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 선거 ‘시민후보’들이 뛴다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4.10.2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성 정치인에 지역 맡길 수 없다” 새 실험 도전/환경단체 등 연대 모임 만들어 활발한 준비

한국 정치사에서 보수 정당 구조에 도전장을 던졌던 혁신계열이 무참하게 뿌리뽑힌 이래, 새로운 세력이 정치권에 진입하려는 모든 시도는 허사로 끝났다. 가깝게는 91년 지방의회 선거에서 시민단체 지도자들이 ‘참여와 자치를 우한 시민연대회의’를 조직해서, 이른바 시민 후보를 발굴하여 출마시켰지만 완패하고 말았다. 또한 92년 총선에서는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한 민중당 후보들이 모두 낙선했다. 제도권 정치의 장벽이 얼마나 높고 견고한지를 여지없이 보여준 사례이다.

환경 분야에서 정치권과 첫 격돌 예상
  과연 한국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할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중앙 정치 무대에서는 적어도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이미 민중당 출신들은 기존 정치권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지방, 더 정확히 지방 정치 무대로 내려가면 다르다. 지금 시민운동 단체들은 내년 6월 지방자치 동시 선거를 통해 다시 한번 기성 정치권에 도전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시민운동단체들이 지방자치 선거에 주목하는 까닭은 한마디로 ‘시민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무대가 곧 지역’이라는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다. 중앙 정치와는 달리 주민 자치 또는 시민 참여를 본질로 하는 지자제를 외면하고서는 시민운동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다.

  더구나 91년 지방의회 선거 이후 3년 간의 지방자치 경험을 통해, 이들은 이른바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은 고사하고 오히려 지역 유지들이 활개치며 더욱 기승을 부리는 현상을 곳곳에서 목격해 왔다. 그러니까 지난 3년은 지역 행정을 기성 정치구조 아래에 두어서는 시민운동이 근거지를 잃는다는 것을 체험으로 깨달은 기간이었다. 즉 시민운동 단체들에게 내년 6월 지방자치 선거는, 새로운 집단을 지역 정치에 접목시켜야 하는 중요한 ‘정치적 실험’인 셈이다. 일단 시민운동과 정치권이 부딪치는 첫 번째 각축장은 환경 분야가 될 듯하다.

  현재 시민운동 단체 중에서 가장 먼저 내년 지방자치 선거에 ‘직접’ 참여하기로 결정한 곳은 환경운동연합(사무총장 최 열)이다. 환경운동연합은 조직 역량을 총동원하고 다른 시민운동 단체와 연대해서 내년 선거를 ‘녹색 선거’로 몰고 가겠다는 각오이다. 내부적으로는 이미 대략의 선거 전략을 세웠고, 곧 조직 정비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환경 문제가 가장 큰 정치 쟁점이 될 것이 뻔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하다 못해 지역 유지 행세를 하는 건설업자까지 환경 문제를 들고 나올 것이다. 지난번 선거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우리가 직접 후보를 발굴하고 지원할 것이기 때문에 누가 진짜 녹색 후보인지 확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승산이 있다.” 최 열 사무총장의 말이다.

  환경운동연합은 현재 서울을 비롯한 5개 이상 지역에서 독자 후보를 출마시킬 계획이다. 특히 직접 발굴한 환경 후보를 내보내는 지역에서는 광역단체장 · 광역의회 · 기초단체장 · 기초의회 후보를 러닝메이트 식으로 묶어서 ‘환경 후보 보따리’를 유권자에게 선보이겠다는 방침이다. 최 열 사무총장은 “유권자에게 환경 행정의 필요성을 전파하는데는 그런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다. 적어도 2~3개 지역에서는 광역 단체장에 녹색 후보를 당선시킬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이 단체는 당선 지역을 4년 동안 모범적인 환경 자치단체로 만듦으로써 그 다음 지방자치 선거까지 대비하겠다고 한다.

  관건은 선거 기술자를 거느리고 있는 정당 추천 후보자를 물리칠 인물에 달려 있다. 그래서 ‘입후보 희망자를 배제하고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을 발굴한다’는 나름의 원칙을 세워 놓았다. 인물 발굴의 우선 순위는 당선 가능성이다. 예를 들어 환경운동연합은 현재 환경단체가 지원하는 서울시장 후보로 이세중 대한변협 회장을 추대하는 방아능ㄹ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다.

  환경운동연합뿐만이 아니다. 이 단체를 포함해서 환경단체는 물론 환경운동 관련 인사들도 사실상 내년 선거를 겨냥하는 모임을 최근 들어 활발하게 가동하고 있다. 김지하 시인, 환경운동연합 최 열 사무총장, 배달녹색연합 장 원 교수, 유정길 불교환경연구원 사무국장, 강대인 크리스탄아카데미 기획실장, 김성수 한국 YMCA 전국연맹 부장, 문순홍 생태사회연구소장 등이 참여하는 ‘환경 · 자치 · 새문화를 위한 모임’이 내년 지방자치 선거에서 환경 문제를 정치 쟁점화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현재 이 조직의 구심점은 김지하 시인이다. 오래 전부터 생명운동에 천착해온 김지하 시인이, 내년 지방자치 선거가 녹색 선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관점은 매우 문화적이고 철학적이다. 그는 “생명운동은 자치운동이고 여성운동이며 환경운동이다. 주민의 생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삶을 개혁하지않고서는 지존파나 인천 북구청 세금 포탈이 또 생겨난다. 비대한 중앙 정부는 이런 윤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결국 주민의 상시적인 감시가 가능한 작은 정부, 작은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장기적인 자치운동으로 가기 위해서 내년 선거는 단기적으로 매우 중요한 빌미이다”라고 말한다.

경실련 · YMCA 등은 공명선거 주력
  그래서 그는 내년 선거에서 정책 대안을 모색하고, 후보들의 환경 공약을 유도하며, 감시와 설득을 통한 자치운동을 넓혀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군사 독재 시절 장외 정치의 한 축에서 정치 · 문화 전선을 만들고 이끌던 김지하 시인이, 오랜 모색 끝에 지장자치 선거를 계기로 본격적인 사회 활동을 재개했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에 쏠린 관심이 크다.

  그러나 ‘환경 · 지방자치 · 새문화 모임’은 지방자치 선거에서 소속 시민단체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는 기능을 맡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모임의 논의 구조나 소속 시민단체의 구성상 지방자치 선거에 참여하는 시민운동 단체에게 ‘제한적인 지원’을 보내는 후견인 노릇에 그칠 공산이 크다. 설사 독자 후보를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전력투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지느냐’에 소기의 목적을 둘 가능성이 높다. 즉 시민운동을 통한 주민 자치 실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리는 데 더 힘을 쏟고 있다.

  내년 선거에서 환경단체들이 적극 참여 쪽으로 가닥을 잡아나가고 있다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사무총장 서경석)이나 한국YMCA연맹(사무총장 강문규) 등은 정책 연대나 공명선거 활동 쪽으로 의견을 정리하고 있다.

  경실련의 경우 내부에서 후보를 골라 출마시키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후보 추천이나 지지 활동은 하지 않기로 사실상 결정했다. 서경석 사무총장은 “이번 지방자치 선거에서는 기초의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거에 정당추천제가 도입되어 무소속 시민 후보가 설 자리가 더욱 좁아졌다. 직접 후보를 내기보다는 공명선거나 정책 캠페인을 통해 시민이 주장하는 정책을 수용하는 후보가 유리하도록 간접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경실련이 이러한 자세를 취하는 배경에는 정당 추천만 허용하는 현행 지방자치선거법도 작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칫하면 정치에 휘말려 조직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경실련은 가뜩이나 세간에서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는 처지이다. 그러나 경실련의 진짜 고민은 회원 중 상당수가 개인적으로 선거 출마 의사를 밝히고 있으며, 그들 중에 경력을 과대포장하는 사례가 나오리라는 데 있다. 91년 지방의회 선거에서는 경실련 간판을 도용한 사례도 속출했었다. 그렇다고 옥석을 구분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행위가 곧 후보 추천 또는 지지활동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내년 선거에서는 YMCA도 경실련 수준을 넘지는 않을 전망이다. 현재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는 한국YMCA연맹에 사무국을 두고 있으며, YMCA를 통해서 선거부정 고발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강문규 사무총장은 “시민단체의 지방자치 참여가 제도적으로 막혀 있는 상황에서 우선 힘을 쏟아야 할 문제는 비민주적인 선거법을 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서울 · 경기 지역에서 후보를 내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특히 지역 조직에서 활동하는 사람 중에 개인적으로 출마를 고려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강총장은 최근 시민운동 지도자들과의 대담에서 “상징적으로 시민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서울 지역에 시민후보를 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었다.


  한편 여성운동 쪽에서는 지방자치 선거에 매우 적극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여성의 정치권 진입이 터무니없이 낮기 때문이다. ‘세상의 반쪽’ 걸맞는 대우는 고사하고, 현재 여성 정치인은 국회에 고작 4명이고 지방의회에서는 그보다 못미치는 0.9%이다. 그래서 한국여성단체연합(공동대표 이미경)은 내년 선거에서 여성 참여율을 20%로 끌어올리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미경 대표는 이를 위해 기성 정당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여성 후보의 발굴과 지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단체들은 이미 ‘할당제 도입을 위한 여성연대’를 발족시켰고, ‘20% 지방의회 여성 참여 후원회’(회장 이세중)도 만들었다.

  선거를 앞두고 시민운동 진영의 움직임이 이처럼 활발하지만, 장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현행 선거법에서는 무소속 입후보자에 대한 사회단체의 지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 진영은 점차 지방자치 선거에 깊숙이 빨려들어가고 있다. 내년 선거가 앞으로 시민운동 행로에 중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정치적 실험은 성공할 것인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