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국민 가볍게 본 ‘선거 연기’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2.01.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제난 풀겠다며 정치난 초래 … 동시선거 · 13대서 개정 등 ‘해법’ 외면

 현행법과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린 범법행위인가, 경제파탄을 막기 위한 구국의 결단인가. 盧泰愚 대통령의 전격적인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연기 선언이 당위성 논란과 함께 신년정국을 강타하고 있다.

 민주당과 민중 당은 물론 통일국민당(가칭)과 정치개혁협의회 등 신정치세력, 제야단체 · 시민운동단체 등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1~2년 연기하겠다는 의향을 밝힌 노대통령의 회견에 일제히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중에서도 제1야당 민주당이 가장 강도 높게 반발하고 있다.

 13일 金大中 李基澤 두 공동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해 노대통령의 선거 연기 방침을 “쿠데타에 준하는 명백한 위헌행위”로 규정짓고 “선거 연기 여부를 논의하고 정치 자금 유입을 규명하기 위한 임시 국회의 즉각 소집”을 요구했다. 두 대표는 또 정부 여당이 국회 소집에 응하지 않을 경우 지구당 조직을 통한 전국적인 규탄집회 · 서명운동을 벌이고 재야단체들과의 연대 · 제휴 등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정치권 불신심리와 양비론이라는 불리한 여론 속에서 가능한 한 극한대결을 피하던 민주당이 “당 운을 걸고서라도 정면 투쟁을 선언”한 이유는 자명하다. 민주당 김대표의 기본인식은 야권의 수권기회인 92년 권력 교체기를 맞아 그 서전 정지작업으로 행정조직의 민주화가 반드시 선행돼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지방자치단체장의 직선이야말로 임명된 자치단체장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관권선거를 원천적으로 막아 공전한 대통령선거를 보장한다는 것이 김대표의 상황인식이다. 김대표가 89년 12 · 15 청와대 회동 당시 대타협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까지 지자제 실시 합의에 주력한 것도, 90년 사퇴정국 이후 단식으로 지자제실시를 다시 끌어낸 것도 ‘지자제를 있게 하는’ 것에 정치적 최대 목표를 둔 김대표의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이번 방침으로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자치단체장 선거 없이 대통령선거를 치를 경우 민주당의 정권교체 희망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 민주당의 판단이다. “이제 대통령선거는 하나마나”라는 자조 섞인 푸념이 당내에서 오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권교체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그 디딤돌마저 없어진 셈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 측은 여권의 자치단체장 선거 연기 방침이 ‘예정된 포석’이었으리라는 의혹을 감추지 않는다. 민주당 李哲의원은 “여권은 합의를 해놓고도 애당초 단체장선거를 치르려는 의사를 갖지 않았던 것 같다”며 두어 차례에 걸쳐 여권 고위 관계자들에 의해 단체장선거 연기 방침을 흘린 점, 지난해 말부터 민주당이 줄곧 주장해온 3차례 선거 동시 실시 제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정부 여당이 4대 선거에 대한 경제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계속 “법대로 실시”를 강조하는 한편, 돈 드는 선거의 부작용을 널리 홍보해온 양면전략이 “선거 연기를 위한 명분 축적용”이었다는 게 야권의 주장이다.

 그러나 야권의 강력한 철회 요구에도 불구하고 여당은 느긋한 관망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총선이 목전에 다가온 만큼 정당으로서는 자연히 공천, 총선전략 수립 등 당면한 일정 때문에 총선체제로 돌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여당의 기본 인식이다. 국민 여론도 경제위기에 대한 감도가 워낙 높은 만큼 선거 연기에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쪽으로 형성되고 있다고 판단, 앞으로 “선거 연기 당위성에 대한 대국민 홍보와 총선 공약 개발”에 주력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의 연기 방침 발언은 비단 “당리당략적 차원”이 아니더라도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의 준수, 국민과의 약속에 대한 최고 지도자의 신의, 입법부에 대한 인식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지적이 각계각층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우선 연두기자회견을 통한 일방적인 연기 방침 시사는 법치주의에 위배되는 “대통령의 월권”이라는 지적이 있다. 자치단체장선거와 관련, 몇 차례의 여야 협상 끝에 개정된 지방자치단체장선거법에는 “92년 상반기 내에 실시한다”는 조항이 있다. 선거 시기를 못 박은 것이다. 대통령은 사전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통과된 법률의 개정 권한은 오로지 입법부의 고유권한이다. 물론 노대통령도 이 점이 부담스러운 듯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1~2년 연기하는 방법을 14대 국회에서 논의해 달라는 것이다”라고 부연 설명했다.

일부 법학자 “대통령의 발언은 탄핵소추 사유에 해당 된다” 
 그러나 金光雄 교수(서울 대 행정대학원)는 “법으로 정한 것에 대해 대통령이 연기 의사를 먼저 말하는 것은 법치국가에서는 분명히 잘못된 순서”라고 지적했다. 일부 법학자들 가운데에는 “대통령의 발언은 탄핵소추의 사유에 해당되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14대 국회에 연기 의사를 묻는 방식에서도 논리적 허구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지적이다. 우선 법 개정 의사를 물을 수 있는 13대 국회가 엄연히 존재하며 그 임기가 5월30일까지임에도 14대 국회로 넘겨야만 할 당위성은 없다. 더욱이 6월초 열리는 14대 의회가 만의 하나 지난날처럼 ‘여소야대’ 국면을 형성해 법 개정을 거부할 경우, 법정시한인 6월30일까지 선거를 치르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대통령의 발언은 “13대 국회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자“14대국회에서 여권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다”는 전제 아래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한 중견 언론인은 “차라리 13대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 국회를 열어 토론과 표결과정을 거쳐야만 최소한 입법부의 권위도 살고 대통령의 도덕성도 지켜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난의 책임을 엉뚱하게 선거에 전가하고 있다”
 법을 어긴다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연기를 결심하게 만든 노대통령의 경제위기 논리에 대해서도 이견이 나오고 있다. 우선 현재 직면한 경제위기가 단순히 선거만이 아닌, 상당 부분6공화국의 경제 실정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여기에 책임을 지지 않고 선거에 이를 떠넘겼다는 것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 연합 徐京錫 사무총장은 “경제파국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정책의 실패인데도 이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고 엉뚱하게 선거에 그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정부 여당이 돈 안 드는 선거, 돈 덜 드는 선거를 위한 제도적 장치와 방안을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모색한 적이 있는 가”라고 반문한다.

 <한국일부> 李梓昇 논설위원은 “국민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돈 안 드는 선거를 위해서는 우선 선거 횟수를 줄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면서 대통령선거가 치러지는 해에 연방 상 · 하 양원, 주지사, 각급 지방자치단체장, 판사, 경찰서장 선출 등 수많은 선거를 한꺼번에 치르는 미국의 예를 들고 있다. 민주당이 지난해 말 당론으로 확정해 줄곧 주장해온 3대 선거(국회의원 기초단체장 광역단체장)의 동시 실시도 그 한 방안으로 검토할 수 있다. 따라서 ‘선거를 있게 하면서도’돈 안 드는 선거를 위해 동시 선거, 관연 선거법의 철저한 정비와 적용, 선거 휴무일제 폐지 등 제도적 개선과 국민 계몽에 만전을 기하는 정부 여당의 의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그 밖에도 노대통령이 제시한 사회적 여건 미숙도 우리 사회가 이미 52년부터 61년까지의 지방자치 기간 동안 자치단체장 선거를 치러본 경험을 갖고 있음을 감암할 때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방자치 연구의 권위자인 趙昌鉉 교수(한양 대 · 지방자치연구소장)는 “선거 시기를 당리당략에 따라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민주국가의 기본 틀을 흔드는 위험한 발상”이라며 “정상적인 민주국가에서는 선거란 시계추처럼 때가 되면 저절로 치러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이제 정국은 단체장선거를 둘러싼 논란이 격화되는 가운데 14대 총선을 맞게 되었다. 민주당은 자치단체장선거가 대통령선거와 직결되는 민감한 사안인 만큼 이 문제에 관한 한 인식을 함께 하는 범야권과 연대해 원내외 투쟁의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당 운을 건 강력 투쟁”을 벌일 것으로 보여 6공화국 최대의 여야 대치국면이 형성될 가능성도 높다. 물론 총선정국이 급격히 형성되고 있는 시기상의 문제, 선거 연기에 비교적 호의적인 국민정서를 감안할 때 투쟁의 강도는 그다지 높지 않을 것이라는 정가의 분석도 있다. 이 경우 야권은 선거 연기의 위법성을 정치자금 문제와 함께 14대 총선 최대의 쟁점으로 부각시킬 공산이 크다.

 여권은 이번 조처로 동요하는 행정조직을 안정적으로 선거에 활용 하게 되는 ‘실익’을 얻었다. 그러나 신뢰성과 준법정신에 대한 의문, 여야의 격돌이라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게 된 셈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