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전선 ‘새 바람’ 소신파 젊은이들
  • 박중환 경제부장대우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2.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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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외과 출신 요리사 등…장래성·취향 맞춰 선택

 쉐라톤 워커힐 호텔 조리부 2급요리사 康成富씨(31). 90년 2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졸업 3개월 전 선경그룹 공채에 응시해 합격한 뒤 계열사인 이 호텔의 주방을 ‘자랑스런 일터’로 택했다. 재학시절 학과 회장을 지냈고, 86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사건 때에는 운동권 간부로 가담했을 정도로 당찼다. 강씨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법정계열 출신에게 선망의 자리였던 남북대화사무국의 6급대우 별정직 시험에도 합격해 ‘그늘진’ 주방이 아닌 ‘볕바른’ 사무실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왜 구정물에도 손을 담가야 하는 궂은 일자리를 그는 택했는가.

 그의 첫 대답은 간단하고 명쾌했다. “요리할 때면 즐겁다. 장래성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택했다.” 그러나 뒤이어진 설명에서 대학시절 당찬 그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전근대적인 도제방식으로 운영되는 주방관리에 경영개념을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는 혁신이 필요하다. 먼저 요리사로서 기술과 자질을 쌓은 뒤 관리자 직위에 오르면 내 뜻을 펴보려 한다. 또 국내 유명 호텔의 조리장은 모두 외국인들이다. 그들은 분명 뛰어나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음식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모른다. 내 꿈은 최고의 한국인 조리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향인 제주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것이다.”

 이런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경영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그는 “뒤늦게 요리사가 된 것을 알게 된 부모님은 장남인 나에게 기대를 높게 걸었던 탓인지 무언가 아쉬워하는 듯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격려를 해줬다”고 말한다.

고정관념의 벽을 깨부순다
 한국사회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까.

 “사람이 많다보니 별난 젊은이도 있게 마련”이라 보아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고정관념의 벽’을 과감하게 깨고 자신의 취향이나 재능을 살리는 직업을 택해 삶의 가치를 실현시키려는 새로운 바람이, 취업난 시대 우리 사회의 한 켠에서 일고 있다. 새 세대가 연출하는 ‘새 흐름’이다.

 지금은 심각한 취업난 속에서 맞는 고교나 대학의 졸업·입학철이다. 이런 때 ‘새 흐름’은 취업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낮아졌던 실업률이 경기침체와 무역적자로 기업의 감량경영 돌풍이 몰아쳐 올해는 최악의 실업사태를 보였던 89년의 40%선을 웃돌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획일적인 제도에 묶여 경직된 학교교육이 급속히 분화되고 전문화된 사회의 수요를 따르지 못해 취업난을 가중시키고 있다.

지나치게 전공에 얽매이지 말라
 金弄柱 연세대 취업담당관, 孫慶愛 현대사회연구소 교육문화연구실장, 李耕勳 길벗미래사회연구소 연구원 등 취업 전문가들은 기존 취업의 벽을 넘는 슬기를 발휘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들의 충고는 10가지로 압축된다.

 △지나치게 전공에 얽매이지 말라 △초봉의 많고 적음보다 일생 동안의 총급여액을 유념하라 △지나친 대기업 선호는 취업 과소비이다 △ 현재의 인기 직종이나 직장이 10년 뒤에도 같을 수는 없다 △ 하고 싶은 분야를 택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을 끈기있게 개척하라 △ 가업을 잇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 △ 사무관리직 시대는 가고 현장기술직 시대가 온다 △ 부수입(촌지)이 많은 직업은 별볼일 없어진다 △ 좁은 문에 들어가려면 자세(학력·직종)를 낮춰야 한다 △유망 중소기업을 택해 장기전으로 승부를 걸어라.

 강성부씨의 경우는 위 충고 가운데 네가지를 스스로 깨달아 벽을 부숴버린 사례이다.

 고학력자인 강씨와는 다른 고등학교 출신자에게도 ‘새 흐름’은 적용된다.

 인문계인 서울 안창고를 91년 졸업한 安柱煥씨(20)는 항공정비사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과감하게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그는 고3 때 인문계 고교생 기술교육제도가 시행되자 자동차정비과정을 자원하여 수료했다. 졸업 전 곧장 보성운수에 취업한 그는 정비사의 꿈을 가꾸고 있다. 그는 친구들이 대학입학 시험을 치르던 날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그날 출근을 하기 위해 전철역으로 갔다. 그때 수험생으로 보이는 한 여학생이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왠지 눈물이 핑돌았다. 외톨이가 된 듯했다. 하지만 그때 외에는 후회해 본 적이 없다. 분명히 나는 대학에 진학한 친구보다는 적어도 7년 이상 빨리 출발했으니까.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어 좋다.”

 박사실업이 심각해지자 전공이든 아니든 상관치 않고 겉보기에 그럴싸한 일자리면 붙잡고 보자는 박사학위 소지자들을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무기재료학 박사인 洪性岩씨(38)는 이런 현실의 벽을 박차고 나와 그의 취미인 등산과 전공을 함께 살리는 인물이다.  그는 86년 6월 국내 민간연구소로는 내로라하는 삼성그룹 종합기술원에 박사학위 소지자로 입사했다. 그러나 관리업무의 부담으로 실험 연구에 한계를 느끼다가 미련없이 나왔다. 곧장 고려대 산악부 후배와 함께 조그마한 차고를 빌려 높은 품질을 요구하는 암벽등반 장비의 국산화와 고급화를 시도했다. 등산화의 시제품을 신고 암벽을 직접 타봤는가 하면 주위의 산악동료들에게 나눠줘 평가를 받고 개선을 해나갔다. 이렇게 만든 제품을 ‘트랑고’라는 상표로 국내시장에 내놓자 이내 호평을 얻어 불과 2년반 만에 내수시장의 80%를 확보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도 수출, 지난해 1백만달러의 매출을 기록했고 세계시장에서 그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홍씨가 직업의 벽을 허문 사연은 이러하다. “우리의 과학기술은 미국의 1930년대 수준이다. 일본은 기초과학 부문에선 미국에 훨씬 못 미치고 있지만 생산기술 면에서 상당한 속력으로 미국을 앞서고 있다. 일본이 이렇게 된 데에는 고급 기술인력이 실험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을 기업이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전문인력을 연구소에 몰아넣고 관리직으로 전락시킨다. 상당수의 기업연구소는 정부의 지원금으로 선진국의 핵심부품과 기기를 들여와 조립 수준의 제품을 만들어놓고 자체개발이라고 떠벌리기 일쑤이다. 이런 연구풍토에 어울릴 수 없어 나왔을 뿐이다. 자금이 모아지면 몇년 뒤 그동안 연구하고 싶었던 세라믹 반도체를 개발할 작정이다. 이 분야가 한국의 전자 반도체 산업에 가장 중요한데 오히려 가장 취약하다.”

 한 직장에 근무하면서 창의력을 발휘해 기존의 벽을 서서히 넘는 경우도 있다.

 중학교 졸업에 고교 검정고시 합격이 학력의 전부인 許榮九씨(28)는 언론 환경 분야의 국내 자료 23만건(신문기사 제외)을 전산화한 ‘아라정보서비스’ 대표이다. 인쇄소와 신문보급소를 전전하며 고학을 한 허씨는 83년 우연한 계기로 한국언론연구원에 취업해 이곳에서 발행하는 《신문과 방송》이란 월간지를 판매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 하루에도 몇차례씩 걸려오는 자료출처 문의 전화에 시달리다 이 월간지에 실린 논문과 기사를 제목 필자 주제별로 나누어 색인표를 만들었다. 그는 색인표의 분량이 점차 늘자 도서목록분류법을 공부하면서 외국에서처럼 컴퓨터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 수 없을까 궁리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87년 <데이터베이스산업의 육성연구>라는 논문을 냈고, 정보산업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이즈음 미국에서 경영정보시스템을 공부하고 돌아와 미국 도서관협회의 자료색인을 판매하던 조진무씨(현 대홍기획 대표)를 만나면서 그의 ‘벽넘기’는 빨라졌다.

 그는 7년간의 노력 끝에 60년 이후 한국에서 출간된 17만건의 언론관련 자료를 모두 전산화했다. 그가 한국언론연구원을 나와 자신의 세계를 연 것은 91년이다. ‘아라’라는 상호를 그대 조씨로부터 물려받았다. 이 회사는 개별적으로 주문해오는 정보를 우편 팩시밀리 전화 등을 통해 수수료(보통 분량의 경우 건당 3만원)를 받고 판다. 또 기업이나 단체와 온라인서비스 계약을 맺고 자료를 제공하는데 가입비 88만원에 월 55만원씩 받는다. 이것이 허씨의 주업이다. 물론 부업거리도 더러 있다.

유망 중소기업 택해 승부 걸어볼 만하다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인 朴承浣씨(31)는 84년 11월 대기업을 마다하고 중소기업인 한국코트렐에 입사했다. 당시 초임은 대기업에 비해 낮은 29만원으로 근무조건도 좋지 못했다. 그러나 대기오염방지설비를 만드는 이 회사의 전망이 환경산업이라 밝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사이 회사의 매출액은 10배 가량 급신장했고 최근 대만전력청의 발주 공사에 응찰, 세계  수의 11개 대기업을 누를 정도의 기술과 정보력을 갖춰다. 그는 요즘 관리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박씨는 “아내가 나를 ‘중소기업 몽상가’라고 푸념한 것쯤은 들어넘길 수 있다. 그러나 중소기업에 근무한다고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회의 잘못된 시각은 견디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취업난 속에서도 중소기업의 인력난이 심각한 만큼 유망한 중소기업을 택해 한판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고 권한다.

 서울대 천문학과를 졸업한 뒤 모교에서 박사과정을 밟다가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변신한 黃崙午씨(31)는 요리사 강성부씨만큼이나 전공의 벽을 확실하게 깨부순 경우이다. 그는 ‘까치’ ‘좋은날’ ‘책꽂이’ 등 개인정보처리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판하고 있는 별빛컴퓨팅의 대표이사이다. 황씨가 컴퓨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학부시절. 석사과정 때 전산실 담당 조교로 일하면서 흥미를 가졌다가 박사과정 1년을 마친 직후 천문학을 계속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다 결단을 내린 것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지금 서울 용산 전자상가 한 켠에 매장을 설치해 연간 3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소규모 업체이다. 그렇지만 그의 열정은 대단하다.

취향에 맞는 분야를 선택하라
 발등의 불을 먼저 끄자고 무턱대고 뜻도 없는 직업을 택하는 것만큼 무모한 짓도 없다. 이런 취업은 당사자도 불행하지만 잦은 이직을 낳아 산업의 생산성 향상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리쿠르트》지가 최근 밝힌 자료에 따르면 국내 전체 취업자의 이직률은 2년에 1.3회에 이른다. 조건이 좋지 않더라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분야를 택해 승부를 거는 자세를 취업전문가들은 권한다.

 80년대 명지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李宣明씨(36)는 취직이란 현실 앞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학시절을 취미인 스킨스쿠버로 날려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는 취미를 살리기로 결심하고 수중공사와 수중인양을 전문으로 하는 한 건설회사에 입사, 8년간 근무하다 퇴사했다. 그는 그동안의 노하우를 밑천으로 최소형 무인 잠수함 1대를 도입해 두성해양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는 이 잠수함에 카메라와 비디오 촬영기를 장착하여 수중공사를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는 이른바 감리업을 시작해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발돋움했다.

 한 경제학용어사전은 직업을 이렇게 설명한다. “직업은 개개의 재능을 발휘하여 자기를 실현하는 개인적 측면, 사회구성원으로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는 사회적 측면, 그리고 노동의 대가로 생계를 해결하는 한편 산업의 한 주체가 되는 경제적인 측면이 있다. 이 세가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비중을 달리한다. 오랜 옛날에는 생계의 수단적인 면이 강했으나 점차 사회적 역할이나 지위를 보장하는 면이 부각되어왔다. 그러나 고도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이들 못지 않게 자기실현 과정으로서의 의미가 높아지고 있다.”

 ‘새 흐름’은 별난 젊은이의 엉뚱함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인류문화의 거대한 움직임, 바로 메가트렌드의 한 줄기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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