남아에서 2만명을 데려오기로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5월31일 네팔에서 33명이 들어온 이래, 9월말 현재 1만6천4백58명이 ‘코리안 드림??을 안고 입국해 4천1백여 사업장에 취업했다. 이들은 네팔 미얀마 방글라데시 베트남 중국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필리핀 파키스탄 등 아홉 국가에서 현지 모집되어 한국으로 들어왔다. 중국인이 전체의 44%로 가장 많은데, 그 중 조선족 교포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중소기협중앙회는 올해 계획된 2만명말고도 또 만여 명을 추가로 데려다 신발과 섬유 업종에 집중 배치할 예정이다.

 연수생으로 들어온 외국이 노동자들이 산업 현장에서 큰 몫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모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것은 아니다. 중소기협중앙회에 따르면, 사업장에 배치된 연수생 중에서 이미 2백~3백명이 작업장을 벗어나 잠적했다. 이들이 정해진 회사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낮은 임금이다. 현재 연수생들은 나라에서 기본급으로 2백10~2백50달러를 받고, 잔업이나 야간 작업을 할 경우 그에 따른 수당을 받는다. 그러나 이 임금은 불법체류자가 받는 월급의 절반 또는 3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연수생들은 한국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면, 저임금인 공식 신분을 포기하고 고임금인 비공식 신분을 호시탐탐 노리게 된다.

 이들의 임금이 불법 체류자들보다 훨씬 싼 것은 연수생 신분이라는 명목 때문이다. 노동력은 제공하지만 기술은 배워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이들은 대부분 일선 작업 라인에서 한국 노동자와 다름없이 일하고 있다. 동남아 국가에서 연수생들을 데려오는 한 인력 송출업체 사장은 이렇게 지적한다. “말이 좋아 연수생이지, 솔직히 말해 인력이 달려서 일 시키려고 데려오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최저임금 정도는 주고 양질의 노동력을 확보하도록 해야지, 무조건 싸게 부릴려고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잠적 소동은 중국에서 온 연수생들이 특히 심하다. 중국의 경우 현지에서 연수생들을 모집할 때 각 지방정부 사무소 몇 단계를 거치면서 커니션을 떼기 때문에, 연수생들은 ‘투자비??를 건지기 위해서도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형편이다. 한국에 오기 위해 5백만원 가까운 돈을 들인 사례도 있다. 연수생 신분으로 이 돈을 벌충하려면 1년을 꼬박 모아야 하는데, 이들이 한국에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은 1년이다(1년이 지난 후에 1년 더 연장할 수 있다).

 각국 송출업체들이 현지에서 연수생들을 모집할 때 ‘기술 연수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까닭에 실제 작업장에서 단순 노동을 하게 된 연수생들이 실망한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덕성프라스틱공업사는 9월1일 파키스탄 연수생 5명을 데려왔다. 회사 관계자들은 이들 연수생에 대한 불만이 대단했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문제만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 회사 임현구 부장은 이번에 외국이 연수생을 데려온 것은 완전히 실패라고 잘라 말하며, 이제 한달밖에 안돼는데, 앞으로 1년 동안 어떻게 데리고 있을지 암담하다고 말했다. 생활 습관도 다르고 종교(이슬람교)도 특이해서 한달 남짓에 동료 한국인들과 마찰을 자주 빚었다는 것이다. 임부장은 연수생들을 기업에 배치하기 전에 사전교육을 충분히 했어야 하는데, 아무리 인력이 달리더라도 무작정 모집해와 배당만 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고 비관했다.

산업재해 보험 대상서도 제외
 이 회사 작업장에서 일하는 파키스탄 연수생들도 나름대로 불만이 있다. 아크바르 라자씨(23)는 “우리는 한국에 오면 필요한 고급 기술을 배울 수 있을 줄 알았다. 한국행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연수생(trainee)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돈 버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의 동료들은 서투른 영어로 ??위 원트 투 런(We want to learn)을 연발했다. 아크바르씨는 파키스탄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다른 사람들도 각종 기술 자격증을 갖고 있다.

 이들이 연수생이기 때문에 받은 불이익은 또 있다.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도 적용받는 산업재해 보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이 또한 이들이 정식 사원이 아니라는 명목 때문이다. 중소기협중앙회는 이같은 불합리를 보완하기 위해 연수생을 작업시키는 사업체는 이들을 상해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시키도록 하고 있다.그러나 우리가 필요해 데려오면서도 제도적 뒷받침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면하기 어렵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외국인노동자상담소 백월현씨는, 외국 노동자에 관한 한 한국의 졸부의 면모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연수생들에게 정당한 노동 대가를 지불하고 인간적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면, 이들 역시 먼저 와 있던 선배 외국이 노동자의 불법 체류 신세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지적이다.

許匡畯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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