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경제적 조정자로서 ‘아시아 태평양 시대’ 맞아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2.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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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천년대초 어느날 아침 종합무역상사의 중견간부 ㄱ씨는 24시간 세계 주요뉴스를 볼 수 있는 컴퓨터 스크린을 통해 밤새 들어온 주요 경제뉴스를 읽고 국내외 경제지를 훑어본 후 집을 나선다. 이날 오후 북경에서 열릴 투자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비행기로 1시간 30분만에 북경에 도착해 일을 마친 그는 귀로에 기내에서 본사와 전화로 업무협의를 한다. 이날 저녁 귀국한 그는 요즘 인기를 끄는 미국산 티본 스테이크로 저녁식사를 끝내고 홍콩의 위성중계회사 ‘스타 TV’가 내보낸 음성다중용 BBC 명화를 본 후 잠자리에 든다.

아시아 · 태평양시대가 열리는 2천년대초, 국민소득 1만7천달러 시대에 사는 ㄱ씨의 생활이다. 역동적인 아태시대에 사는 한국인은 명실상부한 ‘세계시민’이 되어 있다. 인류역사의 무대가 지중해 · 대서양 · 태평양 순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예언한 미국의 미래학자 허먼 칸은 “이제 바다는 서로를 갈라놓는 게 아니라 연결자 구실을 하고 있다”고 말한바 있다. 과거 대륙과 해양 사이에 낀 분단 반도국으로 제 구실을 못한 한반도는 21세기에 들면 정치 · 경제적 통합력을 갖춘 강국으로서 대륙과 해양 세력을 잇는 연결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므로 허만 칸의 ‘연결자 구실’이 흥미롭게 들린다.

일부 전문가들은 구주공동체(EC)와 북미 자유무역지대(NAFTA) 등 세계적인 경제블록화 추세에 비추어 21세기를 ‘아태시대’라고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지역의 역동적인 경제성장률과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아 결코 무리한 규정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현재 아태지역의 국민총생산(GNP)은 세계 GNP의 절반에 해당하는 10조달러이며 무역도 세계 총무역량의 40%인 2조6천억달러에 이른다. 또 일본 대외투자의 62% (1천1백60억달러), 미국 대외투자의 34%(1천1백억달러)가 이 지역에서 이뤄지고 있다. 교역의존도도 경제통합을 눈앞에 둔 EC(60%)보다 큰 65%에 이른다. 미국의 경우 태평양 무역(2천7백억달러)은 대서양무역 (1천8백60억달러)을 훨씬 앞지르고 있다. 지난 80년대 10년 동안 이 지역의 경제성장률을 보면 특히 신흥경제공업국(NICS)들이 높아 홍콩이 89%, 싱가포르가 93%, 대만이 116%를 나타냈고 한국은 무려 150%를 기록했다.

다자간 안보체제 속에 경제 이해 부상
특히 10년 후의 한국은 미국 소련 중국 일본 등 강대국의 미묘한 세력관계 속에서 외교적 조정자이자 경제강국으로 역내에서 큰 몫을 할 것으로 관측된다. 한 외교분석가는 “일본이 나서면 패권을 추구한다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에 한국은 중간국의 입장에서 이 지역 강대국의 외교 및 경제적 조정자로서 큰 몫을 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최근 한국이 아태경제협력체(APEC)의 서울 개최를 계기로 중국 홍콩 대만을 회원국으로 가입케 한 것도 이러한 조정자 역할을 해낸 사례다.

설령 통일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21세기에 들면 남북한은 사실상 국가통합의 형태와 다름없는 상황하에 활발한 물적 인적 교류를 할 것으로 예상되며 아태협력의 주요한 파트너로 떠오를 전망이다. 설령 국가연합체제로 가더라도 남북한은 이같은 ‘현상유지’ 체제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굳어질 가능성도 있는 만큼 동서독처럼 자주적인 통일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앞으로 10년이 지나는 동안 북한은 미국 및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한국은 중국과 수교하는 상황이 온다는 점이다. 이 경우 주변 강국으로부터의 안보위협이 크게 감소한 상황에서 북한이 소련 및 중국과 맺은 방위조약이나 한국이 미국과 맺은 방위조약은 그 실질적 의미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물론 한미 간의 안보틀은 계속 유지되겠지만 결국은 남북한과 미소중일이 참여하는 아시아판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같은 다자간 안보협력체가 출현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앞으로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역할감소에 따른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견제하는 차원에서도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일부에선 아태경제협력체가 정치안보의 역할까지 담당해야 한다는 소리도 있으나 이 기구의 ‘탈경제화’를 우려하는 동남아국가연합( ASEANS)의 반발이 예상돼 실현은 어렵겠다는 전망이다.

다자간 안보체제가 합의된다면 역내 국가들의 제일 큰 관심사는 자연 통상문제에 모아지리라 보인다. 안보중심의 하이 폴리틱스(high politics)가 아니라 경제이해 중심의 로우 폴리틱스(low politics)로 바뀌게 된다. 이는 우리처럼 자원빈곤 국가에게는 노동력과 시장확보 측면에서 더없이 좋은 기회를 줌과 동시에 도전을 안겨준다.

삼림 등 자원이 풍부한 소련의 극동지역과 중국의 동북 3성(구 만주땅)은 자본과 기술의 투입이 가능한 한국에게는 이상적인 개발시장이다. 21세기의 큰 잠재시장이자 경제강국이 될 수 있는 중국은 ▲상해-대련-광주를 연결하는 황해경제권 ▲부산-도쿄-홍콩-대만-광주(중국)-보스토니치(소련)의 동아경제권 ▲부산-대련(중국)-보스토니치의 동북아 경제권을 구상하고 있다. 현재 인구 11억으로 오는 2천년경 1인당 국민소득 8백달러(일부 경제특구민의 경우 5천달러)를 목표로 잡는 중국은 경제특구가 밀집해 있는 연해지역을 집중개발할 예정이어서 한국에게 더없이 좋은 투자기회를 제공한다.

한국민 의식 국제화돼야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이 중국과 소련 지역에 대한 개발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면 기업의 형태도 미국의 IBM이나 벡텔 같은 초대형 다국적 기업으로 바뀌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역내 국가들 간에 자본은 물론 노동력 이동이 자유롭게 이루어져 앞으로 우리가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이나 동남아의 값싼 노동자를 보는 일도 흔해질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 지역화 추세의 바람이 어느 때보다 거세게 몰아칠 아태시대는 한국에게 어려움을 줄 것도 예상된다. 무엇보다 국가적 이슈가 세계화돼 한국이 독자적인 정책을 취하기 힘든 상황이 올 가능성이 있다. 작금의 쌀시장 개방이나 농산물 개방문제는 바로 이같은 조짐의 하나이다.

특히 유럽과 달리 경제발전단계나 지정학적 사정이 다른 아시아에서 단일경제권이 형성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전문가들은 따라서 한국이 앞으로 조정자역을 십분 발휘해 미국 중국 일본 호주 등을 포함한 역내 국가들을 아우른 ‘환태평양 경제권’을 창설해 일본의 엔블럭화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관세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같은 무역질서의 혜택 속에서 경제성장을 누려온 한국은 이같은 국제질서 유지를 위한 환경조성에도 노력해야 할 실정이다.

문제는 한국이 과연 내부적으로 역동적인 새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국민소득 1만7천달러 시대를 맞으려면 첫째 국제감각이 풍부한 인적 자원을 양성해야 하고, 둘째 내실있는 경제력을 키워야 하며, 셋째 국민의식의 국제화가 다른 무엇보다 필요하다.

주미대사를 역임한 한 베테랑 외교관은 우리 외교관들이 국제무대에서 동남아의 외교관들에 비해 영어구사력은 물론 국제감각에서 너무 뒤처져 있다고 비판한다. 이같은 국제감각은 비단 외교관뿐만 아니라 아태시대를 살아갈 국민 모두에게 요구된다. 얼마전 아태경제협력체 서울총회에 참석한 칼라 힐스 미무역대표부 대표를 일부 언론이 ‘魔女’로 묘사하는 등 감정적 차원의 반응을 보인 것도 의식의 국제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제 겨우 먹고살 만한 경제력을 가진 한국의 대외경제원조도 아직은 때가 이르다는 시각이 있다. 아태시대가 한국을 위해 종을 울려주길 기대하기 앞서 뼈아픈 자기 성찰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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