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반장 최중락 ‘40년 전쟁’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0.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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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예방은 가정에서”연말 은퇴 앞두고 현장경험 전파

“이빨빠진 호랑이가 무슨 취재감이 된다고….”‘포도대장’ 崔重洛 총경은 올 연말로 마감을 하게 되는 40년 수사관생활이 못내 아쉬운 듯 첫마디를 이렇게 건넸다. 키 1m75cm, 몸무게 68kg의 올해 나이 62세인 ‘수사반장’은 아직도 강도 3~4명은 거뜬히 때려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건강한 모습이었다.

아침 5시30분이면 일어나 7시 안에 출근하는 부지런한 생활이 그의 건강의 밑천이기도 하지만 부지런함은 타고난 것인 듯하다. 1929년 충북음성의 농사꾼 집에서 태어난 최총경은 6형제 중 다섯째 아들. 형제가 모두 음성에서 한가락하는 유도 · 씨름선수였는데 그 역시 유도 2단이다.

“손사체질이었던 것 같은데 경찰에는 어떻게 들어오게 됐습니까?”기자의 상투적인 질문에 그는 씩 웃었다. “내 바로 위 형이 경찰이었어.”형사 아니랄까봐 그는 기자에게 반말로 친근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 형한테 무슨 일 하느냐고 물었더니 도둑놈 잡으러 다닌다고 해.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거 괜찮게 보이거든. 그래서 나도 경찰이 되기로 결심한 거야.”

1948년 격동기에 음성 농업학교(5년제)를 졸업한 최총경은 농사를 지으며 경찰입문의 기회를 엿보다가 50년 4월 청주에서 치른 순경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임용도 되기 전 6 · 25가 터져 9 · 28 수복이 된 뒤에야 경찰관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치안국 202 전투경찰부대로 배치된 최중락 순경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주로 공비토벌임무를 수행했다. 최총경은 자신을 ‘극우파’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같은 배경이 얼마쯤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MBC <수사반장>의 주인공

MBC TV 드라마 <수사반장>의 실제주인공인 그가 명수사관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최총경이 밝히는 그의 ‘사복’ 발탁 일화는 경찰을 우습게 아는 지금 상황으로는 전설같은 얘기지만, “순사 온다”하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치던 시대에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53년 가을 영등포역전 철도경호대에서 근무할 당시의 일. 어느날 근무를 마치고 사복차림으로 하숙집으로 가고 있는데, 소매치기 5명이 한 할머니의 보따리를 나꿔채는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사람살려’하는데 누가 거들떠나 봐야지. 내가 달려갔지. 돈을 빼앗아 튀는 놈을 붙잡아 업어치기로 냅다 후려갈기니 나머지 네놈이 ‘와’하고 덤벼들지 않겠나. 얼마나 정통으로 가격했는지 내 주먹을 얼굴에 맞고 전부 땅바닥에 쓰러졌어. 아마 그들이 내가 경찰인줄 눈치채고 겁먹었기 때문에 제대로 반항을 못한 것 같아.” 어쨋거나 이 사실이 상부에 보고된 즉시 최총경은 형사자질을 인정받아 미군부대에 파견하는 정보반 형사로 차출됐다. 철도 경호대가 해체되자 58년 최중락 순경은 서울중부경찰서로 배치됐다. 강력반 형사로서 걸음마를 시작한 것. 그는 남대문시장, 양동사창가 등의 우범지역을 중심으로 밤낮없이 잠복근무를 하면서 ‘포도왕’으로 전국 경찰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최총경은 63년 서울 시경 강력계로 옮긴 뒤 80~81년 부산동래경찰서 수사과장으로 1년, 85~89년 인천해경 정보수사과장과 인천시경 수사과장으로 3년6개월간 근무한 기간을 빼고는 경찰재직 40년 중 약 25년을 서울시경 강력과에서 근무했다. 그래서 ‘수사반장’ 최중락은 서울시경의 산 역사일 뿐만 아니라 산업화 도시화 이후의 한국범죄사를 체험으로 증언하는 사람으로 통한다.

근정포장, 녹조근정훈장, 대통령표창 등 전국공무원 중 최다인 1백20회의 각종 수상에 빛나는 ‘포도왕’ 최중락. 그는 지난 5월1일 서울시경 강력과장에서 치안본부 강력부 형사지도관으로 물러앉아 사실상 ‘제대’했으며 오는 12월30일 명예로운 퇴임식을 갖는다. 그러나 그의 경험과 지식을 수사에 활용하기 위해 치안본부는 앞으로 5년간 그가 촉탁수사연구관으로서 계속 근무할 수 있도록 관계규정을 고치면서까지 붙잡고 있어 최총경은 지금도 ‘은퇴’를 실감하지 못한다. 최총경은 이제 수사경험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후배들을 지도하는 한편 체험을 통해 터득한 범죄예방의 길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 국민에 대한 마지막 봉사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범죄학자도 아니요 사회학자, 심리학자는 더더구나 아니다. 그러나 가해자와 그의 주변환경을 샅샅이 뒤져보고 나름대로의 원인을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은 나같은 형사밖에 없다. 학자들의 얘기야 이론적인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나대로의 결론을 말한다. ‘범죄예방은 가정에서부터’라고.”

말하자면 최총경은 범죄의 근원적인 요인을 가정에서 발견하고 그 연구결과를 되도록 많은 부모들에게 얘기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정의 잘못으로 비행에 빠져든 청소년들이 전과자가 되고 교도소를 나와서도 반기는 이가 없으니 또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데, 이렇게 되기 이전의 예방이 더욱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쟁선포 이후 범죄예방 ‘전도사’로 나서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직후 최총경은 이같은 일에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범죄예방을 위한 전도사’ 사무실을 ‘개업’한 셈이다. 최총경은 주부 · 회사원 · 공무원들이 모인 자리에 나가 “지금 당장 잡는 것은 경찰이 할 일이지만 10년 후의 범죄를 줄이는 것은 여러분이 할 일”이라고 강연을 하고 있다. 지난 10월 서울 경성중학교 어머니회를 시작으로 벌써 10회째를 넘기고 있는데 그는 강연료 1백만원을 최근 순직경찰관 유족에게 장학금으로 전달, 월급외에는 한푼도 집에 가져가지 않는 40년 경찰생활의 철칙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그는 ‘전도사’일이 지방으로까지 확대되게 됐다며 신이 난 표정으로 편지 한장을 보여주었다. 대구시내의 한 젊은 파출소장이 보내온 강연회 초청장이었다. 대구중부 경찰서 관내 서문로파출소장인 올해 35세의 경찰관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언젠가 교육받는 기회에 총경님의 강의를 듣고 그 내용을 주민에게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제힘으로는 도저히 안되니 총경님이 한번 내려와 강연을 해주시면 우리 지역의 청소년 범죄예방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데 내가 안갈 수 있겠어?” 범죄 관련 신문기사를 정리하고 세부적인 내용을 담당형사에게 전화로 묻는 ‘전도사’ 최총경에게 ‘설교’내용을 미리 듣자고 청했다. 그러자 그는 또 씩 웃으며 “야, 내가 교수도 아닌데 무슨 심오한 내용이 있겠니. 그저 최근 일어난 강력범죄 사례를 들면서 그 범인놈들의 가정을 얘기해주는 거야. 그러면 듣는 사람들이 실감을 하지. 제 아무리 통계 갖다대고 어려운 얘기해봐야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만큼 효과가 없어. 그래서 무식해도 내가 나서기로 한거야”라고 말했다.

최총경은 단일사건만 강의하지 않는다. 범죄의 씨앗이 3대에 걸쳐 일어난다거나 몇개의 가정이 어떻게 연쇄적으로 몰락하게 되는지를 추적해서 보여준다. 그가 강연에서 첫번째로 드는 사례는 ‘부평 새댁 피살사건’이다.

 

사례 1 : 부평 새댁 피살사건

지난 87년 5월 인천 부평동의 이모씨(53 · 여) 집에 세든 신혼주부 이모씨(24)가 폭행을 당한 채 칼에 찔려 숨진 시체로 발견됐다. 가슴을 17차례나 찔려 하얀 블라우스가 붉은 옷으로 착각될 만큼 피를 많이 흘리고 죽은 이 새댁은 불과 12일 전에 결혼한 몸. 수사 결과 이 범인은 바로 주인집의 둘째 아들(24)이었다.

범행수법의 잔인성으로 보아 원한관계나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같지만 범인의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평소에 말한마디 건네본 적이 없는 사이였다. 여자를 범하고 싶은 욕정과 여성에 대한 증오심이 그녀를 죽이게 했다.” 범인이 가지고 있는 증오심은 어디에서 싹튼 것일까.

국민학교시절 범인은 전교 수석자리를 한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중학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 그러나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게 화근이었다. 야구부에 입단한 범인은 연습도중 배트를 휘두르다 모르고 동료선수 김군의 머리를 치게 됐다. 다행히 가벼운 상처여서 김군은 1주일만에 퇴원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문제였다.

후유증 등을 이유로 거액의 합의금을 요구한 것. 형편이 안되는 범인의 집에서 돈을 주지 않자 김군의 어머니는 4주진단서를 첨부, 어린 학생인 범인을 경찰에 구속시키고 말았다. 정상이 참작돼 범인은 30일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나왔지만 그의 ‘신세’는 사실상 여기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급우들로부터 ‘전과자’란 얘기를 들으며 따돌림 당하면서 차츰 실의에 빠진 범인은 오직 야구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곧 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전과자 운운하는 야구부 후배를 배트로 기합주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케 한 것이다.

그 후배의 아버지와 범인의 아버지는 공교롭게도 절친한 친구사이. 죄책감에 못이긴 범인의 아버지는 병원옥상에 올라가 투신자살했다. 두명이 죽고 두 가정이 깨진 결과가 됐다. 상해치사죄로 6년형을 살고나온 범인은 앞으로 살일이 캄캄했다. 친구들은 벌써 대학을 졸업했는데 자신은 고등학교는커녕 중학교 졸업장도 없어 어디 취직할 수도 없었다. 범인은 생각했다. 우등생이 밑바닥인생을 살게된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경찰에 고소해 전과자로 만든 친구 김군의 어머니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 증오심과 저주는 차츰 모든 여성에 대한 증오로 변해갔다. 사건 발생 3개월 전부터 범인은 컴퓨터공부를 한다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던 중 신혼부부가 세들어온 것이다. 주인집 마루를 같이 이용하는 새댁의 분냄새를 못참은 범인의 욕정과 증오심은 끝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가고 말았다. 졸지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편(28)은 충격으로 직장도 그만두고 지금까지 술로 인생을 살고 있다. 세명이 죽고 세 가정이 패가한 기막힌 드라마다.

최총경은 이 비극적인 ‘수사반장’을 청중에게 들려주면서 욕심부리지 말고 모질게 살지 말라고 당부한다. “아들의 사고피해를 이용해 아파트를 장만하려 한 한 어머니의 욕심이 다른 세 가족을 쑥밭으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사례 2 : 5인조 가정파괴범

부모의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인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 최총경은 청중들을 긴장시킨다. 몇해 전 대낮에 서울 성동구의 한 양옥 2층에 침입해 강도 · 강간을 한 5인조 가정파괴범의 얘기다.

검은 신사복차림의 황모(20) 일당 5명은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와 집을 보던 주부(48)와 딸(20)을 위협, 금품을 턴 뒤 이들을 차례로 폭행했다. 이들은 검거되기 전까지 전국에서 14차례의 강도 · 강간을 저지르며 가정파괴를 일삼아왔다. 범인들은 경찰에서 한결같이 “집은 있어도 가정이 없다”며 부모들의 불화와 자녀에 대한 무관심에 반발해 가출, 의식주 해결을 위해 범행을 했다고 진술했다.

최총경은 부모의 면회조차 거부한 이들의 가정내부를 그대로 청중들에게 공개함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먼저 일당 중 김모(19)는 고위공직자의 아들. 외교관인 아버지가 임지로 떠나면서 교육문제 때문에 고3인 김군을 누이동생집에 맡긴 것이 문제아로 만든 결과가 됐다. 고모가 자기자식만 편애하며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여긴 김군이 고모집을 가출하게 된 것이다.

또 황군은 복부인 어머니를 만나 탈선에 이른 경우. 공부는 하기 싫고 어머니는 돈만 알아 밤낮으로 집을 비우다보니 자신도 유흥가를 배회하며 연상의 나이트클럽 댄서와 사귀는 등 비행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황군은 수사관에게 “어느날 어머니에게 제발 토요일 하루라도 같이 있어 달라고 했더니 십만원권 수표 한장 던져주고 또 집을 나갔다”며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공범인 이군은 부모의 불화가 자녀에게 끼치는 영향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한 표본이다. 귀가하는 아버지가 초인종을 누르면 어머니가 “저 ×× 오늘도 술쳐먹고 왔나보다. 문열어주지마라”고 한다든지 자식이 듣는데서 욕설을 내뱉는 부모의 불화에 염증을 느껴 책가방을 든 채 집을 빠져나왔다.

또 여관을 경영하는 홀어머니의 차남으로 이른바 결손가정 출신인 신군은 어머니의 형에 대한 편애와 이웃의 경원하는 눈초리가 싫어 가출, 나이트클럽에서 일당과 만났다. 신군이 경찰에서 말한 어머니의 탐욕성은 그가 왜 어머니에게 적개심을 품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여관방을 세놓고 나서 남모르게 방에 들어가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연탄냄새가 나도록 해서 세든 여공, 접대부 등이 기겁하여 전세금도 포기하고 나가게 하는 방법으로 야비하게 돈을 버는 어머니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는 것이다.

최총경은 신군이 또 자기집 앞에 주차한 이웃집차에 펑크를 내고 문짝을 파손하는 어머니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고 말한 점을 지적하면서 부모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모습이 자식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깊이 생각해야 된다고 역설한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사람들이 제 가정부터 돌봐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겠군요”하자 최총경은 “그럼, 강연이 끝나자마자 어서 집에 가봐야겠다고 야단이야. 사실 가정파괴범들은 바로 이런 가정에서 가출해 나온 놈들이거든.”

유흥비 마련, 우발적인 호기심 등 범행의 직접요인은 가출 후에 생기는 것, 따라서 가출하면 모든 것이 끝나므로 가정에서 참된 교육을 시켜야 된다는 게 최총경의 지론이다. 그러면 ‘범죄와의 전쟁’ 선포 전후 잇따른 흉악범죄의 경우는 어떤가. ‘전도사’의 설교자료에는 이에 대한 분석도 이미 결론이 나 있다. 역시 마찬가지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사례 3 : 공중전화 살해·일가족 생매장

지난 8월 공중전화를 오래 쓴다며 뒤에서 짜증을 낸다고 갓난애를 업은 여인을 살해한 강모씨(28)의 성장과정을 보자. 강씨는 가난한 농촌의 가정에서 11남매 중 8번째로 태어났다. 학비가 없어 11남매가 모두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제 밥벌이에 나섰는데 강씨도 상경하여 신문배달 · 구두닦이 등으로 생활했다. 형의 도움으로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도중에 그만뒀다. 고생 끝에 최근 운전면허를 어렵사리 따 어느 산부인과에 운전수로 취직했지만 얼마 안돼 해고됐다.

사고를 낸 그날은 신문에서 ‘운전사 구함’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던 참이었다. 전화를 거는 데마다 “벌써 채용했습니다”라는 답을 듣고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강씨는 전화를 빨리 끊어달라는 여자의 재촉을 들었다. 뒤돌아본 순간, 그 여자가 형수로 보이면서 충동적인 살의를 갖게 됐다. 양말속에 넣고 다니던 칼을 빼 있는 힘을 다해 ‘형수’를 찔렀다. 경찰조사에서 강씨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칼을 품고 다니게 됐으며 상경 후 형집에 기거하는 동안 “1백원 한개 안준 형수에 대한 증오심이 발동, 나도 모르게 그녀를 찔렀다”고 말했다.

양평 일가족 생매장 살인사건의 주범 이모씨(30)는 아버지의 부정이 파멸의 씨앗이다. 최총경이 확인한 결과 그의 아버지(70)는 젊어서 4명의 여자와 살면서 가정을 돌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씨는 중학2년때 계모와 바람기 많은 아버지가 싫어 집을 탈출, 도둑질을 시작으로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하다 나이 30에 전과 8범이 됐다.

최총경은 가정이 버린 청소년들은 혼자 마구 자란 관계로 자연히 자제력이 없어져 돈 얼마에 사람을 간단히 해치우고 만다면서 이것을 어떻게 경찰만의 힘으로 막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언론도 시민도 경찰관만 나무랄 때가 아니다. 모두 제 가정으로 돌아가 사랑으로 참된 교육을 자녀들에게 베풀 때다”라고 최총경은 힘주어 말한다.

‘범죄예방의 전도사’ 최중락 총경. 그는 학교 어머니회 같은 곳에서 강연요청이 오면 만사를 제쳐놓고 나가 열심히 ‘전도’를 한다. 얼마 전 고기 안먹는 건강요법으로 선풍을 일으킨 바 있는 ‘이상구 신드롬’처럼 ‘최중락 신드롬’이 전국적으로 번져 내집에서부터 범죄를 예방해야 한다는 인식이 정착되기를 노수사관은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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