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세상’ 외치다 스러지다
  • 김 당 기자 ()
  • 승인 1990.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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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세로 타계한 趙英來 변호사 / 인권ㆍ노동운동에 뚜렷한 발자취

“주위에 갚아야 할 빚이 많다”면서 강한 투병 의지를 보여왔던 변호사 조영래씨가 끝내 세상을 떴다. 조씨가 자신의 병을 알게된 때는 지난 8월말께. 서울대병원에서 폐암 진단과 함께 ‘3개월 시한부’라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조씨는 지난 10월말부터는 평소 알고 지내던 청화 스님의 주선으로 전남 곡성군 태안사에서 한방 및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받으며 요양을 해왔다. 그러다 12월10일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조씨는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틀만인 12일 0시8분께 43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다. 한살 아래인 부인 이옥경씨(여성민우회 부회장)와 그날 고입 연합고사를 치를 아들 일평(15)과 무현(9)을 남기고.

 조씨는 47년 3월26일 대구에서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했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경기중ㆍ고를 다니는 동안 가정교사를 해 학비를 벌어야 했다. 그렇다고 공부만 잘하는 가난한 고학생은 아니었다. 고3때인 64년 6ㆍ3사태 때에는 데모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 사람은 법을 배운 전태일”

 65년 ‘별 뜻없이’ 서울대 법과대학에 응시하여 서울대학교 전체수석이라는 영광을 안았다. 대학 4년 동안 전공에는 취미를 못붙이고 한일회담 반대를 시작으로 삼성재벌 밀수규탄, 삼선개헌 반대, 교련 반대, 공명선거 쟁취 등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그렇게 대학을 마치고 69년 대학원에 진학, ‘기질에 맞는’ 변호사가 되려고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러나 고시 준비중이던 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어느 청년 노동자의 분신자결을 겪고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지난해 《시사저널》(11월12일자)과의 인터뷰 기사에서도 조씨는 “박정권에 대한 비판적 생각을 확고히 하게 된 것은 3선개헌과 전태일 분신사건을 본 뒤부터였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이듬해 2월 사법고시에 합격, 사법연수원에 들어갔으나 71년11월 연수원생 시절에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에 연루된다. 조영래 장기표 이신범 심재권 등 4명이 정부를 전복한 뒤 가칭 민주혁명위원회를 구성, 새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는 것이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얼토당토 않은 ‘사건전모’였다. 징역 1년6개월이 확정되어 73년 4월 만기출소했으나 이듬해 4월 다시 민청학련사건으로 수배자가 된다.

 조씨는 도피에도 귀재였다. 이때부터 80년 3월 수배해제 및 복권시기까지 그가 세운 수배생활 6년의 기록은 학생운동권 사상 최장기 기록으로 남아 있다. 더구나 도피중에도 ‘할 짓은 다하고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연수원 시절에 사귄 이옥경씨와의 ‘도킹’이 자주 목격되곤 했다. 두사람은 75년 2월에 결혼했다. 수배중 그가 ‘한 짓’으로 대표적인 것은 전태일 전기 집필이다. 3년여만에 탈고한 전태일 평전은 나중에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노동운동의 교과서가 된다.

 사법고시 합격 10년만에 변호사가 된 조영래씨의 ‘사는 방법’은 남달랐다. 비록 8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시민운동(망원동 수재 사건), 여성운동(이경숙 사건), 인권운동(권인숙 사건), 노동운동 분야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조씨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해고무효소송 같은 이름없는 노동자의 밥줄이 걸리 사건이었다. 대개 무료변론이었고 패소율도 높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이 기록한 ‘전태일의 삶과 죽음’ 탓이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12월14일 영결식장에서 그와 가까이 지낸 한 기자는 그를 ‘법을 배운 전태일’이라고 평했다. 그 ‘법을 배운 전태일’은 죽어서도 모란공원 전태일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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