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외인군단 교포 야쿠자
  • 도쿄·오사카ㆍ정희상 기자 ()
  • 승인 1994.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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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지 르포 ‘한국계 야쿠자의 세계’ / 알짜배기 단원 6천명…최고 두목도 ‘배출’

12월3일 오후 2시. 〈시사저널〉취재반이 머물고 있던 일본 오사카 시 중심부의 한 비즈니스 호텔 앞에 검정색 벤츠 한 대가 멈춰섰다. 차 안에서 검은 양복 차림에 스포츠 머리를 한 건장한 체구의 중년 남자가 내렸다. 그는 취재를 주선한 오사카 교포 소개인과 면식이 있는 듯 반갑게 악수를 나눈 뒤 취재반에게 뒷자석에 타라고 권유했다.

 “야쿠자 세계는 일반인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지금 찾아가는 분 앞에서는 한번 거절한 내용을 두 번 다시 물어서는 안된다.” 소개인이 다짐하던 말을 곰곰이 되새기는 동안 차는 어느새 시내 중심가를 달리고 있었다. 이틀간 오사카 거리 가판대에서 모은 신문과 주간지들은 한결같이 3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야쿠자 총격 사건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었다.

 한국의 12월 초순과는 달리 아직 은행잎이지지 않은 오사카의 가로는 평온했지만 차 안에는 침묵과 긴장이 감돌았다. 30분쯤 달리던 차는 오사카 외곽에 자리한 한 병원 앞에 멈췄다. 엘리베이터는 특실이 있는 10층에서 멎었다. 30대 후반쯤 돼 보이는 건장한 사내 둘이 병실 입구에서 무전기를 들고 지키고 있었다.

 병실로 들어가니 20평쯤 돼 보이는 병실 안쪽에 커다란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 있었다. 소파에는 환자복 위에 방한복을 걸친 노인이 신문을 보고 있었다. 오사카를 중심 무대로 해서 일본 관서지방을 장악하고 있는 최대의 야쿠자 조직 야마구치구미(山口組)의 오사카본부 고문 양동석씨(63·가명)였다.

“법대로 하면 3백년 징역 살아야지”
 “그래 뭘 쓰겠다는 거요?” 자리를 권한 그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대답 대신 미리 준비해간 봉투를 건넸다. 한자와 일본어를 섞어 쓴 ‘재일교포 야쿠자 조직 탐방취재 협조요청서’였다. 안경을 가져오라고 해 죽 읽어 내려가던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서류에 유난히 많이 들어간 ‘민족사’ ‘징용·징병’ ‘재일교포 차별’ 같은 말들이 눈에 거슬린 모양이다. 이윽고 그가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아무 때나 과거 36년을 들먹이는데 이제는 이곳의 객관적 사정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은 교포들에게 해를 입고 자살하는 일본인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서류에 적힌 교포 야쿠자의 역사·현황·전망 따위를 다 취재하려면 줄잡아 여섯 달은 잡아야 할 거라며 고개를 가로젓던 그는, 분위기가 너무 딱딱해졌다고 생각했는지 화제를 바꿨다.

 오사카 야쿠자 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 점잖은 노인은 유려한 화술로 상대를 빨아들이는 재주를 가진 듯했다. 그의 얘기는 자신의 야쿠자 활동이 법대로 처벌받았다면 약 3백년 형은 되었으리라는 것과, 야쿠자 세계의 의리, 오야붕(두목)의 길을 걷는 자기의 인생관 등으로 한참 이어졌다. 그러다 기자에 대한 일장 훈시로 바뀌었다. “부모라면 자식이 야쿠자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할 것이다. 이 세계는 그런 곳이므로 나쁜 걸 나쁘다고 쓸 줄 알아야 진짜 기자다.”

 두 시간 가까운 장광설을 끝낸 그는 밖에서 대기하던 50대 초반 신사를 불렀다. 그 신사는 오사카 중심 구역을 관장하는 조장이었는데,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일본말로 대화를 나눴다. 알고보니 취재 안내 지시였다.

 양동석씨는, 자기는 입원중이기 때문에 직접나서거나 오랫동안 얘기할 수 없고, 대신 교포 야쿠자의 역사를 잘 아는 야미구치구미의 다른 교포 고문을 만나게 해주겠으며, 오사카 일대 교포 야쿠자와 야쿠자 사업 실태 등은 부하들을 시켜 현지 안내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자기와는 다음날 따로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병실을 나선 취재반은 양고문의 지시를 받은 오사카 미나미 지역 조장(한국의 조직 폭력 세계에 비교하면 명동지역 중간 두목)의 차에 올라 시내 중심가인 미나미 거리로 향했다. 운전자를 포함한 2명의 일본인 고붕(부하)이 조장을 수행했다. 조장은 차내에서 명함을 건넸다. 한 건설회사 대표 취체역이라는 직책 옆에 일본 이름이 적혀 있었다. 교포 3세인 그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라 동행한 재일교포 소개인의 통역이 필요했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평양인데 일제 때 광산 노무자로 건너와 일본인 할머니와의 사이에 부친이 태어났고, 부친 역시 일본 여인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교포 출신 야쿠자인 양고문을 오야붕으로 모시면서 한국 여인과 결혼했으며, 처가가 경기도 이천이라 1년에 한번 정도는 한국에 다녀온다고 했다.

양동석 고문 “한국 정객 많이 만났다”
 일행은 미나미 거리에 지천으로 있는 야쿠자의 사업 실태를 둘러보기 위해 나섰다. 자세히 보니 거리를 휘황찬란하게 물들인 주요 업소는 모두 파친코나 슬롯 머신 등 도박업소였다. 안내한 야쿠자 두목들이 한 파친고 업소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나비 넥타이 차림으로 지키고 있던 젊은이들이 우루루 몰려와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절했다. 조직의 행동대원들이었다.

 이들은 연신 ‘하이! 하이!’를 되풀이하더니 기자를 데리고 업소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이 손에 껌처럼 생긴 물건들을 들고 밀폐된 벽 속의 조그만 창구에 집어넣자 거기서 몇만엔씩 돈이 나왔다. 야쿠자의 사업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에서는 법적으로 도박을 허용하지만 딸 경우 현금이 아니라 경품으로만 지급하게 돼 있는데, 도박장에서는 껌 같은 물건을 준 뒤 야쿠자들이 뒤에서 돈으로 바꿔준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운영하여 한 도박업소에서 하루에 벌어들이는 돈은 약 5백만엔(한화 약 4천만원)에 이른다고 했다. 상당수는 야쿠자 조직이 직접 운영하지만 일부는 일반인이 운영하기도 한다. 일반인이 운영하는 업소는 영업보호금으로 매출액의 20%를 야쿠자 조직에 상납한다.

 미나미 거리는 이권을 둘러싼 야쿠자 세력 다툼의 진원지이다. 현재 이 지역의 각종 유흥업소와 기업체 사무실은 야마구치구미가 확고히 장악하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불법 체류하는 한국여성이 많이 술집에서 일하는데, 한국 여성만 15~20명씩 거느린 클럽이 백여 개나 늘어서 있다. 이들 한국 여성의 출입·관리를 담당하는 사람 역시 야쿠자들이다.

 밤 11시께, 조장은 중간 두목 2명만 남기고 나머지 고붕들을 돌려보낸 뒤 취재반을 안내해 한국 여성 클럽으로 데리고 갔다. 자기들 세계의 호탕함과 멋있음을 과시하려는 듯 자기네가 관리하는 업소인데도 술 한잔씩 돌리는 값으로 20만엔(약 1백60만원)을 마담에게 지불했다. 그곳은 한국인 쇼걸과 호스테스를 20명 확보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부산·광주 등지에서 프로덕션(야쿠자와 결합한 이른바 연예인 송출업체) 소개로 왔다고 했다. 야쿠자 조장은 이들에게 사초상(사장님)으로 불렸다. 한 호스테스는 “손님들이 한국처럼 술집에서 일한다고 천대하지 않고 전문 직업인으로 인격을 존중해줘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산에서 왔다는 다른 호스테스는 “빚이 없으면 왜 여기까지 굴러왔겠느냐”며 말못할 사연이 있음을 암시했다. 모두 6개월 비자로 들어왔는데 사초상이 해결해줘 짧게는 2년 길게는 8년씩 일한다고 했다. 이들에게 야쿠자는 주요 고객이자 상납 대상(기둥서방)이었다.

 이튿날 병실을 찾았다. 양동석씨는 얼굴이 몹시 수척해 보였다. “나를 찾아오는 한국 정객들과는 많이 어울려 봤지만 기자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교포 야쿠자 실태와 역사를 취재한다니까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밤새 뒤척였다. 무척 골치가 아프다.” 그래서 인터뷰는 그의 머리맡에서 진행되었다(54~55쪽 참조).

 인터뷰 말미에 야쿠자 세계의 백전노장이라는 그도 나이 탓인지 약한 말을 했다. “이제는 젋었을 때와 달리 감옥살이도 견디기가 힘들다. 그러나 죽더라도 뱃속에 있는 기와 협심은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취재반을 떠나보내면서 그는 부인이 집에서 가져온 야쿠자 관련 책자와 지침서 등 다섯 권을 건네줬다.

 양고문이 소개한 야마구치구미의 또 다른 교포 고문과의 만남은 12월5일 저녁에 이루어졌다. 오사카의 3대 호텔 중 하나인 닛코호텔 14층의 전망 좋은 방으로 안내된 취재반은 다부진 체구에 강인한 인상을 주는 한 노신사와 마주했다. 그도 고붕(오사카 시내 지역조장) 3명을 대동했다. 올해 57세로 나카야마라는 이름을 가진 이 교포는 “○○상이 특별히 부탁해서 골프 약속도 취소하고 나왔지만 한국 언론이 왜 이 세계에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다”며 자리를 권했다. 그는 자기가 맡고 있는 역할부터 말했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경쟁하는 기업들끼리도 고위층은 서로 만나고 의견을 교환하듯이 야쿠자 세계도 마찬가지다. 밑에서 신체 상하고 목숨 버리는 싸움이 생기기 전에 원로끼리 만나서 타협을 본다. 내가 하는 일도 그런 것이다.”

 그는 이어 교포들이 야쿠자에 세력을 심게 된 배경과 역사를 설명해 나갔다.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 일본에는 징용·징병으로 끌려온 교포가 3백만명이나 되었다. 그 중 2백여 만명은 귀국하고 약 60만명이 일본이 눌러앉아 전후 재일교포 사회가 형성됐다. 미군이 점령한 일본에는 한동안 경찰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였다. 교포들은 미군정 치하에서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을 터뜨리면서 한편으로는 미군의 정보요원이 되어 일본의 주요 암시장을 독점하면서 번창했다.

‘살인 조직’ 이끈 교포 야쿠자 1세대
 도쿄에서는 정건영씨(마치이 히사유키)가 야쿠자 조직 동성회(東聲會)를 결성해 긴자 지역 이권을 장악해 들어갔다. 오사카에서는 강○○씨(고야무 고로)가 구렌다이(깡패) 조직 명우회(明友會)를 결성해 미나미 거리를 장악했다. 도쿄의 동성회는 점점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면서 확대되었지만 오사카의 명우회는 비극을 맞게된다. 고베 시를 본부로 세력을 확장하던 야마구치구미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전투에는 양원석씨가 이끌던 교포 출신 야쿠자 조직 야나가와구미(柳川組)가 앞장섰다. 정예화한 교포 야쿠자 조직이 앞장서서 같은 교포 출신 구렌다이 조직을 궤멸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일본 야쿠자 역사상 가장 의미있는 투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야무구치구미가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을 제패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교포 야쿠자 초대 조직으로 도쿄의 동성회와 오사카의 야나가와구미가 꼽힌다. 특히 오사카의 야나가와구미에는 초대 조장 양원석, 2대 조장 강동화 씨를 중심으로 교포가 많이 끼여 있었다. 이들은 ‘공포의 살인군단’이라 불리며 야마구치구미가 전국을 제패하는 데 선봉으로 활약했다. 현재 야마구치구미의 5대 총두목의 직계 간부 1백20여 명 중에는 이 조직 출신 교포가 20여 명 있다.

 교포 야쿠자들은 이후 일본과 한국 정부의 극우 인사들과 긴밀하게 접촉하며 경호원 제공, 이권사업 참여, 조총련 파괴 공작을 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교포 사회가 민단과 조총련으로 갈라지자 이들은 민단의 행동부대를 맡아 조총련 본부·지부 사무실과 행사장을 수없이 습격했다.

 교포 야쿠자들이 한국 정부와 긴밀한 관련을 맺게 된 계기는 65년 한·일 회담이었다. 당시 한국측 정계 인사 경호는 공항에서부터 한국계 야쿠자가 맡았다. 도쿄는 동성회가, 오사카는 야나가와구미가 중심이 돼 수백명의 경호원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한국에 진출해 정계 인사들과 친분을 과시하는가 하면, 조직원들이 일본 경찰에 수배될 때 한국으로 도피할 여건도 마련했다.

한국 정보기관, 야쿠자 정보원으로 활용
 특히 일본 야쿠자 세계에서 간부급에 오른 교포 야쿠자들은 일본 정·재계 실력자와도 교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고급 정보를 노리는 한국 정보기관은 이들에 꽤 의존했다. 그밖에도 축구·탁구 등 국제 경기가 일본에서 열릴 때면 한국측 대표단은 교포 야쿠자들에게 재정적으로 신세지는 일이 많았다. 이 과정을 거쳐 한국 정부로부터 이들 교포 야쿠자에게 국내 유흥업소·도박장·호텔업 진출이라는 반대급부가 주어졌다. 이같은 반대급부 배분을 둘러싸고 도쿄와 오사카 교포 야쿠자들 사이에는 아직까지 깊은 감정의 골이 팬 것으로 확인된다. 교포 야쿠자의 역사를 설명하던 야마구치구미 고문 나카야마씨는 이 대목에서 언성을 높였다.

 “한·일 국교 정상화 때 대표단과 교포 야쿠자 간부들에게 뒷돈이 5억엔 생겼다. 오사카 쪽은 그때 한푼도 안받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국 정치가들은 다 땅 샀고, 동성회 간부들도 그 돈을 나눠 썼다. 동성회는 그밖에도 나리타 비행장 건설 사실을 일본 정계의 배후 거물 고다마 요시오를 통해 사전에 알고 땅을 사 큰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서울에 유흥장(비밀 요정)도 세우고 도쿄에 TSK-CCC라는 호화 사교클럽을 열었다. 박대통령이 정건영씨에게 훈장도 주었다.”

 이 말의 진위를 가리려면 상대방의 말도 들어보아야 했다. 며칠 뒤 취재반이 도쿄에 가 당시 동성회 활동에 관여했던 한 교포 원로를 만나서 이 사실을 확인했을 때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마치이상(정건영씨)이 한·일 국교 정상화를 도운 대가로 박대통령에게 훈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게 무엇이 문제인가. 오사카 쪽(양원석씨)도 전두환 대통령에게 체육훈장을 받지 않았는가. 그리고 나리타 공항 부지 사건도 사실과 다르다. 정확하게는 75년에 도타류 촌이 소유한 공유지 3만8천평을 일본 정부로부터 정치적으로 불하받았다. 뜻있는 교포들 가운데는 민단(당시 권 일 단장) 사옥을 짓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마치이상이 처남 명의로 등기를 낸 뒤 고다마 요시오에게 부탁해 3억엔 넘게 받고 일본 회사에 팔았다. 이 돈으로 박대통령과 한국 체육계를 도와주었다.TSK-CCC 사교클럽은 박대통령이 한국외환은행을 시켜 반대급부로 정치적 융자 1억달러(당시 3백60억원)를 마치이상에게 준 것으로 지었는데, 77년에 고다마 요시오가 스캔들로 몰락하는 바람에 부도가 난 것이다.” 동성회측은 아직도 이 돈을 외환은행에 갚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교포 1,2세 중 야쿠자 조직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은 오욕으로 얼룩진 한·일 관계 속에서 영욕의 세월을 보내온 것으로 확인된다. 야쿠자 세계에서 그들의 맹활약은 일본 경찰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교포 야쿠자 초대 조직 동성회와 야나가와구미는 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둔 일본 경찰의 정상작전(우두머리 체포 작전)으로 두목들이 체포돼 감옥에서 ‘조직 해산 선언’을 하고 풀려났다. 그뒤 동성회는 우익 야쿠자 단체 동아우애사업조합(이사장 오키타 모리히로)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직원 수는 1천2백여 명이다. 야나가와구미 역시 양원석씨가 해산 선언을 해 휘하 간부와 조직원이 4개 파로 나뉘었다가 최근에는 야무구치구미 본부·오사카 지부에 모두 흡수됐다.

교포가 총두목이 되기 어려운 까닭
 현재의 교포 야쿠자 가운데 큰 조직을 이끌며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인물은 교토를 무대로 활동하는 아이즈고 데쓰가이(會津小鐵會)의 회장 다카야마 도쿠타로(65·한국명 강외수)이다. 다카야마에 대한 평가는 오사카의 야마구치구미쪽이든 도쿄의 동아우애사업조합측이든 모두가 호의적이었다. 경상도가 고향인 그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 야쿠자로 일본 정·재계 인사들에게도 신망이 높다는 것이다. 교포를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하지만 반드시 교포들 모르게 한다는 것과, 야쿠자로서 한국에 정식으로 투자한 사람도 그뿐이라는 것이 공통된 찬사였다.

 그러나 다카야마씨도 최근에는 곤경에 처해있다. 그가 이끄는 아이즈고 데쓰가이가 92년 3월 일본 경찰에 의해 일본 7대 광역 지정 폭력단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 것이다.

 오사카·교토 등 관서지역에 교포 야쿠자가 밀집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쿄에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자리잡고 있다. 12월7일 취재반은 도쿄 증권가 긴자 지역의 한 증권회사 사무실에서 일본 제2의 야쿠자 조직인 이나가와가이(稻川會)의 상담역 이준구씨(가명)를 만났다. 관서 지방 야쿠자 세계의 삼엄한 공기와는 달리 도쿄 쪽은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였다. 최근 총격사건이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야마구치구미측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올해 75세인 이씨는 경기도 평택이 고향으로, 일제 때 일본에 건너와 정착한 교포 1세이다. 이나가와가이를 경제 야쿠자의 효시라고 분석한 일본 경찰의 시각을 대변하듯이, 그는 기업체 회장풍 차림에 말투도 전혀 야쿠자 같지 않았다.

 “일본에는 교포가 90만명 있다. 그 중 오사카에 30만명, 도쿄에 12만명이 산다. 일본 야쿠자는 알짜배기만 6만이다. 그 중에서 교포는 약 10%, 6천명으로 보면 된다. 그러나 중간 두목급은 많아도 최고 두목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 법률 때문이다. 외국계는 법에 걸릴 경우 7년 이상 형을 받으면 복역 후 추방하게 되어 있다. 야쿠자 세계에서 한국계가 앞장서 나가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만한 사건을 저지른 교포들은 사전에 한국으로 밀항해 버린다. 부산에는 그렇게 도망간 교포 야쿠자가 많이 있다.”

 그는 이어 교포 1,2세 중에 야쿠자 간부까지 오른 사람은 대개 교육을 받았으며, 그들은 거의가 조국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비록 야쿠자 세계에서 커왔지만 연로한 데다 현재 합법 사업(증권업)을 맡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무식한 야쿠자 두목으로 보지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야쿠자 사무실을 직접 탐방하고 싶다는 요청에 그는 “요즘 사무실은 경찰도 못들어간다”라며 난색을 표했다. 야쿠자 두목과 만날 때는 거절하는 사안을 두번 다시 꺼내지 말아야 한다는 소개인의 충고가 떠올라 포기하고 어두워지는 신주쿠 거리로 나섰다.

해마다 제주도에서 망년회
 도쿄 최고의 환락가로 오사카 미나미 거리에 견줄 수 있는 신주쿠는 경제 야쿠자화한 도쿄의 주요 조직이 아직도 고전적인 수법으로 이권을 행사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즐비한 파친고·슬롯 머신 업소며 한국 여성 클럽들, 드문드문 한글로 씌어 있는 송금 안내판 들이 신주쿠의 색깔을 잘 보여주었다.

 신주쿠 중심가 삼거리에서 갑자기 인파가 흩어졌다. 다가가 보니 워키토키를 든 전형적인 야쿠자풍(건장한 체격, 짧은 머리, 검은 정장) 사내들이 약 5m 간격으로 서 있고, 그 가운데 고급 외제 승용차 7대가 늘어서 있었다. 야쿠자 두목급들이 30여 명의 경호원과 뒤섞여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야쿠자 망년회였다. 이들이 사람들을 쫓아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피해 거리가 삽시간에 야쿠자 무대로 변한 것이다. 평범한 시민의 눈으로는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12월7일 밤 늦게 취재반의 숙소에 전화 벨이 울렸다. 뜻밖에도 낮에 헤어졌던 이나가와가이의 교포 상담역 이준구씨였다.

 “정기자, 내일 세시까지 차를 보낼 테니 야쿠자 사무실에 다녀오시오. 다 조처해 뒀으니까 카메라도 가져가 사진을 찍도록 해요.”

 뜻밖이었다. 아마 오사카에서 만난 야마구치구미 교포 고문들이 전화했기 때문인 듯싶었다. 그들은 오사카 공기가 험악하니 야쿠자 사무실 방문은 도쿄에서 하라며 취재반이 도쿄에서 만날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튿날 오후 3시에 차를 몰로 온 사람은 이나가와가이의 도쿄 아카사카 지역 두목이었다. 교포 3세인 그는 좀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 어젯밤 신주쿠 거리의 야쿠자 망년회 목격담을 꺼냈더니 그는 “그 정도 규모라면 여러 조직이 단합 대회를 한 것이다. 우리는 매년 제주도에 가서 망년회를 한다”라고 말했다. 올해도 부산이나 제주도에 갈 계획이라고 한다.

 차는 아카사카-록폰기도리-센조쿠 3가를 거쳐 출발한 지 한 시간 만에 아사쿠사 지역에 도착했다. 이곳은 도쿄의 각 야쿠자 조직 사무실이 밀집한 지역이라고 한다. 주택가처럼 보이는 대로가 끝나는 곳에 있는 야쿠자 사무실은 외벽이 밤색으로 칠해진 2층 건물이었다. 입구에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고, 육중한 철제 대문이 달려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조장(두목)이 소파에서 일어나 일행을 맞이했다.

 약 20평 크기의 사무실 벽에는 연등 모양 장식이며 신전, 역대 두목들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조직을 상징하는 금간판 외에도 다른 조직 두목들이 보낸 각종 금박 액자에 야쿠자가 자기네 정신이라고 내세우는 ‘仁儀道’ ‘儀’ 등이 쓰인 장식도 눈에 띄었다.

 자신을 사이토라고 소개한 두목은 “이 사무실에서는 금하는 게 많다. 질문은 뭐든지 좋지만 사진은 허락하는 곳만 찍어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촬영을 금하는 것은 역대 두목들 초상화와 다른 구미(組) 두목들이 보내온 이름 적힌 선물들이었다. 특히 사무실 한켠 벽에 붙여둔 엽서들에 대해서는 절대 글씨가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양해를 구해 그 엽서들을 살펴 보니 파문장(破門狀)·절연장(絶緣狀) 들이었다. 이 엽서는 야쿠자 세계에서 이단자에게 내리는 일종의 ‘사형 선고’통지로, 일본 전역의 모든 야쿠자 사무실에 전달되어 부착된다고 한다. 파문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좌(左)의 자들은 인협도를 반하여 일가문의 협의 결과 ○년 ○월○일 파문을 결정했습니다. 이에 당 본부장(또는 조장)이 명하는 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연조(緣組) 객분(客分) 교류 상담 사용 등을 일절 허용치 않기 바랍니다.’ 대략 2백명은 됨 직한 파문자 명단이 붙어 있었다.

신세대 야쿠자 때문에 전통 ‘흔들’
 사이토 조장은 자기가 운영하는 야쿠자 사무실 실정을 비교적 소상히 들려주었다. 현재 조원이 30명인데 이들은 2층 생활관에서 숙식하며, 주간조와 야간조로 나뉘어 활동한다. 주간조는 아침에 나가 술집 외상값을 완력으로 받아낸다든지 경마 암표, 부동산 거래 때 가격 조작(협박), 기업체 상대 수금, 각종 민사 사건 해결사 따위 일을 한다. 야간조는 도박업소·클럽 등 유흥가를 무대로 활동한다. 다들 결혼은 했는데 부인들은 술집에서 호스테스로 일하는 한국 여성이 많다. 만약 사무실에 위급한 일이 닥쳤을 때는 비상 연락망이 짜여 있어 순식간에 조원들을 모을 수 있다.

 사이토 조장은, 과거에 견주어 신세대 야쿠자는 의식을 생략한 채 받아들여 전통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자기가 야쿠자 세계에 발을 디뎠을 때는 청소와 걸레질만 1년을 해야 전화라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는데 지금은 그런 관례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취재반을 배웅하며 말했다. “한국에서 내가 유명해지지 않도록 해주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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