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교육방송 날개는 ‘公社化’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5.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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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식 ‘칠판 방송’끝내야…관련부처 ‘복지부동’ 문제

서울 서초구 우면동 한국교육개발원에 들어서면 주차장 한 귀퉁이에 2단으로 쌓여 있는 컨테이너들이 보인다. 창고로나 쓸 법한 이 컨테이너에는 안테나가 달려 있고, 많은 사람이 수시로 드나든다. 이곳에 교육방송(EBS)의 60여 직원이 일하는 송출부·영상부·중계부가 들어서 있다는 사실은, 교육방송이 처한 오늘의 현실을 무엇보다도 잘 대변한다. 컨테이너 안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근무 여건도 불편하지만 이곳에 쌓여 있는 방송 기자재들이 못쓰게 될까 봐 전전긍긍한다.

 지난해 12월27~30일 개국 4주년을 맞아 교육방송 사상 처음으로 파업을 강행했던 교육방송 노동조합(위원장 박상호)은 12월31일부터 일단 제작에는 참여했다. 1월19일 국회 교육위원회와 문화체육공보위원회가 열려 교육방송 문제를 논의하고, 정부도 1월 말까지 대안을 내놓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방송 직원들로 구성된 ‘교육방송 살리기 직원 대책회의’는 1월3일부터 ‘교육방송의 공사화’를 요구하며 매일 20여 명씩 철야 농성을 하고 있다.1월4일 저녁 철야 농성을 하기 위해 노조 사무실에 온 한 프로듀서는 “어제 오늘 부장 1명과 차장 3명이 사표를 냈다. 인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지난 4년간 교육방송 직원들이 요구해온 공사화가 일단 성사된다 하더라도 이제는 인력이 없어 방송을 하지 못할 형편이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해 11월 말부터 본격화한 교육방송 사태는 갑자기 터져 나온 것이 아니다. 90년 12월27일 KBS 제3텔레비전에서 교육방송이 분리되어 ‘교육부 산하 한국교육개발원 부설'로 이관되면서부터 누적되어온 문제들이 불법 파업과 철야농성이라는 극한적인 출구를 통해 터져 나온 것이다. 4년 동안 교육방송 직원들은 물론 방송학계에서도 교육방송의 위상과 관련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러나 주무 부처인 교육부는 물론 방송을 총괄하는 공보처도 소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채널 다매체 시대가 열리면서 방송 환경이 크게 변하고 있는데도 교육부와 공보처는 남의 일인 양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1월5일 교육방송 문제로 마련된 국회 교육위원회 간담회에 참석한 김숙희 교육부장관은 “생각은 많았으나 그동안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말로 교육부의 실책을 간접 시인했다.

1년 예산 KBS의 4%...PD 30% 떠나

 교육방송의 위상과 관련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운영 및 편성권, 인력, 재원 조달이다. 교육방송은 공중파 방송이라는 점에서는 KBS.MBC.sbs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더구나 라디오 FM도 하나 가지고 있어 외형적으로는 다른 방송사와 동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교육부 산하 ‘관영방송’ 이라는 위상 때문에 다른 방송사와 큰 차이가 난다. 물론 특수 방송이라는 성격은 있지만 교육방송의 94년 1년 예산은 총 2백78억원으로 KBS의 4%,MBC의 9%,sbs의 13%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방송사가 대형 특집 드라마 한 편에 쓰는 제작비가 교육방송의 1년 총제작비이다.

 교육방송은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93년 6월부터 상업광고를 실시하고 교재를 판매하는 등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 협찬 광고만 하게되어 있는 정부 출연 기관이 교육부와 공보처의 묵인, 나아가 부추김으로 ‘불법’을 국민에게 ‘교육’ 하는 것이다.

 비좁은 공간은 작은 일인지도 모른다. 한국교육개발원과 건물을 나눠 쓰는 까닭에 컨테이너가 등장했고, 이것이 비좁아 양재동에 건물을 얻다 보니, 제작자들이 간부의 결재를 받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 산을 넘어가야 한다. 8대밖에 없는 편집기는 턱없이 모자라 프로듀서들은 밤늦게까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고. 야간 촬영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엄두를 못낸다. 게다가 출연료가 적어 출연자 섭외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육방송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들은 거의 봉사하는 심정으로 나온다”고 한 프로듀서는 털어놓았다.

 지난해부터 교육방송 제작진의 사기를 크게 꺾어놓은 것은 인력 문제이다. 지역 민영방송과 종합유선방송이 허가되면서 3~10년차 제작 인력이 급격하게 빠져 나갔다. 간부를 포함한 프로듀서 1백7명 중 2년간 36명이 새로운 매체로 자리를 옮겼고, 지금도 인력 유출이 계속되고 있다. 그들의 빈 자리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방송을 유지하려면 지금보다 인력은 두배, 예산은 세배가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휴가도 잊은 채 일해

온 제작진의 고혈로 방송이 이루어졌다. KBS의 55%, MBC의 40%밖에 안되는 임금을 받으며 몇날 며칠씩 밤샘 작업을 해야 하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런 판국에 인력이 자꾸 빠져 나간다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두려운 일이다,“ 박상호 노조위원장의 말이다.

 방송 제작의 주축이 되어야 할 3~10년차 직원들이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교육방송은 그 어느 조직보다 젊다. 간부와 신참 들만 남아 방송을 제작하는 것이다.<시네마 천국>의 홍창욱 프로듀서는 “교육부나 교육방송 경영진이 비전이나 회망을 주지 않아 제작진의 의욕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남아 있는 사람도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노조뿐만 아니라 간부 직원들까지 기본급의 30~40%를 갹출해 교육방송의 어려운 상황을 신문에 광고하려는 것은, 이대로 가다가는 교육방송이 곧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이다. 일반 직원이든 간부든 교육방송이 제 자리를 찾는 길은 운영권·편성권이 보장되는 공사화밖에 없다고 본다. 지난해 정부가 세 차례에 걸쳐 위촉한 공영방송발전연구위원회(3월). 2000년방송정책연구위원회(7월).선진방송정책자문회의(12월)의 연구 결과가 한결같이  교육방송의 위상을 독립된 공사화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방송 현업자로교육부가 요구하는 교사의 역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방송인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공사화 자금 천억원은 어디서 구하나”

 “교육과 관련한 좋은 기획이 있어도 교육부와 마찰을 빚기 때문에 실행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50, 60년대에나 어울릴 법한 ‘칠판 방송’을 계속한다는 것은 국민의 귀중한 재산인 전파를 낭비하는 것밖에는 안된다.” 박상호 노조위원장은 지난해 편성과 관련해 교육부에서 내려온 공문이 4백건에 이른다면서, 이 때문에 ‘눈 가리고 아옹’ 하는 식의 편법도 동원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를테면 교육부가 프로그램을 언제나 학교 교과 프로그램과 맞추라고 지시하고 있어 일요일에 방송되는 <바둑교실>프로그램은 ‘국민학교 특활 시간의 바둑’으로 보고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 1월 초 총리의 지시로 공보처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놓았으나 아직까지는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교육부는 ‘교육은 국가가 관장한다’ 는 이유로 교육방송을 정부 출연 기관인 (가칭)한국교육방송원으로 독립시킨다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교육부는 또 교육의 수단화와 상품화가 우려되고, 교과 과목 전문채널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이유로 공사화에는 반대하고 있다. 김숙희 교육부장관은 “공사화에 드는 천억원의 재원을 어디서 끌어오느냐 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교육방송이 어디든 앉아서 제 기능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육방송을 꼭 교육부 산하에 붙들어두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수많은 방송 현안 가운데 교육방송의 공사화만큼 방송학자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일도 없다. 전석호 교수(중앙대·방송학)는 “주무 부처 운운하며 공보처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복지부동의 한 사례이다”라며 공사화로 교육방송의 위상을 하루빨리 잡아주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재원과 운영 자율권만 확보해주면 교육방송은 당연히 좋아진다. 교육과 문화 채널인 교육방송이 국민 교육이라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면 세계화는 절대로 이룰 수 없다. 방송의 매체적 성격도 모르고 방송 경험과 이해도 없는 교육부가 교육방송을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교수는 또 사회적 통합을 가능케 하는 전국 네트워크 채널인 교육방송이 지금처럼 운영된다면 방송 구조 전체의 균형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교육부가 주장하는 교육방송의 ‘학과 교육기능’, 즉 과외 기능을 종합유선방송 교육 채널이 맡아 수행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교육방송에 출연하던 강사들마저 출연료 때문에 종합유선방송 교육 채널로 속속 자리를 옮겨가는 실정이다. 수신료와 공익 자금 배분, 제한적인 광고허용 등 정부가 위촉한 연구 결과로 이미 교육방송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나와 있으니 만큼 타당한 정책 대안이 하루빨리 나오기를 모든 방송 관계자들은 촉구하고 있다. 교육방송은 지금 벼랑끝에 서 있다. ■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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