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정상회담에만 급급한가
  • 안병영 (연세대 교수. 행정학) ()
  • 승인 1992.01.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상회담의 성과는 오랜 실무 접촉과 상호 교감의 결과이지 만남 자체의 산물이 아니다.

지난 13일 남북한이 서명한 합의서는 그것이 함축한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에서 적지 않은 우려와 논란을 낳고 있다. 무엇보다 합의서에 핵문제가 빠진 데다 이산가족문제가 뒷전으로 밀린 데 대한 의구와 불만, 정상회담의 조기 성사를 위한 정부의 과도한 집착에 이의가 제기되었다. 또 정부의 이러한 통일정국주도가 내정주도의 변화 내지 차기정권창출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 등이 대체로 그 내용들이다. 이러한 문제제기의 저변에는 남북한 당국자들에 대한 불신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핵문제가 유보된 데 대해서는 국내보다 오히려 미 · 일 등 국외언론의 비판이 세차다. 북한의 핵문제는 이제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평화와 직결되는 범세계적인 문제이며, 핵안전협정 서명이나 핵사찰 차원을 넘어 핵연료재처리시설의 폐기를 강행해야하는 현시점에서, 이를 도외시한 채 선언적 내용의 합의만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북한은 이제 국제합력으로부터 시간벌기를 하며 남북한 긴장완화를 구실로 대일 수교회담을 진전시킬 게 뻔하다는 얘기다. 이러한 비판은 오랫동안 국제사회에서 禁治産者로 치부되어 온 북한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으로부터 연원한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인즉, 핵문제는 내부적으로 북한과 상당한 교감을 이루어 왔으며, 12월의‘핵회담’에서 큰 진전을 볼 것이므로 낙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국제사회로부터 가열되는 집단적 압력과 우리 정부의 핵부재 선언으로 북한의 핵카드는 이미 빛을 잃었다는 게 우리 측 주장인 듯하다.

핵과 이산가족 문제 우선하라
이산가족 교류문제는 합의서 18조에 문면상 원칙은 명시되었으나 그 구체적 실천을 위한 장치와 방안은 충분히 마련되지 못한 감이 있다. 이는 이른바‘3通’중 북한의 절실한 요구사항인 통상부문의 실천을 위한 분과위원회가 설치된 것과 대조를 이룬다. 분단고통의 원초적 아픔을 해소하는 문제가 남북대화의 첫 번째 의제여야 한다는 당위성이 다시 차가운 현실에 밀렸다.

우리 정부가 정상회담에 집착하는 정도는 한마디로 너무 심하다. 그것이 가지는 엄청난 정치적 상징성과 이를 통한 본질적 문제에의 접근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마치 정상회담이 만병통치인양 神話化하는 데는 식상할 정도다. 남북관계개선(합의서)을 핵문제와 연계시키지 않고 서두른 것도 많은 이의 눈에는 하루빨리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을 닦으려는 계산된 의도라고 비친다. 국제 고립과 경제 파탄으로 최악의 궁지에 몰린 김일성을 그토록 애타게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계사에 기록된 정상회담의 성과는 장막 안팎에서 진행된 오랜 실무접촉과 교감의 가시적 결과일 뿐, 정상들의 만남 자체가 창출한 극적 산물이 아니다.

남북문제에 관한 국민의 균형감각 알아야
최근 이른바‘합의서 정국’으로 정가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20년 전 7 · 4공동성명 뒤 유신체제가 들어선 악몽까지 상기하는 듯하다. 남북관계에 대한 최근의 가시적 성과가 내년에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져‘통일정국’이 조성되면 정부가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거머쥐고 자칫 내각책임제와 같은 내정구도의 큰 변개를 시도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우려하는 쪽의 얘기다. 한마디로 정권의 국내정치적 목적이 최근 남북관계의 큰 흐름을 움직여 왔다는 것이다. 정권이익의 차원에서 남북문제를 농단해온 지난 역사가 이러한 불신을 더욱 부추기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정부는 남북관계의 顯示的 성과를 과신하지 말아야 하며 이를 국내정치적 목적에 이용할 생각도 아예 버려야 한다. 우리 국민은 이제 남북관계의 적고 큰 변화에 옛날처럼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20년 전의 환희와 작약은 이제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국민은 이제 남북문제에 관해 균형감각을 갖추고 있으며 얼마간 범세계적 맥락에서 장기 조망할 정도로 성숙해 있다. 급진 운동권의 억지 논리가 먹혀들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상회담이 우리의 역사를 바꿔 놓으리라고 믿을 국민이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따라서 통일정국을 정권재창출 수단으로 이용할 의도를 추호라도 했다면 이 기회에 버려야 할 것이다.

다음, 핵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핵문제가 풀려야 군축도 논의되고 평화정착도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이는 범세계적 차원의 접근이라는 데 그 의의가 크다. 또 한 가지, 분단의 아픔 중 가장 아린 이산가족 재회문제에 온 정성을 쏟아야 한다. 그것이 성사되면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간회복의 章으로 기록될 것이다.

끝으로 우리 체제를 통일에 대비하여 개혁하는 일이다. 이 문제는 남북한교류기금이나 통일비용을 마련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 진척과 더불어 우리 사회 내에 사회 · 경제적 형평을 제고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통일은 협상테이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세계가 부러워하는 민주복지사회로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찾아오는 것이다. 바로 독일이 우리에게 그 전범을 보여준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