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챙긴 회담 성사“꽃다발”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1.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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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화해 명분 아래 ‘총선 전략 깜짝쇼' 지적도…“남북한, 권력 보수화할 듯”

 남북 두 정치지도자의 결단.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두 지도자는 언제, 어디서 역사적인 만남을 가질 것인가.

 남북 고위급 회담이 “분단 후 처음 성사된 법적 효력을 갖는 합의”를 이끌어낸 이후 정가와 국민의 관심은 남북정상회담에 쏠리고 있다. 이번 합의서 채택이 분단대결 체제에서 화해체제로 옮겨가는 남북 정상의 정치적 결단을 의미하는 만큼 남북정상회담은 당연한 수순이기 때문이다.

 물론 합의서 채택의 배경에는 전세계적인 냉전체제 와해와 신동북아질서의 필요성, 북한의 경제 위기 등 남북 고위급 회담의 합의를 강요한 여러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두 정상의 결심이 가장 결정적 요소였다는 사실은 남북 대표단의 협상과정을 되짚어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11일 밤 남북한 실무대표 접촉이 양쪽의 의견 차이만을 확인한 채 끝날 때까지만 해도 취재진들 사이에는 “혹시나 했더니 역시 불발로 그치는 게 아니냐”하는 실망스런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이날 밤 늦게 남쪽 金宗輝 외교안보보좌관은 노대통령으로부터, 비슷한 시각에 북쪽 崔逢春 책임연락관은 평양으로부터 ‘고위층의 의중과 대안’을 전달받음으로써 상황은 급진전됐다. 최연락관은 평양과의 마지막 교신에서 “꽃다발을 받아라”라는 메시지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99%는 됐는데 마지막 1%가 문제”(정원식 총리의 발언)라는 협상에서 그 1%가 남북 정상의 결심에 의해 이뤄진 셈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때부터 정상회담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남북 정상이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정상회담의 조기실현을 위해 합의서 체결을 서둘렀다는 풀이였다. 李基鐸 교수(연세대ㆍ국제정치학)도 “합의서 채택 과정에서 남북이 정상회담을 이뤄내기 위해 서두른 흔적이 있다”면서 “앞으로의 실천 과정에 적지 않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중요 문제를 어물쩍 넘기는 편법적 요소가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예정된 수순’
 정상회담이 ‘회담 타결에 따른 순차적 수순’이 아닌 ‘예정된 수순’임을 짐작케 한 대목이 또 있다. 6공 초기 북방외교를 주도했던 朴哲彦 체육청소년부 장관은 북한측 대표단이 서울에 도착한 10일 밤 만찬에서 최봉춘 책임연락관과 단둘이 만나 10분간 밀담을 나눠 눈길을 끌었다. 정가에서는 박ㆍ최 밀담에서 이미 고위급회담 타결 전망과 함께 남북간에 정상회담 카드가 거론됐을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했다. 실제로 박장관은 대표단이 돌아간 후인 13일 오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사실은 북한측 고위연락관과 만난 자리에서 합의서 채택ㆍ남북정상회담ㆍ남북한체육회담 등 일련의 상황이 잘 풀릴 것이라는 귀띔을 받았다”면서 “정상회담의 실현을 확신한다”라고 단언, 그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가 일각에서는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최근 방북에는 경제위기에 처한 북한의 손짓만이 아닌, 정상회담 의사를 전달하려는 남한측의 주문이 있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끈질기게 나오고 있다.

 이렇듯 정치권에서는 ‘정상회담의 조기실현’을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시기문제에 대해서는 관측이 다소 엇갈린다. 2월설과 3월설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부시 미대통령과 미야쟈와 일본 총리의 방한ㆍ여당의 공천자 확정ㆍ5차 회담 합의사항이 발효될 6차 고위급 회담(2월18일) 등 일련의 일정을 감안해야 한다. 또 14대 총선이 임박한 시점일수록 정치 효과의 극대화를 꾀할 수 있는 점을 감안하면 3월 초순 내지 중순경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민주계와 박철언 진영의 표정, 대조적
 6공화국 북방정책의 마지막 골인점으로 여겨져온 ‘남북 카드’의 실현은 정치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여권 핵심부가 야권이 우려하는 ‘정치적 이용’을 하든 안하든 그 영향은 매우 크고 광범위하리라는 게 정가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우선 정상회담이 총선에서 집권여당인 민자당을 상당히 도와줄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민자당은 이번 총선에서 남북을 대결체제에서 화해체제로 이끈 집권여당의 역할을 부각시키며 계속적인 지지를 호소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대부분의 정세 분석가들은 남북 카드가 서울ㆍ중부권의 ‘浮動하는 중산층’과 1천만 이산가족의 표를 상당히 흡수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반면 야권은 ‘여권의 프리미엄’을 우려하면서도 그 파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민주당의 한 고위당직자는 “남북화해국면을 환영하는 것과 여권을 향한 지지와는 별개 문제다. 국민들은 외교를 내정에 이용하는 깜짝쇼에 식상해 있다. 그 효과는 생각만큼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정상회담은 여권 내 각 계파의 역학구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선 여권 내의 가장 큰 갈등요소인 민주계의 ‘총선 전 대권후보 확정’ 주장이 설득력과 명분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남북 고위급회담이 타결되자마자 정가에서 터져나온 최초의 반응은 “이제 민주계의 대권 논의는 물건너 갔다”는 것이었다.

 분단 이후 민족의 숙원이던 남북 관계의 중대한 진전 앞에서 총선 전 대권 주자 확정과 탈당 불사를 외치는 정치 행위는 민정ㆍ공화계로부터 이기적인 동시에 반민족적인 행위라고까지 공격받을 수 있다. “이제 민자당은 물론 사회 각계 각층이 정상회담의 실현을 위해 다각도로 힘을 모아야 한다”는 박철언 장관의 발언도 일면 민주계를 겨냥한 발언으로 풀이할 수 있다.

 민주계는 이와 관련, 남북 관계의 진전을 대폭 환영하면서도 남북 카드가 대권 방향을 좌우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민주계 金德龍 의원도 “정상회담이 대권방향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못박고 “예측 가능한 정치일정을 제시하자는 민주계의 총선 전 후보 확정 요구는 변함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단 남북 무드에 발이 묶이면 민주계가 예상했던 ‘1월 중순 정치 대공세’ 전략은 어느 정도 궤도수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상회담 자체가 YS의 대권 배제라는 일련의 정치전략 아래 추진되고 있다는 추측까지 나오고 있다. 최근 민자당에 나돌았던 한 괴문서는 “김영삼 대표가 대권주자에서 배제되는 시나리오”를 상정, 그 첫단계로 고위급 회담 합의서 타결을 설정해 눈길을 끌었다.

남북화해 계기로 ‘내각제’ 머리 들 수도
 더 나아가 정상회담이 한국 정계의 대대적인 개편, 권력구조 자체의 변화를 낳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정치평론가 金光植씨(한신대 강사ㆍ정치학)는 “세계정세는 냉전종식과 함께 내부 권력이 보수화되는 추세다. 남북 두 정상간 대화가 진전돼도 내부적으로는 자체 내 권력의 보수화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제하고 “남북 관계의 대변화가 한국 정계의 보수적 개편을 도모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민주당 趙淳昇 의원도 ”남북간의 역사적인 7ㆍ4 공동성명 이후 남한은 유신헌법을, 북한은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해 오히려 내부 권력을 강화했다“면서 ”정상회담을 환영하면서도 야권은 일말의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내각제 가능성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내각제 주장의 중요한 논리적 근거가 “남북통일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남한 내의 동서화합”이었던 만큼, 남북화해 국면에서 내각제가 다시 시도될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민주당 ㅇ의원은 “1월중 여권이 변형된 형태로라도 일단 내각제를 시도할 것이라는 방증이 여러 군데에서 감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표가 워낙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만큼, 내각제 개헌이 결코 쉽지 않다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다만 청와대를 비롯, 여권 핵심부에서 이를 시도할 가능성은 일단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남북 정상이 분단 이후 최초로 무릎을 맞대는 ‘최대의 사건’. 그 전후에 벌어질 한국 정치판도의 변화는 아직 그 명확한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 다만 새로이 조성되는 화해체제가 통일로 나아가는,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하고 정치권과 국민의 창조적 에너지가 그쪽으로 모아져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행여 정치권 일각의 우려대로 정치적으로 악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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