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총리의 ‘패왕 별희’
  • 프랑크푸르트 .허광 통신원 ()
  • 승인 1994.12.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일 연정, 사면초가 속 ‘야당분열’ 노림수



  집권 13년째에 들어선 헬무트 콜 독일 총리의 요즘 심정은 무겁기만 하다. 그가 이끄는 두 보수 정당인 기독교 민주연합(CDU)·기독교사회연합(CSU)이 자유민주당(FDP)과 세운 연릭 정부에는 공동 묘지 같은 적막이 감돌고 있다는 흑평마저 나온다.  콜 연정이 사면초가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동독 지역에는 민주사회당(PDS)이 버티고 있다. 민사당은 4년 전 선거에서 간신히 의회에 진출했다. 그때는 총 유효 투표의 5%를 득표해야 의회에 진출할 수 있다는 제한 조건을 동독 지역에만 적용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선거에서는 이 예외 조항이 없었다. 따라서 콜은 민사당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민사당에 엄청난 흑색공격을 퍼웁었지만 선거에서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 민사당처럼 동독 주민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정당이 있다는 것 자체가 ‘통일 총리’콜에게는 참기 어려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각 주 정부를 대변하는 하원에서는 사회민주당(SPD)이 다수당이다. 어떤 입법안도 하원의 동의를 받아야 하므로 콜 정부는 제1 야당과 타협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녹색당은 4년 전 선거에서 5% 장애물에 걸려 원외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과거 동독 개혁 시민조직 연합 90과 손잡고 4년 만에 의회에 다시 진출했다. 연합 90·녹색당은 비록 동독 지역에서 완패했지만 서독에서 다시 확인된 지지 기반은 무시할 수 없다. 콜 정부 주변에는 이렇게 세 야당이 포진해 있다.

  콜을 괴롭히는 또 하나는 연정 상대인 자민당이다. 자민당의지지 기반은 계속 감소 추세이다. 자민당 스스로 지난 12년 동안 콜의 정치 노선을 추종해 왔기 때문이다. 자민당에는 이대로 계속 나갈지 아니면 독자적인 목소리를 찾을 것인지 둘러싼 내부 논쟁이 있다.

‘내부 반란’도 골칫거리
  콜 연정은 전체 과반수에서 겨우 5석을 넘겼다. 콜은 지난 14일 총리 선거에서는 단 1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이제 콜은 ‘내부 반란’에도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 그래서 이번 연정으로 4년 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더욱이 콜은 지난 선거에서 이번 출마가 마지막이라고 공약했다. 98년에 물러난다면 적어도 96년에는 당수직을 버리고 후계 구도를 드러내야 한다. 기민련·기사련 원내 총무를 맡고 있는 볼프강 쇼이블레가 지금으로서는 공인되다시피 한 다음 주자이다.

  지난 20일에는 새 내각 진용이 드러났다. 그 구성을 보면 청소년·여성·가족 문제 담당인 28세 클라우디아 놀테가 새 얼굴이고 나머지 각료 중 둘이 자리를 바꾸었다. ‘과거 인물로 가득차 기대할 게 없는 콜의 마지막 재고품’ ‘독일 경제와 근로자들에게는 불행한 조각’. 사민당과 독일 노조의 첫 반응이다.

  ‘새 내각의 새 인물’ 클라우디아 놀테는 동독 시민운동 ‘노이에스 포럼’ 출신으로 90년에 기민련에 입당했다. 제일 존경하는 인물로 콜을 꼽고 있으면서도 콜 정부가 오데르-나이센 선을 독일 국경으로 인정한 것은 불법이라고 보리만큼 극우 성향을 갖고 있다. 또 낙태 여성은 1년간 강제 노동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굽히지 않고 잇다. 소년범 형벌을 더 높여야 한다는 것도 그녀의 지론이다 그래서 새 내각은 ‘독일 여성·청소년에게 등골이 오싹하게 겁을 주는 내각’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보수화 경향이 콜의 생존 근거
  기민·기사련·자민당은 지난 10월 총선 후 연전 구성 협상에 들어갔다. 협상 결과는 23.24일 첫 국회에서 토론에 붙여졌다. 연정의 첫째 과제는 실업 문제 해결. 콜은 이를 위해 ‘미래를 위한 대연합’을 호소하고 정당·기업·노조 대표가 참가하는 협상회의를 제의했다. 사민당 당수 샤핑은 콜 연정의 합의 내용이 ‘앞으로도 지난 12년처럼 밀고 가겠다는 것말고는 아무 것도 볼 게 없는 문서’라고 응수했다. 또 녹색당 당수 피셔는 환경·생태를 우선하는 경제 개조가 없이는 실업 문제 해결도 불가능하므로 이 과제에 무능력한 콜 연정을 하루라도 빨리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야당의 의무라고 비난했다.

  내각 구성과 연정 조약 두 과제를 놓고 3주 동안 진행된 협상 과정은 요란하게 언론의 추적을 받았다. 그러나 협상 결과를 보면, 이 소동은 두 당이 벌인 정치 연극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받고 있다. 연정 조약 핵심 내용은 총선 이틀 후 독일 기업체와 상공회의소 총수들이 내놓은 제안에 이미 들어 있었다. 즉 선거 결과를 고려해서 사민당과 더욱 협력해 독일의 사회보장 제도를 축소·폐기하고 국가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제안이다. 결국은 사회보장 비용에서 기업쪽 부담을 삭감하겠다는 구상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제안에 대한 사민당의 반응이다. 사민당 경제 전문가 우베 옌스는 “이 제안은 콜 정부의 보수·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맹목으로 지지하던 기업들이 이제 사민당 정책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는 징조”라고 반겼다. 이 제안이 노사 마찰을 자극할지 모른다는 기민련 일부의 우려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연정 조약에서 국가 경쟁력 강화 방안으로 거론된 것 가운데 한 가지를 보면, 행정 관료 기구 축소와 건축·환경 분야 허가 절차 단축이 있다.

  이미 4년 전 동독 지역에서 시범 삼아 적용하고 있는 도로교통시설촉진법에 따르면, 어느 지역이든 6주 이내에 고속도로 건설이 가능하다. 도로 건설의 피해자가 되는 지역 주민들이 법적으로 이에 반대할 권리는 대부분 사라졌다. 이제 이런 제도를 서독 쪽에도 도입하고 국가는 환경권시민권 축소에 따르는 책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콜 정부의 생각이다. 

  선거 후 국회 구성까지 한달 간의 흐름 속에는 콜과 쇼이블레가 밀고 나가고 있는 큰 물줄기가 보인다.

  첫째, 민사당을 완전히 고립시킨다는 전술이다. 이 전술에는 사민당과 연삽 90·녹색당도 가담하고 잇다. 연합 90은 민사당과 적대 관계이다. 녹색당과 민사당은 각각 서독·동독 지역의 지역당이다. 따라서 두 당은 명실 상부한 독일의 정당이 되기 위해 경쟁할 수 밖에 없다.

  민사당의 고립은 23일 국회에서도 드러났다. 지난 회기 민사당 의원 17명에게 허락된 국회 발언 시간은 20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소속 의원이 30명으로 늘었는데 발언 시간은 거꾸로 15분으로 줄었다. 이것은 사민당이 안을 내고 녹색당이 묵인해서 결정되었다. 콜 정부는 지난 10일에 있었던 슈테판 하임의 국회 개원 연설이 민사당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이유로 관보에 싣기를 거부했다. 69년 이후의 정부 관례를 처음으로 깬 것이다. 슈테판 하임과 전 민사당 당수 기지에 대한 비밀 경찰 혐의 보도에는 최근 공영 방송까지 가담하고 있다.

  둘째, 콜 정부는 사민당이 민사당과 결탁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이 둘의 연결을 끊어냈다. 그 다음 목표는 지금까지 연대 관계이던 사민당과 녹색당을 분리하는 것이다. 민사당을 정치 무대에서 밀어낸다는 첫째 전술과는 반대로 녹색당은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는 전술이다. 자민당과의 연정이 점차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또 사민당이 녹색당과 연대할 때 감수해야 하는 ‘다수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 기민련에는 이제 녹색당이 사민당내 좌파보다 가깝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녹색당은 이번 회기에서 기민련의 지원을 받아 국회 의장단에 진출했다. 그리고 지금껏 ‘금지 구역’이였던 국회 비밀 정보부 통제위에도 들어갔다. 녹색당과 기민련 사이에는 몇 년이 걸려도 건너지 못할 다리가 있다. 그런데도 기민련의 접근 전술이 빛을 볼 수 있다면 여기에는 녹색당의 보수화라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 각 정당의 보수화 현상은 통일 후의 대표적인 현상이다. 독일의 극우 정당들이 잠잠해진 것은 그들의 정치 구호가 이미 현실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정당들은 자기 정체를 잃고 있다. 이는 사면초가에 몰린 기민련·기사련의 생존 근거이기도 하다. ■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