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물살’에 김영삼 배수진
  • 김재일 정치부 차장 ()
  • 승인 1992.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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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서 채택”에 아찔 … 분당 뒤 김대중과 연대 가능성도

민자당 대통령후보 결정과 관련한 김영삼 대표 진영의 공세가 임박했다.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라 원래의 계획을 앞당겨 조기 승부수를 던지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민자당 내 긴장의 파고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김대표의 한 측근은 “1월 문제 제기는 너무 늦다. 시간을 끌면 김영삼 대표는 백전백패다”라고 말하고 12월중 후보 문제가 제기돼 1월초에는 어떤 형태로든 본격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 12월20일 청와대 주례회동에서 김대표는 탈당자의 명단까지 가지고 들어가 노대통령과 담판하려 했으나 노대통령의 선제공격으로 말도 못 꺼내고 돌아왔다는 소문이 정치권에 나돌고 있다. 노대통령은 <연합통신> 창사 11주년 특별회견에서 “대통령후보 조기 거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바 있다. 김대표측은 아직까지 노대통령의 ‘연내 정치일정 논의 중지’ 지시를 철저하게 지키는 입장이었다. 민주계 이원종 당 부대변인의 입을 통해 종전에 밝혔던 김대표측의 후보문제 제기 시점은 부시 미국대통령과 미야자와 일본총리의 방한(각각 1월5일, 16일)이 끝나는 1월 중순 이후였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른 제반 정치 상황의 변화는 민주계를 그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수 없게 만들었다. 남북 관계의 진전이 가속화할 경우 후보 결정에 관한 문제를 제기도 못해보고 거센 물살에 휩쓸려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측근은 우선 김대표가 12월중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총선 전 후보 결정을 정면으로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계 의원들은 “노대통령이 임기 1년 전(2월)쯤 전당대회에서 후보가 선출될 것”이라고 수차례 공언했으니 총선 전에 전당대회를 열어 김대표를 후보로 선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의원들이 개인적으로는 전당대회 이외의 방법, 즉 대통령의 기자회견이나 의원 총회 · 당무회의 등을 통한 대국민 후보 명시 방법에 동의하고 있어 우선 1월 중순경에 있을 노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에서 ‘김대표=대통령후보’의 공표를 민주계가 겨냥할 것으로 보인다.

고위급 회담에서의 남북합의는 민주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김대표의 대권가도를 가로막을 수 있는 돌발변수로 파악한 것이다.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부분의 민주계 의원들이 겉으로는 짐짓 태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불안한 표정이 역력하다. 지난 12일 ‘남북합의서 채택 확실’의 보도를 접하는 순간 “YS 대권은 이젠 끝났다”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는 한 김대표 측근의 말은 민주계의 위기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어진 ‘핵 부재’ 선언에 민주계 긴장
김대표측은 자리잡아가고 있던 ‘대세론’이 남북 물살에 떠밀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남북 양측이 합의서에 서명한 다음날인 14일 경남고 동창회 송년모임에 참석한 김대표는 “남북 합의가 3당합당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룩했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강조했다. 민주계 ㅅ의원은 “권력의 얼굴에 분을 발라 독재의 인상을 희석시키고 국내 정치를 안정시킨 것이 누구의 공로인가”라고 반문하며 남북관계 진전의 큰 몫이 김대표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북합의서 발표와 함께 아연 긴장했던 민주계는 “정상회담에 정신을 빼앗겨 핵문제를 다루는 데 소홀했다”고 미국측이 불만스러워 했다는 보도가 있었고 남북문제를 국내정치에 이용할지 모른다는 여론의 의구심이 높아가자 다소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지난 18일 노대통령의 ‘핵 부재’ 선언은 다시금 민주계를 바짝 긴장시켰다. 특히 노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빨리 이뤄질 것”이라고 언급한 대목에 주목하고 있다. 원래 예상했던 시기가 고위급 회담 때 보도된 대로 2월이 될지 3월이 될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사실 김대표 진영은 기습적인 정상회담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오직 대통령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카드로서 그가 숨기려들면 그 시기와 방법 등을 다른 사람이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핵 부재 선언을 전후해 “정상회담이 1월말까지 성사되도록 적극적인 협의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최근 북한을 방문한 솔라즈 미하원의원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1월말에 열자는 메시지를 북측에 전달했고 북한은 그 요청을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1월말까지 핵안전협정의 서명 의사를 밝힐 것”이라는 보도들이 있었다. 이런 보도는 김대표 진영을 압박하고 있다. 상황의 진전에 따라서는 남북 정상이 1월말경 만나 핵문제해결안에 서명하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될 수도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정부측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국내정치를 강타 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김대표 배제 시나리오 진행’ 소문 파다
그렇게 되면 김대표측은 공세는커녕 후보 문제를 제대로 제기조차 못한 상태에서 총선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총선 전에 김대표가 후보의 입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총선 후에는 ‘용도폐기’된다는 것이 민주계의 공통된 인식이다. 민주계의 ㄱ의원은 “정상회담 날짜가 1월말로 잡혀지고 사전준비를 위해 사람을 북한에 보내기라도 하는 날에는 상황이 끝나버린다”고 말한다. 김대표는 후보문제를 논의할틈을 찾을 수 없고 따라서 대통령자리에서 멀찌감치 밀쳐져버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부 민주계 의원들은 남북문제가 김대표를 후보에서 배제시키는 전제 하에 추진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김대표를 후보에서 배제하려는 목적으로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김대표 배제 시나리오에 대한 검토가 끝났다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은 벌써부터 있었다. 최근에는 이 소문을 뒷받침하듯 민정계의 한 증진의원이 12월초 청와대에 불려들어가 김대표가 탈당할 경우 김종필 최고위원이 당을 관리하면서 총선을 치른다는 말을 들었다는 또다른 소문도 그럴 듯하게 들린다. 남북합의를 시발로 김대표 배제 시나리오가 이미 진행중에 있다는 것이다.

민주계에 맞서 총선 전에 후보 결정을 막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민정 · 공화계는 확실히 느긋해진 표정이다. 특히 박철언의원 진영은 매우 고무된 분위기다. 박의원 진영의 한 관계자는 “박의원은 일찍부터 소련에서 옐친의 중요성을 강조해왔고, 그 동안 공을 들여온 중국과의 수교도 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고 박의원의 위상이 더욱 강화 될 것으로 내다봤다. 또 그는 앞으로 정치권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기대섞인 전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덕룡 의원을 비롯한 민주계 의원들은 “남북문제와 국내정치 일정은 전혀 별개의 것”임을 강조한다. “정상회담이 열려 봤자 2~3일 아니겠느냐”면서 두 문제를 철저히 분리시켜 총선 전 후보 결정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김대표의 한 측근은 김대표가 후보문제를 놓고 노대통령을 상대로 정면에서 결판을 내려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생일대의 막판 승부수를 던질 것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이 힘겨루기에 돌입하면 여론은 김대표의 편이 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문제는 공격의 시점이 주어질 것인가이다. 그는 여권 핵심부가 대통령후보 문제를 따지는 것은 국민을 식상하게 만들어 아예 분위기조차 조성하지 않으려는 전략으로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비해 김대표 진영은 적절한 공격의 시기를 포착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잘못했다가는 헛다리를 걸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돼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문제가 표면화되는 시점은 부시 대통령의 방한이 끝난 직후인 1월초가 될 수밖에 없다.

노대통령의 의중을 타진해 후보 확보가 여의치 않다고 판단되는 경우 김대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우선 그대로 민자당에 남아 여론의 동향과 역학관계를 살피면서 총선 후를 기약하는 길이 있다. 그러나 김대표의 정치형태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대표가 노대통령의 소신인 내각제를 받아들이는 방법도 가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김대표의 내각제 선회는 명분도 없을뿐더러 그가 내각제를 수용한다해도 개헌의 실현을 장담할 수 없다. 설령 여당이 개헌선을 확보했다손 치더라도 야당을 포함, 결집된 내각제 반대세력의 커다란 저항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 역시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 민주계 의원의 중론이다.

후보 확보가 좌절됐을 때 가장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김대표가 민주계 의원들과 함께 당을 떠나는 것이다. ㅅ의원은 총선 전 후보 결정이 안될 경우 김대표가 “역사의 획을 긋는” 중대한 결심을 할 것이라는 말로 탈당을 강력하게 암시했다. 분당 전단계에서 김대표는 사회에 충격을 주고 여론을 업기 위해 스스로 대표직을 사퇴할 수 있다. 김대표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간에 그것은 필연적인 순서라는 것이다. 그는 분당의 수순을 밟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결정이 내려진 후 행동을 통일해 당을 깨고 나오는 데는 4~5일이면 충분하다.” 모든 상황은 1월중에 깨끗이 마무리된다는 것이다. 분당을 결행할 경우 민주계가 노리는 것은 민자당에 가능한 한 큰 타격을 주는 것이다. 분당은 남북문제와 상관없이 여전히 파괴력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3당합당 후 민주계의 최대 무기인 분당의 파괴력은 야당통합으로 더욱 강해졌다가 ‘남북한 정국’에서 다소 약해졌으나 무력화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남북문제, 후계구도에 영향 못 준다”
분당 후 김대표의 진로는 무엇일까.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독자적으로 당을 만들어 총선에 대비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명분상으로 볼 때, 또 민자당에 타격을 주는 방법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가장 그럴 듯한 가정은 당을 깨고 나와 민주당과 손잡는 길이다. ㄱ의원은 흔쾌히 민주당과 제휴, 총선에서 다시금 여소야대의 정국을 만들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한다. 온힘을 기울여 지자제선거까지 치른 다음 대통령선거 때는 자연스럽게 민주당 김대중 대표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이것은 여당에게는 최악의 경우다.

민자당 분당은 김대중 민주당 대표가 가장 바라고 있는 상황이다. 한 민주계 의원은 김대중 대표가 한동안 김영삼 대표를 공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한다. 김대중 대표가 민자당의 분당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김대중 대표는 민주당의 조기 공천을 주장하는 이기택 대표의 요구에 대해 “민자당의 사정이 복잡한 것 같으니 좀더 기다리자”며 제동을 건 바 있다. 김대중 대표가 김영삼 대표의 민자당 탈당을 예상해 그와 같은 말을 했다고 짐작해볼 수도 있다. 김대중 대표의 한 측근은 “김영삼 대표가 분당 안하는 것보다는 분당하는 쪽의 가능성이 아직도 훨씬 높다”고 말한다. 그는 김영삼 대표가 “남북문제를 빌미로 한 정부의 내각제 개헌 기도”를 명분으로 삼아 민자당을 깨고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김영삼 대표가 분당이라는 외통수를 둘 때 여권의 수뇌부는 여러 가지 경우를 상정, 정권 재창출의 가능성을 타진할 것이다. 그 결과에 따라 김대표의 공세에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가 후계구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지금은 요란한 남북합의가 그전에 그랬던 것처럼 변죽만 울릴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않은 것이다. 신민주계로 분류되는 한 증진의원은 “남북 이슈 자체가 결국 냉각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두고 보면 남북문제가 정치일정이나 후계구도에 영향을 줄 카드가 되지 못 할 것이다. 더욱이 내각제 개헌이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남북문제가 부각될수록 국내정치는 안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북관계 진전이라는 돌발변수의 등장으로 김대표 진영이 위축된 것은 사실이나 현재까지는 김대표가 여전히 여권의 대통령후보로 가장 유력한 선두주자임에 틀림없다. 그 선두의 자리는 남북관계의 진전 양상과 여론의 동향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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