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명 벼락'에 가족 꿈도 산산히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4.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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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보원씨의 아버지 서태석씨(60)는 부산 북구 덕천동 집 앞에서 부인 정정희씨(55)와 함께 오랫동안 과일 행상을 해왔다. 그일을 워낙 오래 해왔기 때문에 덕천동 주민 사이에서 '칼 아파트 앞 과일장사'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칼 아파트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서씨의 아파트 근처에 오래 전에 대한항공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씨는 올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관재수에 걸려 말 그대로 집까지 날려버리게 됐다.

 아들의 결백을 굳게 믿었던 서씨 부부는 변론을 맡아줄 변호사를 선임하기 위해 목돈을 마련해야 했고, 무엇보다 이웃으로부터 쏟아지는 '살인범 가족'이라는 눈총을 견디기 어려웠다. 갑자기 목돈을 마련하자니 가진 것이라고는 13평짜리 아파트 한 채뿐이였다. 서씨는 2천5백만원을 받고 아파트를 비워야 했다. 철거민 신세를 면한 지 딱 15년 만에 당하는 설움이었다.

 아들이 무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서씨는 2천만원 가까이를 썼다. 대신 서씨는 덕천동에 보증금도 없는 사글세방을 얻었다. 그것도 모자라 얼마 전부터 서씨 내외는 경남 진영에 있는 친척의 감나무밭으로 품팔이를 나가고 있다. 방안에 들어앉아 아들 걱정만 하기보다는 생계를 잇는 일이 다급했던 것이다.

 서씨 내외를 모셨던 둘째 아들 덕원씨(33) 부부도 풍파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부모와 함께 살던 아파트를 비워준 뒤 덕원씨 부부도 경남 김해에 보증금 3백만원짜리 월세방을 얻어 옮겨갔다. 게다가 서씨는 동생의 송사를 쫓아다니느라 직장 일마저 힘들어졌다. 편의점 배달차 운전수인 덕원씨는, 따로 장기 휴가를 낼 형편이 못돼 일이 있을 때마다 직장일을 대신할 사람을 사야 했다.

 하지만 서씨 일가에게 더 큰 고통은 없이 사는 설움이다. 서태석씨는 "포항 김해 함양 부산 등 친척이 사는 곳에는 모두 형사들이 찾아갔다. 혹시 집안에 똑똑하거나 힘쓰는 사람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아들이 살인범 누명을 쓰게 된 까닭도 모두 없이 사는 탓이다"라고 말한다.

 세상에 대한 증오는 복수심을 낳는다. 서씨는 아들의 결백이 최종 확정될 때를 기다려, 담당 수사관과 증언을 잘못한 사람을 모두 고소하겠다고 벼른다. 그에게는 지금 '법에는 법으로'가 움직일 수 없는 철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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