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病’은 행정 부재탓
  • 이성남 문화부차장대우 ()
  • 승인 1990.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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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절차에 큰 구멍 … 폭력 · 외설 등 저질문화 급속도로 확산

거대한 차륜 밑에서 비디오테이프가 깨지고 찢긴다. 외설과 폭력장면이 녹화되어 있는 검정색 테이프가 터진 내장처럼 축축 늘어져 엉긴다. 지난 10월말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개최된 ‘불법 퇴폐 음반 · 비디오 폐기 및 추방 결의대회’ 현장. 비록 전시적이고 일회적인 행사일망정 35만여점의 불법 비디오테이프가 거대한 중장비 페로이다에 의해 짓이겨지는 모습은 우리의 비디오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 하겠다.

“우리 사회 병폐의 하나인 불법비디오와 퇴폐음반을 깡그리 그리고 깨끗이 쓸어내기 위해?? 공연윤리위원회와 한국음반협회가 주관한 이 대회에서 폐기된 비디오테이프는 검찰 폐기 지시분 15만6천여점과 문화부 행정처리 지시분 14만5천여점, 음반 판매회원사 자진 반납본 5만여점 등이다. 그러나 집채만한 분량의 불법 비디오테이프가 폐기 됐다고 해서 우리 사회에 올바른 비디오문화가 정착될 수 있을까.

서울 YMCA ‘건전 비디오문화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은 11월20일 창립 1주년 기념세미나를 개최, 비디오문화의 위상을 점검했다. 비디오 프로그램에 대한 성찰없이 VTR기기만 무제한 보급시킨 절름발이 행정 탓에 이 땅의 비디오문화는 대외적으로는 ??문화적 종속성??을, 대내적으로는 ’외설 창작물 양산‘을 부추기는 독버섯으로 자라고 있음이 이 자리에서 밝혀졌다.

우리나라가 VTR기기가 처음 시판된 것은 1979년이다. 그후 10여년만에 약 4백만대가 보급되었는데 이것은 70년대말 텔레비전 보급대수와 맞먹는다. 국내 비디오 제작사도 81년에 5개사에 불과했으나 현재 1백50여개사로 늘어났으며 테이프를 대여해주는 비디오숍은 현재 전국에 2만5천여개소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비디오문화가 이제 국민생활 깊숙이 파고든 것이다.

지난 8월25일부터 9월25일까지 서울시내 직장인 1천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들의 월평균 비디오 시청 편수는 3.8편으로 나타났으며, 월평균 6편 이상을 본다고 응답한 이는 19.8%이고 11편 이상을 본다고 답한 사람도 9.9%나 되었다. 이에 반해 비디오를 전혀 안본다고 응답한 직장인은 10%에 불과했다. 응답자의 44%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 비디오 시청을 하며, 33%가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라고 답했다.

 

대기업에 외국사까지 가세, 문화종속 부추겨

서울대 신문학과 廉賢斗 교수는 오늘날 비디오가 “텔레비젼을 제외하고는 가장 대중적인 매체”라고 단정하고, 70년대말 매스미디어로서 텔레비전의 영향력에 대한 갖가지 논의가 이루어졌음을 돌이켜볼 때 비디오문화는 사회적으로 지나치게 방치되어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비디오는 “국경을 넘어 안방으로 직접 침투되는 초국가적 문화산업”인 데다 복제로 인한 문화적 파급효과가 매우 큰 매체인데도 불구하고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연도별 VTR보급 현황 및 비디오테이프 시장규모, 직배 비디오 업계의 매출액도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파악되고 있는 실정이다. 비디오업계의 동향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한국음반협회의 한 직원은 “국내 비디오제작사 1백50여개소 중 불과 50개사만 회원으로 가입한 실정이라 전체 시장규모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서울신문〉李重漢 논설위원은 1개의 베스트셀러 비디오테이프의 영향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예시했다. 곧 판매량이 1만개를 넘는 베스트셀러인 경우, 이 1만개의 비디오테이프가 전국의 비디오숍에서 1개당 적어도 30회 이상 대여된다고 할 때 수용자수는 최소 30만명이고, 한 가정에서 두명이 보았다고 치면 60만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 수치로 보면 흥행에 대성공한 영화의 영향력에 맞먹는 것인데도 이 막강한 미디어가 지금까지 주로 폭력물과 외설물 위주로 공급되어왔음을 환기시켰다.

최근에는 비디오산업이 영화산업을 능가할 만큼 잠재력이 큰 시장이라는 데 눈독을 들인 상흔까지 마구잡이로 끼어들고 있다. 현행 법상 중소기업 고유업종에 묶여 있는 비디오제작 배급업에 국내의 대기업체들이 다투어 뛰어들었으며 여기에 미국 메이저의 비디오판권 배급회사인 UIP-CIC까지 가세한 것이다. 국내 대기업들은 대개 외국 메이저와 제휴하여 창작물 제작보다는 외국비디오 프로그램을 국내에 보급하는 업무에 치중하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문화종속성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강현두 교수는 “영상산업이 낙후한 국가일수록 외국 메이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대중문화의 종속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공륜 본심을 통과한 작품을 보면 이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총 2천5백34편 중 외국영화가 84%인 2천1백여편을 차지하고 있는데 반해 국내 영화 및 외설성 창작물은 각각 7%로 나타났다. 90년도 3/4분기 결과도 전년과 달라지지 않았다.

현 비디오 프로그램의 내용을 중심으로 문제를 제기한 한양대 鄭用琢 교수는 국내 창작 비디오는 대부분 성애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비디오 전용으로 제작되는 이와 같은 창작 극영화는 대개 한 작품당 적어도 10여번 이상의 정사장면을 딤고 있다. 제명도 〈찬란한 욕정〉〈빨간 사냥꾼〉〈빨간 복숭아〉〈현지처의 정사〉〈황홀한 나신〉등 춘화도를 연상케 하고 있으며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비정상적이고 비윤리적인 성관계를 거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불건전한 내용을 담고 있는 비디오테이프는 전국의 2만5천여 비디오점을 통해 청소년들에게도 쉽게 대여된다. 서울시내 남녀 중고생 2천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60% 이상이 포르노 비디오를 시청한 경험이 있다는 통계는 폭력과 외설로 대표되는 저질 비디오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한 예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불법비디오를 폐기하고 소각하는 일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오류일 수도 있다. 건전 비디오문화 정착을 위해 시민운동을 전개해온 서울 YMCA 사회개발부의 李承庭 간사는 ”불법비디오 문제는 우리 비디오문화가 앓고 있는 여러 병리현상 중의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공륜 심의를 마친 ‘합법’ 비디오도 폭력과 외설투성이임을 직시하여 ”불법비디오를 단속, 폐기하는 것 못지 않게 합법비디오의 내용 심의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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