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신통력 탁월한 ‘영물’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5.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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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설화ㆍ신화속 돼지 / “왕비 점지, 도읍지 안내”… 동서양 모두 ‘豚=돈’



 30대 후반이 넘은 사람 중에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는 돼지 오줌통을 차고 논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집안 잔치든, 동네 잔치든, 마을굿이 벌어지든 으레 돼지를 잡았기 때문이다. 농사의 대들보였던 소는 법으로 잡는 것을 금했으므로 큰 잔치나 마을굿판은 돼지를 잡는 일은 언제나 사람들 마음을 들뜨게 했다.

 95년 을해년(乙亥年)은 또다시 마음을 들뜨게 한다. 정초가 되면 사람들은 올해가 무슨 띠의 해이며, 그 해의 수호 동물인 12지의 띠 동물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를 찾아 새해 운수를 알아보려 한다. 더구나 95년은 풍요와 비옥함을 상징하는 돼지해여서 각별한 기대를 갖기도

한다. 올해 아이를 낳아 돼지띠를 갖게 하겠다든가 하는 새해 설계가 여느 해와 달리 많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2천년 전부터 사육
 돼지가 복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와 지금도 민간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고사상의 돼지 대가리에서부터 아이들의 저금통에 이르기까지 돼지는 한국 사람들의 심성에 부와 풍요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꿈속에서도 돼지는 용과 더불어 최고의 길조로 여겨진다. 돼지꿈이 재물을 가져다 준다고 굳게믿기 때문이다.

 지난 12월16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학술강연회에서 千鎭基씨(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한국 문화에 나타난 돼지의 상징성 연구’를 발표했다. 이 발표문에 따르면, 석기시대 유적지인 평남 검은모루 동굴에서 멧돼지 화석이, 경남 김해ㆍ양산 등의 조개더미에서 멧돼지 이빨과 뼈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돼지의 조상격인 멧돼지가 한반도 전역에 자생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읍루’조에 ‘(그곳 사람들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며 그 고기를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철에는 돼지 기름을 몸에 바른다’ 라고 한 기록을 보면, 돼지는 이 땅에서 2천년 전부터 사육되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천씨는, 한국 신화에 등장하는 돼지가 신에게 바치는 제물임과 동시에 나라의 도읍을 정해주고, 왕에게 자식이 없을 때 왕자를 낳을 왕비를 알려주어 대를 잇게 하는 신통력 있는 동물로 전해지고 있다고 소개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편을 보면, 유리왕 19년(서기 전 1년)에는 ‘제천(祭天)할 돼지를 손상했다’는 이유로 왕이 두 신하를 죽일 정도로 돼지를 신성하게 여겼다. 유리왕 21년에는 달아나는 교시(郊豕)를 뒤쫓다가 국내위나암이라는 곳에 이르러 산수가 험함을 보고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도 있다. 돼지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나올 터를 일러주기도 하고, 아들이 없어 고심하던 고구려 산상왕에게는 왕자를 낳을 처녀를 점지해 주기도 했다. 이 설화에 따르면, 산상왕 12년 하늘 제사에 쓸 교시가 달아났다. 이 일을 맡은 사람이 좀처럼 잡을 수가 없었으나 한 처녀가 나서서 돼지를 붙잡았다. 왕은 이 사실을 이상하게 여겨 밤에 미복을 하고 처녀의 집에 찾아가 관계한 뒤 아들을 얻었다. 교시의 인연으로 남았다 하여 아들 이름을 교체라 하였는데, 이 아들이 나중에 동천왕이 되었다.

소ㆍ닭보다 깨끗한 동물
 돼지가 복이나 재산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곳은 한국만이 아니다. 서양에서도 저금통을 ‘돼지 은행(Pig Bank)’이라 부른다. 鄭領哲 박사(P&C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세계에서 돈이 가장 많은 곳인 미국 뉴욕의 금융가 월스트리트도 돼지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 돼지가 옥수수밭을 너무 망가뜨려서 담(wall)을 세웠는데 그것이 월스트리트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돈(豚)’이라는 한자음을 지닌 돼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돈’ 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돼지는 한국 속담에서는 복을 가져다 주는 동물과 반대되는 뜻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돼지 같은 욕심’ ‘똥 묻은 돼지가 겨 묻은 돼지를 나무란다’와 같은 속담은 탐욕스러움과 어리석음을 뜻한다. ‘돼지는 우리가 더러운 줄 모른다’ 같은 속담에서 돼지는 더러움의 대명사로 그려지지만, 사실 돼지는 닭이나 소와 비교하면 훨씬 깨끗한 동물이다. 돼지우리 주변이 항상 습기가 차고 더러운 것은 땀샘이 발달하지 못해 체내의 모든 수분을 오줌으로 배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돼지에게 화장실을 만들어주면 잠자리와 화장실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후각이 특히 발달해 잠자리와 똥 눌 자리를 냄새로 정확하게 알아본다.

 돼지고기 유통 회사인 (주)도드람유통 李範浩사장에 따르면, 돼지는 그 뛰어난 후각 때문에 자기 새끼를 물어죽이는 경우도 있다. 낮선 사람이나 개가 분만 우리에 들어오면 새끼를 빼앗길까 봐 아예 새끼를 물어죽인다는 것이다.

 돼지의 세계에도 서열은 있다. 스무 마리를 한 우리에 집어넣으면 하루 종일 서로 싸움을 벌여 사료 먹는 순서를 정한다. 그러나 스무 마리 이상을 집어넣으면 기억력이 부족해 몇날 며칠을 싸운다. 돼지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돼지 고기를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설이다. 그러나 학자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세계에서 평균 수명이 가장 길다고 알려진 일본 오키나와 지방 사람들이 장수하는 비결은 돼지고기를 상식하는 데 있다고 한다.

 돼지의 해, <시사저널> 독자 여러분 돼지 꿈 많이 꾸시길… ■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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