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부 기자도 계보 있다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2.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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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때면 특정 계파 밀착…YS계 ‘오인방’ DJ계 ‘벙커파’등

 “기자는 선거를 치러야 큰다” 선거철이 가까워지면 고참 기자들은 신출내기 기자들에게 흔히 이런 말을 한다.

 그런데 선거나 정치적 격변기를 통해 ‘진짜로 큰’ 언론인이 왕왕 눈에 띈다. 멀리 갈것도 없다. 80년 민주화의 봄과 87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한국의 언론은 정치권과 함께 심한 정치병을 앓았다. 그 정치병이란 바로 언론계가 대권의 향배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편 가르기’에 몰두한 것을 말한다.

 먼저 80년을 전후한 상황을 돌아보자. 10.26 사건으로 유신독재가 막을 내리자 정치는 해빙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겨울잠을 자던 곰이 기지개를 펴듯, 잔뜩 움츠렸던 정치권은 아연 활기를 띠었다. 정치활동이 중단됐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씨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여 3김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학원가의 시위도 날이 갈수록 열기를 더해갔다.

정치인은 ‘기자 관리’ 기자는 ‘줄 관리’
 당시 언론은 크게는 유신에 협조했던 수구세력과 자유언론을 실현시키려는 민주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12.12 거사로 정권탈취 기회를 엿보던 신군부의 눈에 언론계 민주세력이 거세해야 할 표적으로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언론을 ‘순응체질’로 바꾸려는 군부의 음모가 진행중이었음에도 당시 언론계 민주세력은 불행하게도 YS계와 DJ계로 갈라져 있었다. 이것은 정치부 기자 뿐만 아니라 언론계 전반에 걸친 현상이었다. 특히 야당 출입기자들은 ‘쌍두’와 ‘오인방’을 중심으로 계보를 형성했다. 쌍두란 김대중씨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기자 2명을, 오인방은 김영삼씨를 지지하는 기자그룹 5명을 지칭하는 은어였다.

 그 무렵 야당을 출입하던 한 현직 언론인은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그때는 안개정국이었습니다. 야당을 맡았던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 대권이 야당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었고, 대개의 경우 상도동쪽으로 쏠린 편이었습니다.” 이는, YS는 70년대말 이후 뉴스메이커로서 끊임없이 정치활동을 해왔지만, DJ는 상대적으로 정치 단절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상도동에서는 언론계와의 접촉이 잦았는데 ‘기자 관리’랄까 뭐 상당히 신경을 쓰는 눈치였고, 동교동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한 편이었습니다.” 여하튼 당시 야당 출입기자들은 양김의 통합을 통한 민간정부 구성에 무척 기대를 걸고 또 고무되기도 했다.

 반면 여권으로 기울었던 언론인들의 경우에는 언론계 내에 유신세력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퍼져있어 이렇다 할 움직임을 자제한 채 암중모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에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안개정국 상황에서, 신군부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며 미리 ‘감을 잡은’쪽이 있다. 그 대표적 주자가 바로 당시 서울신문 주필이었던 李振羲씨였다. 이씨는 나중에 문공부장관까지 하면서 5공 언론을 주물렀다.

칼럼 한편으로 장관까지 올라
 이씨는 80년 4월21일자 서울신문 명사칼럼에 ‘歷史의 무대가 바뀌고 있다’는 제목으로 “10.26사태로 역사의 무대가 서서히 바뀌고 있으며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80년대 이후 새 시대를 주도할 새 엘리트층의 등장”이라고 썼다. 물론 새 엘리트층은 신군부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말미에서 “사라진 시대의 주역은 조만간 역사를 떠나야 한다”고 썼다. 사라진 시대의 주역들이란 다름아닌 3김씨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씨가 이 글을 발표했던 때만 해도 대다수 언론인들은 “정신나간 소리”로 치부했다. 그러나 이씨는 이미 신군부에 선을 대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의 예언은 정확한 것이었다. 실제로 3김씨는 신군부에 의해 제거됐고, 언론계도 예외일 수 없었다. 특히 동교동계나 상도동계로 몰린 기자들은 언론인 대량해직 때 거의 예외없이 수난을 당했다. 신군부는 해직사유로 “특정 정파의 이해에 연관된 기자들”이란 표현을 썼는데, 이것은 신군부가 언론을 저항체질에서 순응체질로 바꾸기 위한 명분이었지만, 어쨌든 이러한 명분을 제공할 만한 근거가 존재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의 언론계 내부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결과적으로 신군부의 언론 대학살 구도는 정권탈취를 위한 3김씨 제거와 맥을 같이한다. 3김씨 중 김대중씨가 가장 큰 수난을 당했듯이 언론계에서도 김대중 지지자로 몰렸던 인사들이 혹독한 수난을 당했다.” 사실 기자협회 임직원으로 옥고를 치렀던 5명중에 4명이 광주출신이었고, 경향신문에서 제작거부를 주도했던 기자들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연계시켰다. DJ가 YS에 비해 언론계에 자기쪽 사람이 적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5공을 거치면서 “동교동 계열 기자들의 씨가 말랐던 때문”이라는 풀이도 있다.

 이제 또 한번의 대권갈등이 벌어졌던 87년 대통령선거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이때는 여야의 대립구도라기보다는 1노3김이 각기 다른 정당의 후보로 출마한 상태여서 80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언론사의 특정후보 지지경향과 기자들의 편 가르기가 80년보다 더욱 심해졌다.

 87년 당시 YS와 DJ가 야권통합을 놓고 엎치락뒤치락했을 때만 해도 각 언론사 편집국을 들쑤셔놓았던 주류는 양김 계열의 기자였다. 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 노태우 후보 진영의 기자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기자들 사이에서 지역분파주의가 가장 심각하게 나타났으며, 딱히 정치부 기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같은 고향의 후보나 취향에 맞는 사람으로 후보가 단일화되기를 원했었다.

 선거가 막바지로 치닫자 이 현상은 좀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모 신문의 한 기자는 “어느 신문사의 편집국에서는 이쪽 저쪽으로 나뉘어 서로 맞고함질을 주고받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한다. 기자들이 이처럼 편을 갈라 의견대립을 보였던 이유는 대부분 출입처에 따라 ‘그쪽 사람’이 돼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비록 같은 회사에 근무하더라도 출입처가 다르면 정치적인 입장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얘기이다.

 지난 88년 문공부 국정감사 때 국회의원들은 보도지침을 찾기 위해 문공부 지하창고를 뒤지다가 〈언론인 개별접촉보고서〉를 발견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문공부 홍보정책실이 87년 대선을 전후해서 유력언론의 중견간부들을 만나 언론계 동향을 파악했던 내용이 담겨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한겨레신문〉 이외에는 보도가 되지 않아 유야무야됐지만, 당시 언론계에는 이 보고서에 이름이 거명돼 전전긍긍했던 인사가 여럿 있었다.

출입처 따라 계보 형성
 이 문서에서 기자들의 편가르기 현상과 관련된 부분을 인용해본다.

 1987.11.11. 접촉대상자 : ㅎ일보 ○○부장. “정치부의 ○부장은 확실한 자이나 기자중에 이○○는 김대중과 가깝다고 해서 말썽이 되고 있는데 인간적으로 가까운 것이 아니라 기자가 존경하고 기사에 나타난다.”

 1987.12.2. 접촉대상자 : ㄱ신문 ○논설위원 등. “지금 사내 분위기는 김영삼이 당선되어야 한다는 측과 김대중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측이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주장하고 있음.”

 당시 선거를 취재한 한 기자에 따르면 DJ계열의 기자들 중에 이른바 ‘벙커파’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김대중 후보는 기자들을 상대할 때 주로 응접실을 이용했는데, 지하 밀실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몇몇 측근 기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취재 차원을 넘어 참모 역할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민정당 출입기자들은 선거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서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경우이다. 당시 노태우 후보의 유세현장을 취재했던 한 기자는 “민정당 출입기자 중 고참은 모두 ‘그쪽’이라고 봐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예의를 차린 면도 있었겠지만, 노후보와 함께 식사할 때 “당선을 위하여”라며 건배할 정도로 밀착되어 있었다고 한다. 우연인지 선거가 끝난 후 민정당을 출입하던 고참기자들은 거의 청와대로 출입처를 옮겼다.

 87년 대통령 선거 이후 야권이 대권을 장악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잠시 기자들의 분파주의가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몇몇 거물 정치인들이 대권후보로 거론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복잡한 형태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또 어떤 기자가 ‘클 것인지’ 주의깊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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