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다른 가족들의 별난 이야기
  • 박찬욱 (영화 감독) ()
  • 승인 1994.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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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킹〉〈독신녀 에리카〉〈사랑의 행로〉〈죽음의 키스〉등

해마다 연말 연시면 ‘가족’이 이슈다. 가족 없는 사람이 더 외로워지는 것도 이 무렵이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가정에 사랑이 부족해서라기보다 가족 이기주의 때문에 큰일이다. 과연 행복한 가정이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지고의 가치인가. 연례 행사 같은 ‘가족을 위한’ 영화 대신 ‘가족에 관한’ 영화 10편을 골라 보았다. 많이 알려진 작품은 제외했으며, 다양한 성향을 포괄하고자 애썼다. 필자 몫은 정보 제공이고, 성찰은 독자 몫이다.

딱한 가족 이야기 〈허공의 질주〉
 〈허공의 질주〉는, 말하자면 한국의 컬트다. 미국에서는 별로 눈길을 끌지 못했는데 여기에 와서 열광적인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우리의 과거를 생각게 한다. 학생 운동을 하다 쫓기게 된 부부가 갖은 고생을 하는 이야기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 사람들은 한번의 테러 행위 때문에 17년을 도망다녀야 한다. 그 사이 두 아들이 생겼고, 그 중 맏이는 반항하는 사춘기이다. 늘 옮겨다니느라 친구도 못 사귀고 소원인 음악 학교 진학도 어려우므로 그는 부모가 원망스럽다. 하지만 그런 부모의 심정은 오죽하랴. 우리에게 80년대가 그렇듯, 적어도 이 가족과 FBI에게 월남전은 아직 살아 있다. 영화가 이쯤은 되어야 ‘절제된 감정과 승화된 사회 의식’ 따위 비평적 수사가 그럴 듯하게 들린다.

 처절하리만큼 딱한 가족은 얼마든지 더 있다. 〈리틀 킹〉이 다룬 가정 문제는 가난이다. 경제야말로 가장 근본적으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영역이라는 사실, 미국 영화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이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리틀 킹〉에는 대공항기 남부를 배경으로 한 소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돈이 없어서 네 식구는 뿔뿔이 흩어지고, 오래 굶은 주인공은 요리 잡지의 사진을 오려 접시 위에 놓고 칼질을 한 다음 입으로 가져간다. 구두를 삶아 먹었던 채플린의 후예인가. 한때 부르주아였지만 이제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기 직전에 처한 가족을 통해 감독은 요즘 미국인들에게 어떤 충고를 하는 것 같다. 미국판 ‘그때를 아십니까’인 셈이다.

 반대로 〈독신녀 에리카〉네 집은 외견상 멀쩡하다. 일자리와 돈이 넉넉했던 시절 미국인 문제는 황폐해진 마음이었던 모양이다. 70년대의 공황은 정신적인 것이다.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편이 갑자기 바람이 나 떠나간다. 버려진 여자에게 모든 인간 관계는 지옥이다. 16년 동안 한 남자와만 섹스를 해왔던 그녀는, 이제 사랑 없는 섹스가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하다. 그녀가 실습한 두번째 파트너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버림받았다는 감정은 극복되지만 번민은 여전히 남는다. 또 다른 남자에게 억압받을 것인가, 고독한 독립을 유지할 것인가. 여기엔 개그도 눈물도 없지만 ‘솔직한 생활’이 있다. 위선적인 용서의 몸짓과 타협적인 해피엔딩 대신 ‘현실’에 대한 충실한 묘사가 거둔 영화적 승리.

 기왕 내친 걸음에 좀더, 아니 끝까지 나아간다면 〈사랑의 행로〉에 이른다. 아마도 이렇듯 사람을 뼛속까지 고독하게 만드는 영화는 다시 없으리라. 사랑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는 오빠와, 깨어진 사랑에까지 집착하는 누이. 정반대로 보이지만 둘 다 고독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나 보려고 애쓰는 작가와 타락해 보려고 노력하는 이혼녀 남매의 동거는, 둘이 아무리 근친상간에 가까운 사랑을 나누는 사이라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줄거리라고 할 만한 내용도 없고 재미난 사건도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유럽의 어떤 대가도 무색케 하는 진지함으로 가득 차 있는 영화이다. 단 한마디의 훈계도 없이, 정상을 벗어난 사람들의 부도덕적인 행각을 묘사한 것만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교훈극.

부자간 대립 다룬 〈비오는 날의 수채화〉
 오누이끼리의 비정상적인 애정 관계라면 한국에도 있다. 비평 대상으로 삼을 만한 영화가 흔치 않은 나라에서, 〈비오는 날의 수채화〉처럼 많은 팬을 거느린 영화가 이렇다 할 평문 하나 얻어 가지지 못한 현실은 좀 이상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듯 이것은 유치한 사랑 놀음을 다룬 영화가 아니다. 감독의 관심은 가족 관계에 있다. 엄격한 가부장제에서의 성적 억압은 기독교의 윤리와 연관되고, 근친상간 금지라는 인류 최초·최고의 터부가 해부된다. 이 금지가 단순히 병리학적 이유에서 온 것이라면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법적 남매에게까지 적용될 필요는 없을 터이니, 근원은 역시 체제 유지라는 목적에 있다. 연애담보다 부자 간의 대립을 중심으로 다시 본다면 수려한 영상에 숨겨진 뜻이 드러날 것이다.

 아버지로서 최악은 단연 〈스텝파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첫 장면은 이미 처자식을 몰살하고 난 그의 모습이다. 이 인간은 아이 딸린 과부와 결혼한 다음, 잠시 행복하게 살다가 모조리 학살하고는 새로운 제물을 찾아 떠난다. 히치콕에서 영향받은 일련의 사이코 스릴러 중 하나지만, 싸구려로 보았다가는 큰코 다칠 수 있다. 무작정 잔인한 그림만을 나열해 관객을 괴롭히는 삼류가 아니다. 미국 일류의 비평가 피터 트레비스가 생애 최악의(즉 최고의) 무서운 영화 10편 중 하나로 골랐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 여기서 제기되는 것은 ‘행복한 가정’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이다. 완벽한 가정을 찾아 헤매는 이 연쇄 살인범을 우리는 증오해야 할 것인가, 동정해야 할 것인가.

최고로 무서운 영화 〈공포의 묘지〉
 이렇듯 공포 장르가 가족을 소재로 하는 일은 흔하다.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있지만 가장 쉽게 말하자면, ‘우리 식구’가 괴물일 때 사람은 가장 놀라지 않겠는가. 상상해 보라. 세 살배기 내 아들이 피에 굶주린 살인마라면….〈공포의 묘지〉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진다.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전설로 전해오는 인디언 묘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거기 묻으면 환생한다는. 그러나 누구나 거기에 사랑하는 이를 맡기지 않는 이유는 악마로 환생하기 때문이다. 결국 아기는 다시 나타나 살인극을 벌이는데, 이때 아기가 에미 애비도 몰라봄은 물론이다. 인간성 가장 취약한 부분을 노리는, 이 장르의 특성을 잘 드러낸 한 전범이다. 필자에게 최악의 무서운 영화를 고르라면 꼭 넣을 이것은, 스티븐 킹 소설이 원작이다.

 같은 공포 영화라도 〈죽음의 키스〉가 가족을 다루는 방식은 좀 특이하다. 흡혈귀가 가족 단위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 원해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들이 아니다. 습격 당해 피를 빨림으로써 강제로 흡혈의 식성을 따르게 되었으니, 사실 이들은 피해자인 셈이다. 피를 빨고 빨린 인연의 사슬로 이어진 족보. 합법적인 성교와 출산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가정은 아니어도, 어쨌든 피를 나눈 것은 사실이므로 이 경우에도 혈연은 혈연인가. 이 집안의 비극은, 원치 않으면서도 또 누군가를 습격해야 연명할 수 있다는 운명에 있다. 흡혈은 미워하되 흡혈귀는 미워하지 말라? 이들은 실수로 잘못 수혈한 에이즈 환자 같다. 히피 공동체로서의 흡혈귀 일가가 등장하는 진보적 공포 서부극이다.


에미상 수상한 걸작 〈악몽〉
 이제 내면화한 괴물이 등장할 시간이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자기가 한 일은 기억나지 않는 경험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다중인격증후군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이 환자들은 하나같이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호소한다. 사이빌도 그랬다. 실존했던 그녀의 이야기 〈악몽〉에는 두 종류의 가족이 등장한다. 유아기에 정신외상을 입혔던 마음 바깥의 진짜 가족, 그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 그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마음 안쪽의 가짜 가족. 사이빌은 이중 인격자였던 것이다. 이 영화는 그의 치료 과정, 즉 산산이 부서진 인격들을 하나로 통합해 나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환자의 투쟁도 눈물겹지만 정신분석 의사의 정성도 갸륵하다. 에미상을 받은 텔레비전 영화의 걸작.

 사이코와 좀비는 이제 그만! 가족 이야기답게 따뜻한 결말을! 키에실로프스키가 텔레비전용으로 만든 10부작 〈십계〉는, 그 중 2편만을 극장용으로 재편집되었다고 해서 나머지를 졸작으로 보면 곤란한 걸작 시리즈이다. 거기서도 제3부 〈주일을 거룩히 보내라〉편은 특히 감동적이다. 밤중에 갑자기 찾아온 옛 여인.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녀를 만나러 나가는 택시 운전수. 실종된 남편을 찾아달라는 옛 애인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애쓰면서 하룻밤이 지난다.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어도,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살아나서 고통스러워도, 희한하게도 영화는 해피 엔딩하고야 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 밤이 크리스마스 이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도 이렇게 외쳐볼 만하지 않을까. 고독한 자들을 향해, 메리 크리스마스!     ■
朴贊郁 (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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