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 · 민주 양당의 공천 작업이 밀실합의나 낙하산식 낙점에 의한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어 공명선거를 다짐하는 정치권 구호가 한낱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빈축을 사고 있다.
공천을 앞둔 민자당의 집안싸움은 정당 내 권력구조의 모순을 심각한 양상으로 드러내주었다. 이번 공천 갈등은 공천 내정에 대한 탈락 예상자들의 반발로 단순하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공천을 둘러싸고 심각한 패권 다툼이 진행됐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즉 공천은 당 총재의 최종 결정사안이라는 점을 내세워 청와대가 모든 심사를 ‘직할’하려는 데 대해 金泳三 대표 · 金潤渙 총장 라인이 반발,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신경전을 벌였던 것이다.
사실 이번 공천은 盧泰愚 대통령이나 김대표 두 사람 모두에게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 노대통령 입장에서는 임기말을 앞두고 자신의 친위세력을 구축해 안정된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발판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민자당의 후계구도가 상당히 불확실하므로 자신의 의도대로 당을 계속 이끌려면 자신의 의지를 실천해낼 직속부대가 절실할 수밖에 없다. 반면 차기 대통령 후보를 겨냥하고 있는 김대표도 경선에 대비할 세력 구축이 최우선 과제이다. 이번 총선이야말로 계파 재편을 통한 자파 세력 확장에 둘도 없는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정황에 따라 노대통령과 김대표의 공천 다툼은 필연적인 셈이다.
민자당의 공천 갈등은 지난 22일 비공개 공천신청자 26명의 명단이 보도된 것이 본격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비공개 신청자 명단은 정치적 이득을 고려해 어느 특정 계파의 핵심자가 의도적으로 언론에 흘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청와대 핵심을 제외하고 당에서는 공천 실무를 맡고 있는 김총장과 尹源重 기조국장만이 정확한 명단을 알고 있었으므로 단순 유출사고가 거의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 이미 상당수 후보를 내정했다는 말이 떠돌면서 이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가운데 나온 비공개 신청자 명단은 화약고에 불을 당기는 역할을 했다. 부산 남갑의 許在弘 의원처럼 “공천이 안되면 자살하겠다”고 노골적인 위협을 가하는 추태가 만발했다. 특히 민주계는 자신들 기득권 지역에 민정계 인사들이 대거 도전함에 따라 극도의 위기의식을 표출했다. 민정계 인사의 도전을 받았던 민주계 몫 지역구는 거의 20여곳에 달했던 반면, 민정계 지역구는 같은 민정계 인사들로 거의 교체됐다. 서울 강남을의 경우 李台燮 의원의 탈락이 기정사실화되면서 민주계 姜仁? 당무위원이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姜慶植 전 재무장관이 ‘다크 호스’로 등장, 강위원의 전국구 기용설이 나왔던 것이 하나의 상징적 예다.
더구나 24일의 주례회동에서 노대통령이 계파를 초월한 공천 원칙을 거듭 강조함에 따라 김대표도 이에 승복, 민주계 가운데 10여명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양상에 따라 공화계 ?龍雲 의원(청주을)이 이미 탈당,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데 이어 金東周 의원도 24일 탈당, 국민당 참여를 검토하는 등 탈당인사가 줄을 이을 전망이다. 탈당인사들은 민정 · 민주 · 공화계를 합쳐 대략 30여명 선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신당에 참여하거나 무소속 출마를 굳히고 있어 무소속연합회가 또 하나의 돌풍을 몰고올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공천의 철저한 비민주성에 있다는 것이 뜻있는 당 관계자들의 비판이다. 한 중진의원은 “대통령 자신이 자유경선 원칙을 천명한만큼 총선 후보도 지구당 경선에 의해 선출하는 것이 당민주화 뿐아니라 총선전략에도 유리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민자당은 27일부터 당공천심사위가 작업을 시작했으나, 그 이전에 이미 1백80여개 지역구의 공천을 확정짓고 나머지 지역구의 탈락자에 대한 설득작업에 들어가 공천심사위는 그야말로 결정사항을 추인만 하는 헛껍데기 구실만하게 됐다.
처음부터 과감한 물갈이를 예고했던 민주당도 신민 · 민주계간의 밀실협상에 의한 공천작업의 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비난을 사고
있다. 특히 金大中 李基澤 두 공동대표의 낙점에 의한 낙하산식 공천이 확정된 것은 우리나라 야당의 당내 민주화가 아직도 멀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신민계의 경우, 김대표 장남 金弘一(목포)씨나 韓和甲(신안) 金景梓(광양) ?勳(창원갑) 崔在昇(익산)씨등 김대표 친위세력의
공천 움직임에 따라 “측근이 아니면 돈이라도 많아야 된다”는 자조적인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따라 과거 야당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인물들이 ‘괘씸죄’에 해당, 공천에 위협을 받거나 탈락하기도 했다. 특히 당지도부는 공천에 탈락한 인사들의 당사 점거 등 집단행동을 우려,
청년특위를 구성하고 이들에게 당사 경비를 맡기기까지 했다. 민주당의 경우도 현역의원등 탈락자 30여명이 이미 탈당을 선언하고 신당에 참여하거나
무소속 출마를 추진하고 있어 야권도 집안 단속이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