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사회주의자의 소망
  • 프랑크푸르트. 허 광(자유 기고가) ()
  • 승인 1994.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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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세 슈테판 하임 의원, 통일 독일의 견고한 민주주의 주장



 지난 10월16일 독일 총선거에서, 누구보다 많은 눈길을 받은 인물은, 민사당의 공천을 받아 통일 독일의 심장부 베를린에서 당선된 슈테판 하임이다. 그는 '민사당과는 아무 관계도 없지만 사민당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그리고 당선된 의원 중 최고 연장자가 하게 되는 국회 개원 연설을 하기 위해서 출마했다'고 밝힌 81세 백발 노인이다.

 그는 당선 이후 기자들과 인터뷰 할 때 돈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돈을 모아 베를린에 부랑아들의 거처를 마련한다는 것이 그의 첫번째 계획이다.

독일 현대사의 모든 비극 체험
 이 노인의 생애에는 독일 현대사의 비극이 휘감겨 있다. 13년 유태인 상인 집안에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때 반 군국주의 시를 썼다가 발각되어 퇴학을 당했다. 그후 사회주의 계열 신문. 잡지에 기고하며 살다가 33년 나치스가 등장하자 체코로 탈출했다. 이때 독일에 남은 가족의 신변을 걱정해서 지은 이름이 바로 슈테판 하임이라는 가명이다.

  35년에는 미국으로 피신해 시카고 대학에서 하이네 연구로 학업을 마치고, 접시 닦기. 막노동을 하면서 뉴욕에서 주간 시문〈독일 민중의 소리〉를 펴냈다.

 43년에는 미군에 입대해 미국의 독일 점령기에 심리전 장교로 일했다. 그러나 점차 미군과의 정치적 견해차가 드러나 45년 말 군복을 벗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광부 파업을 지원하면서 출판한 전쟁소설 〈십자군〉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담긴 평화주의. 사회주의 성향은 당시 좌익 지식인들을 추적하던 매카시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52년 슈테판 하임은 매카시즘과 한국전쟁 정책에 항의하는 표시로 2차대전에서 받은 훈장을 반납하고 동독에 정치망명을 신청하고 동독으로 이주했다. 그는 84년 회견에서 '미국에서 자본주의를 충분히 경험해서 그 미국의 종속국 서독으로는 갈 이유가 없었고, 당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역사적 실험에 매료되어 동독을 택했다'고 말했다.

 자유 기고가. 작가로 시작한 그의 경력은 58년부터 '사회주의를 왜곡하고 있는 교조주의와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그후 슈테판 하임은 동독 권력층에게는 탐탁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그의 국제적 명성 때문에 권력이 건드릴 수 없는 이단자로 남게 되었다. 그는 동독의 검열을 피해 서독에서 출판한 소설-53년6월 동베를린 폭동을 다룬 〈6월의 5일간〉(74년), 동독 스탈린주의의 과거를 파헤친 〈콜린즈〉(79년)-로 서유럽에서 인기 작가로 올라섰다.

 그의 작품은 76년부터 동독에서 출판 금지되었다. 79년에는 동독 정부 허가 없이 서독에서 출판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동독작가 연명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동독에서는 침묵의 작가로 남게 되었다. 81년에 발표한 소설〈유랑하는 유태인〉에서는 온갖 모욕에서 굴하지 않고 사회 개혁 의지로 투쟁하는 지식인의 원형을 그렸다. 그는 82년부터 인권운동. 통일운동의 대부 역할을 맡아 동. 서독 작가 모임에서 통일은 가능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견해를 밝혔지만 서독에서도 외면당했다. 89년11월4일 동베를린의 시위 군중은 '새로운, 더 나은 동독의 사회주의'를 토로하는 그의 연설에 열광했다.

바이마르 의회의 비극 회상
 그는 90년 여름, 동독을 '서독으로 흡수'시키는데 일조한 동독 정치가들의 형태에 환멸을 맞본 이후 통일 후의 현실과 대결해 왔다. 92년 작품〈야인(野人), 새 독일에 대한 단상〉에서 그는 동독 지역의 피폐상을 보여주고, 신탁관리청과 비밀경찰 문서담당국의 현실 정책에 거부 선언을 했다. 그는 지난 10월 베를린 의회 개회 연설 서두에서 32년 독일제국의회에서 개회 연설을 한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선구자 클라라 제트킨의 운명을 회상했다. 제트킨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의회에서 나치스 군부와 타락한 부르주아 자유주의의자, 개량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탄핵하고 이듬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히틀러를 수상으로 지명한 제국 의회는 나치스에 의해 불타고 백여 명의 의원이 처형당했다.

 "이 불타는 제국 의회를 목격하면서 나는 독일을 떠났습니다.… 이런 개인사를 지닌 내가 이제 통일 독일의 두번째 의회에 서게 된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바이마르 시대의 민주주의보다 견고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가 바이마르 의회의 비극을 겪어서는 안된다는 소망을 더 굳혀줍니다…." 20분에 걸쳐 집권 기민련 의원들을 침묵 속에 몰아넣은 그의 연설 중 한 구절이다.
프랑크푸르트. 허 광(자유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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