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문고리 쥔 ‘인간의 절반’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0.1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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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 뿌리내리기 한창…‘삶의 질’ 높이는 제도개혁 이끌어내야

 여성학이란 한마디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압당하는 현실을 밝혀내 남녀가 평등한 사회를 이뤄가는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여성학이 하나의 학문으로서 독립적 체계를 갖춘 것은 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일기 시작한 열렬한 여성해방운동에 힘입어서이다.

77년 이화여대에 학부 강의가 개설됨으로써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한국의 여성학은 이제 10년 남짓한 유아기를 거쳐 점차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90년 2학기 현재 여성학 강좌가 개설된 대학은 전국에 69개교, 82년 후반 이화여대 대학원의 여성학 설립을 필두로 80년 후반 각 대학이 앞다투어 여성학 강좌를 개설해 여성학 수강붐을 조성하고 있다. 특히 올해 들어 효성여대 대학원에 여성학과, 계명대에 여성학대학원이 신설됐으며 이화여대는 91년부터 여성학 박사과정을 신설할 예정이다. 이화여대 여성학과 장필화 교수는 이번 박사과정 신설의 의미를 “여성학 나름의 이론체계와 방법론을 정립하기 위한 기회”라고 설명하면서 여성학의 질적 발전을 이루는 한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처럼 강좌 및 학과를 개설해 여성학을 수용하는 대학이 급속히 늘고 있는 데는 어떤 배경이 있을까. 크게는 사회ㆍ경제적 변화에 따른 의식의 변화를 들 수 있고, 작게는 88년 국책 과목의 폐지 이후 각 대학의 총여학생회측에서 “여성학강좌를 개설하라”는 목소리를 높인 점을 들 수 있다. 마침 이화여대가 여성학과를 신설해 석사 출신 강사진을 확보해둔 덕분에 이같은 요구는 광범위하게 수용될 수 있었다.

  여성학에 대한 이같은 열기는 여성의 지위향상이라든가 여성운동의 신장세와 더불어 매우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확산되는 강좌를 과연 어떤 내용으로 채울것인가, 다시 말해 여성문제의 본질과 기원을 어떻게 파악하며 그 구체적 극복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어떤 연구를 전개해야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연구자들간에 시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같은 시각 차이에 주목하면서 현재 우리 여성연구의 흐름을 살펴본다면 그 흐름을 거칠게나마 크게 두 범주로 대별할 수 있을 듯하다. ‘한국여성학회’로 대표되는 제도권 연구자들과 ‘한국여성연구회’로 결속한 소장 연구자들의 집단이다. 이 두 흐름은 중심 연구과제나 방법론, 이론적 지향점에서 각기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여성해방론의 두 축 SF와 MF

  한국여성학회(회장ㆍ숙명여대 정금자 교수)는 전국에서 여성학 강의를 하는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모임. 84년 발족해 90년9월 현재 회원수 3백명으로 성장했으며 이화여대를 그 중추로 하고 있다. 한국여성개발원측의 연구원을 포함, 올들어서만도 신입회원 40명을 받아들이는 등 각 부문 전공자를 폭넓게 받아들여 여성학의 정립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여성학의 ‘嫡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향해 “좀더 실제 여성무제 해결과 직결된 연구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하는 요구가 제기되고 있다.

  그같은 비판적 관점에 서 있는 모임이 바로 한국여성연구회(공동대표ㆍ성균관대 정현백, 충북대 장하진 교수)이다.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진 1백명의 젊은 연구자로 구성된 이 모임은 87년 발족한 여성사연구회와 역시 같은 해 창립된 여성한국사회연구회(회장ㆍ이효재)로부터 떨어져나온 아현여성연구실이 통합된 모임.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산하단체로 ‘여성학술운동체’를 표방한다.

  이들은 각기 어떠한 여성해방론을 펼치고 있는가. 흔히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MF) 대 이중체계론 혹은 사회주의여성해방론(SF)'으로 불리는 이 논쟁은 여성억압의 본질과 관련한 것으로 성차별의 기원을 계급발생 이전으로 볼 것이냐, 정통 마르크스주의(엥겔스의 논지)에 따라 계급발생과의 동시적 과정으로 볼 것이냐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MF는 사유재산제가 생긴 뒤 여성문제가 발생해 각 시대별 계급관계에 따라 여성이 착취돼 왔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자본주의의 계급관계 자체에서 성억압이 발생한다고 보므로 계급모순이 해결되지 않고는 여성해방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MF론자들은 운동방식에 있어서도 여성의 독자적 조직의 필요성은 인정하되 계급모순을 극복하려는 사회변혁운동과의 연대를 매우 중시한다. 특히 분단체제의 우리 현실에서는 통일운동과 노동해방의 두 축을 중심으로 사회의 여러 모순이 먼저 해결돼야만 여성해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여성연구회가 비교적 이 관점에 선 연구를 하고 있다.

  반면 SF는 여성억압의 본질을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로 파악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계급모순과 성모순은 동시에 존재하며 계급해방이 돼도 여성문제는 그대로 존속한다. 사회주의혁명을 거친 중국이나 소련내에 존재하는 여성문제에 주목하면서 서구의 여성해방운동가들이 대안으로 제시한 SF는 ’여성학회‘로 대변되는 기성학계측 연구의 배경이 되고 있다.

  이런 이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학자는 김정희씨(이화여대 여성학과 강사)인데 그는 원시사회에서의 모권제 존재는 불투명하며, 계급사회 이전에 이미 가부장적 억압이 존재했다고 보고있다. 따라서 성차별의 해결은 계급사회 혹은 자본주의사회의 극복으로 이뤄질 수 없고, 이와는 별도의 운동과 변혁이 요구된다는 전망을 갖는다.

  이와 같은 여성해방이념 논쟁은 85년 창작과 비평 무크지 《여성1》에서 처음 제기된후 88년 까지 지상논쟁 등으로 계속되었고 운동권 논의에서도 하나의 핵심적 주제로 부각돼왔다. 《여성1》 논단에 실린 심정인씨의 글 ‘여성운동의 방향정립을 위한 이론적 고찰’과 이에 대한 조 은 교수(동국대ㆍ사회학)의 반론 ‘지적 파시즘’ (《또 하나의 문화》3집) 이 그 대표적 논의이다. 또한 88년 학술단체연합 심포지엄 당시 여성한국사회연구회 회원이었던 지은희씨 등의 ‘한국여성연구의 자성적 평가’에 항의, 이화여대생 일부가 “불모지에서 쌓아올린 이화여대 여성학과의 성과를 일방적으로 폄하했다”는 요지의 반박성명을 뿌린 일도 있다.

 

학자들이 직접 실천의 장 열어

  그간 이들이 내놓은 연구활동의 구체적 성과를 보자. 현재 6집까지 나와 있는 여성학회지 《한국여성학》이 그간 다룬 특집의 주제는 △여성과 종교 △가부장제 △여성과 심리 △여성과 교육 △성(sexuality) △여성과 노동 같은 것들이다. 또한 올해 발간된 6집에 실린 △세법과 성평등 △사회복지관련법과 여성 △남녀고용평등법에 관한 연구는 최근 여성연구의 동향을 보여준다.

  반면 한국여성연구회측의 관심은 이와 매우 대조적이다. 문학과 노동의 두 분과가 가장 활발한 연구를 펴왔는데, 창비 무크지 《여성》1ㆍ2ㆍ3집에 이어 연간지 《여성과 사회》 1집이 그 수확이다. 노동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이들은 “여성 노동자의 차별임금 해소방안으로 ‘동일노동ㆍ동일임금’을 제시한” 연구서와 “한국 현실의 여성문제를 실천적 관점에서 정리한” 여성학 교재도 준비중이다.

  여성학이 이론과 실천이 맞닿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학자들이 직접 실천의 장을 열고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그 가운데 주목을 받는 것이 ‘또 하나의 문화’로서 40대 여성학의 기수들인 조혜정(연세대ㆍ인류학) 조 형(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소장ㆍ사회학) 조옥라(서강대ㆍ인류학) 조 은 장필화 교수 및 박혜란(이화여대ㆍ여성학) 고정희(시인) 등이 이 모임의 주요 동인들이다.

  84년 발족 이래 중산층 여성을 대상으로 대중적 여성운동을 펼쳐온 이 모임은 그 운영방식부터 독특하다. 여타 단체와는 달리 대표ㆍ회장제를 채택하지 않고 회원의 참여를 최대한 유도하고 있는데 회원 규모는 현재 4백명. 동인들은 “남성중심적ㆍ경제주의적 과학기술사회를 탈피해 좀더 평등하고 민주적인 대안문화를 찾는 실험을 해오고 있다”고 밝힌다. ‘공동체’를 통해 보다 인간적 삶의 양식을 모색하는 이들은 교육프로그램과 여성출판운동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건강한 공동체에서의 어린이 양육을 탐색하는 어린이 캠프와 병행해 ‘공동육아’(탁아)에 관한 연구와 갖가지 토론모임이 있다. 85년 이래 현재 6집까지 발간된 무크지 《또 하나의 문화》에는 동인들의 관심이 잘 반영돼 있다.

  이처럼 다양한 입지에 서 있는 우리 여성연구의 현실에 대해 연구자 자신, 또 일선운동가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일찍이 60년대말부터 여성연구를 시작, ‘여성학계의 대모’로 불리는 이효재씨(한국여성단체연합회장)는 “학계 연구자들이 좀더 과감하게 연구범위를 확대, 제도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성과를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그는 또 “학자 개인의 참여가 아닌 집단의 연대로써 실질적 도움을 달라”고 호소했다.

 

통일ㆍ환경문제 연구도 활성화돼야

  한 중견 연구자는 “현재 학회에 가입하지 않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 여타 학회의 경우처럼 2~3년내 학회로 수렴돼 공동연구의 장이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여성단체연합 부회장 이미경씨는 그간의 여성학의 성과를 “여성운동의 자원확보라는 면에서 대단히 반가운 일”이라 평하면서도 여성운동과 여성학의 ‘쌍방향적’ 요구를 강조했다. 그는 또 운동하는 이로서 학계와의 연계가 미흡해 몹시 아쉽다며 “여성학연구의 생명력인 진취성과 도전성을 살려갈 때 상호보완적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운동가 및 여성연구자들이 이론적ㆍ실천적 지향에서 이처럼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이들이 항상 별개의 행보를 해온 것만은 아니다. 기본적 여성권익의 쟁취를 위한 활동에서는 연대를 모색해왔다. 80년대 우리 여성계의 수확이라 할 수 있는 가족법개정이나 고용평등법(시행상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의 제정을 위한 공동의 참여가 대표적 예이다.

  이렇게 볼 때 지난 몇년간 치열했던 여성해방이념 논쟁이나 입장 차이가 여성운동의 향방을 타진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운동의 전개나 여성의 삶의 질을 높이는 실질적 연구가 더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또한 향후 과제로서 통일ㆍ환경문제 등 여성이 주체가 돼 풀 수 있는 주요 문제에 관한 연구도 활성화돼야 할 것이다. 중견ㆍ소장이 함께 하는 공동의 장 속에서 삶의 현장과 밀착된 연구로 한국 여성학이 만개할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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