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黨’ ‘노동黨’ 동시 출발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2.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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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씨 · 진보세력 등 ‘새 정치’ 표방 … 양당구조 깨기는 어려울 듯

여느 때 같으면 연말연시는 정치권의 유일한 휴식기간이다. 그러나 14대 총선을 눈앞에 둔 정가의 연말연시는 유난히 부산했다.

이런 가운데 또하나의 흐름이 전개되고 있다. 현재의 양당구조를 거부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을 결집하려는 제도정당 바깥의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재벌 신당’에서 ‘노동자 정당’에 이르기까지 목소리와 색깔이 저마다 다른 이들 장외세력들은 92년의 정치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축으로 한 ‘재벌 신당’ 추진 움직임은 이 가운데서도 가장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정회장이 당초의 불복 방침을 바꾸어 추징세액 전액 납부 결정을 내린 후 가진 희수연에서 “제2의 인생을 살겠다”는 발언을 할 즈음만 해도 정회장이 일본의 ‘마쓰시타 政經義塾’처럼 정계인물을 뒤에서 후원하고 길러내는 이른바 정치학교를 구상하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2월초부터 정회장이 단순한 정치학교가 아닌 정당 그 자체를 겨냥하고 있는 흔적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기 시작했다. 우선 서울 계동 현대사옥 12층의 한 사무실에 실무지원반이 상주하면서 정세분석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정회장의 은밀한 부탁을 받은 몇몇 언론인이 정계 · 관계 인사들의 의사를 타진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전직 장관 ㅊ씨 ㅇ씨 등 전직 고위관리들을 비롯한 金東吉 전 연세대교수, 야권의 高興門 楊淳稙씨 등 여 · 야권 인물이 광범위하게 접촉대상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작업에 깊숙이 관여한 한 인사는 “최소한 20석 정도는 확보한다는 선에서 창당에 필요한 원칙적인 검토를 마친 건 사실이다. 주로 언론계 인사들이 인물을 천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총선 전에 신당을 띄우고 선거를 치를지, 일단 무소속으로 후보 지원을 한 뒤 정당으로 발전시킬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다. 여야의 공천문제, 대권 후보를 둘러싼 여권 내 향배 등 여러 변수를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가에서는 정당 결성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정회장의 입김이 14대 총선에 상당한 변수가 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우선 여권의 경우 6공화국에 불만을 품은 5공 인사들이 같은 처지인 정회장과 손잡을 가능성 때문에 불편한 기색이다. 張世東 전 안기부장과 정회장의 개인적 친분이 관심을 끄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1월말 공천자 확정 이후 민자당 공천 낙천자의 대거 이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민주당에선 야당표 분산 우려
반면 민주당은 재벌 신당 움직임에 일단 겉으로는 초연한 태도다. 권력의 비호를 받던 기득권층의 재벌의 6공 도전이야말로 ‘권력의 내부 분열’이므로 야권으로서는 느긋히 관망할 일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당내 일각에서는 정반대의 해석도 나오고 있다. 정회장 자신은 재벌 기득권층 출신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고정적인 여당표 분산보다는 ‘야당표 분산’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벌써 3억원 착수설, 30억원 지원설이 나돌고 있다. 공천자 확정 후에는 탈락자들이 정회장 주변에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정회장이 정치권력과의 팽팽한 대립과정에서 표명한 울분과 소외감이 야권성향의 유권자들에게 먹혀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재벌 신당은 그 움직임을 제어하는 막판 변수가 없다면 막강한 자금력과 정회장의 ‘경제신화’를 바탕으로 양당 기반을 상당 부분 잠식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정치적 색깔과 명분이 뚜렷하지 않은 세력이 엄청난 재력으로 정치권력까지 창출하는 시대가 열린다면 가뜩이나 뒤틀린 정치판이 더 혼미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김동길씨가 이끄는 태평양시대위원회와 박찬종 의원이 주도하는 정치개혁협의회(약칭 정개협) 역시 ‘새로운 정치’를 내걸고 총선에 대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세력이다. 당초 이 두 세력은 기성 정치에 대한 비판에 의견을 함께 확인하고 공동의 방안을 모색했지만 양자간의 의견이 다소 엇갈려 결국 제각기 단체 출범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11월 태평양시대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김교수를 둘러싼 신당설과 대통령 출마설이 난무했지만 여기에는 언론이 부풀리고 앞서간 측면이 많다. 하지만 참여 세력 중 정치권 진입을 희망하는 이들을 묶어 무소속 연합이나 ‘새정치협의회’라는 형태로 총선에 임할 구상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 김교수는 黃山城 변호사, 玄勝一 국민대교수, 金重泰씨 등 각계 인사들을 만나 참여를 권유했으나 당사자들이 태도를 유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위원회 관계자들은 “여야의 공천이 매듭지어지면 상황이 급진전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지만, 정가에서는 김교수가 결국 정주영 회장과 손을 잡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무성하다.

한편 통합 민주당 합류를 거부한 박찬종 의원이 이끄는 정개협 역시 “부패 · 금권 · 지역대결의 기성정치 타파”를 외치며 각종 심포지엄, 돈 안드는 선거 캠페인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그러나 드러난 활동에 비해 정치 세력 규합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총선에 참여할 정개협 세력은 任昌珍 서강대교수, 朴天植 변호사, 학생운동권 출신인 李信範씨와 구 민주당 영남지역 원외지구당 위원장 정도로 머물 공산이 크다.

갈라진 채 세확장 꿈꾸는 진보세력
재벌 신당과는 대조적으로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에서 ‘양당 구조의 타파’를 외치는 정치세력들도 총선에 대비, 신발끈을 매고 있다. 창당 1년을 넘긴 민중당은 이번 총선을 통해 ‘해방 이후 최초의 진보적 대중정당’의 원내 진출 가능성을 검증받는 것이다. 그러나 광역의회에서 드러난 유권자들의 진보저당에 대한 무관심과 정치적 보수화 경향은 민중당 진출의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민중당 지도부가 당내 소장파의 반발을 무릅쓰고 지난해 11월 노태우 대통령과의 면담을 제의한 것도 당내 인사들의 사면 복권과 함께 ‘대중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민중당 李佑宰 상임대표는 “유권자들은 단순한 안정만이 아닌 정치권의 개혁도 바라고 있다. 이런 심리를 어떻게 민중당 지지와 연결시키느냐가 관건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중순 창당 추진 사실을 공식 발표한 ‘노동자정당추진위원회’(위원장 주대환)는 민중당과 같은 재야 운동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정치세력이다. 그러나 이들 ‘추진위’는 계급적 관점을 포기한 채 기성정당과 비슷한 색깔을 띠어가고 있는 민중당의 노선을 ‘개량주의’로 비판하고 있다. 구성원들도 민중당에서 지난해 ‘좌파’로 규정되어 제명된 세력, 인천 안산 마산 창원 등지에서 활동해 온 현장 노동운동가들, 최근 민중당 지도부의 청와대 면담 등 일련의 ‘개량화’에 불만을 품고 탈당한 하부 조직원이 대부분이다. ‘추진위’측은 원칙적인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선명한 노선을 걷는 한편 민중당과의 상호 대동단결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진보 진영의 역량 분산이 예상되고 있다.

과연 이들 세력이 우리나라 유권자들의 전통적인 심리인 양당구조를 깰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 어떤 정치세력도 양당구조를 깨는 비약적인 진출을 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기성 정치권 출신이나 재벌 세력은 정치 냉소주의에 빠진 유권자들이 요구하는 도덕성과 참신성에서 탁월한 차별성을 확보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은 제도 정치권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물적 기반을 마련하기 힘든 데다 아직까지는 현실적인 대안 세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정치세력이 속출하는 근본 원인은 민자 · 민주 두 정당이 부패와 타락, 구태의연한 당운영으로 시대의 흐름을 포착하는 합리적인 변신을 보여주지 못한 때문이다. 양당이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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