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사건 인 前 이미 사채시장 ‘썰물’
  • 김방희 기자 ()
  • 승인 2006.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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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손’들 해외도피 후 李지점장 CD 손대


 

사채업자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전 상업은행 명동지점장 李希道씨의 자살사건 후 두명의 사채업자와 약속한 인터뷰가 무산됐다. 사채시장의 은어로 ‘잔치’(채권수집가인 ‘찍새’와 ‘큰손’간을 중개하는 규모가 작은 전주)에 해당하는 둘은 똑같이 여비서에게 “지방 출장중”이라는 메모를 남겼다.

 자살사건의 여파로 사채업자들은 금융시장에서 꼬리를 감추고 있다. 지난 11월 21일 주식시장에선 큰손들이 주식을 내다 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위조CD는 마지막 영업 작품

 그러나 금융 관계자들의 해석은 다르다. 이들은 “큰손들은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영업을 청산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사채업자들이 큰 돈을 벌 것이라는 통념과는 달리 자살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사고채권에 손을 대거나 위조 양도성예금증서(CD·보조기사 참조)에 손을 대 큰 손해를 본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자살사건이 사채시장 전체에 대한 조사로 비화되고 있는 요즘 큰손들은 이미 ‘해외 출장중’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사채시장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이런 움직임이 자살사건의 배경이 됐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분석이다. 이지점장을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 중 하나라 추정되는 위조 양도성예금증서는 한국을 떠나기로 오래 전에 마음을 굳힌 큰손들의 마지막 작품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채업자들은 해외출장을 결심했을까. 사채업자들은 사채에 대한 정부의 태도에 따라 부침을 거듭해왔다. 지난 72년에 있었던 ‘8·3 조치’는 이들의 숨통을 죄어놓았다. 이 조치로 회사에 빌려준 사채에 대한 원금과 이자지급은 일순간에 동결됐다. 이런 상황에서 사채업자들은 신속한 정보와 상황 판단만이 살길이라는 지혜를 터득했다. 물론 정부가 이들에게 항상 철퇴를 휘두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5공화국에 들어서는 사채를 제도 금융으로 편입하기 위해 단자회사 설립을 허가하고. 완매채와 같은 금융상품을 허용했다. 85년부터 완매채 거래가 전면 금지된 뒤에는 양도성예금증서의 발행을 허가해 숨통을 터주었다. 6공 정부는 사채업을 제도금융으로 완전히 끌어들이기 위해 애썼다. 단자회사를 은행과 증권으로 전화시키면서 부동산과 주식회사에 손을 댔던 큰손들을 잡아들였다

 항상 돈이 모자라는 사회에서 사채시장은 ‘필요악’이라고 볼 수 있다. 사채시장의 필요성에 비중을 더 두느냐, 아니면 사채시장이 빚어내는 부작용을 더 중시하느냐에 따라 정부의 대응방법은 달라진다. 사채시장을 보는 정부의 시각은 금융시장의 동향과 관련이 깊다고 볼 수 있다.

 최근 금융시장 상황은 사채업자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모든 대통령 입후보자가 금융실명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즉각 실시에서 조만간 실시에 이르기까지 시기에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앞으로 5년안에 금융실명제는 실시될 것이 확실해 졌다. 두 번이나 금융실명제 실시를 유보한 상태에서 이제 더 이상 미룰 가능성이 없다고 사채업자들은 판단했을 것이다. 돈세탁을 생명으로 여기는 사채업자에게 금융실명제 실시는 충격적인 일이 될 것이다.

금리 떨어져 사채시장 더 위축

 사채시장의 위축을 재촉한 것은 최근의 갑작스러운 금리 하락이었다. 지난해 말 23~24%까지했던 시중 실세금리가 자살사건이 나기 직전에는 12~13%까지 떨어졌다. 무려 10% 가량이 떨어진 것이다. 고금리 상황에서 성행하는 사채는 갈곳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부동산, 증권까지 침체상태이다. 최근 사채업자들과 접촉했던 증권회사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사채업자들은 전업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며 위기의식을 내비쳤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지하 금융시장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야 않겠지만, 사채시장이 이미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사채시장의 위축은 사채업자의 돈을 끌어들여 수신고를 높이고, 개인적인 자금조성을 통해 이들에게 보답해온 이씨와 같은 은행지점장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고금리였을 때와 달리 금리가 떨어져 자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면 사채업자와 거래해온 은행지점장들은 별도의 자금조성을 위해 정말 다급한 기업에 돈을 빌려줘야 한다. 그렇게 되면 금융사고의 위험성은 당연히 커질 수밖에 없다. 긴급히 자금조성을 해야하는 이지점장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조 양도성예금증서에 말려들었다면, 대형 금융사고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사의 초점은 이지점장이 조성한 자금을 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했는지 여부에 쏠려 있다. 하지만 전체 금융시장 구조로 보면 이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사채시장과 인연을 맺어야 능력 있는 은행원이 된다는 금융계의 현실이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그러나 금융실명제 실시와 금리 인하라는 조건이 무너질 때 해외로 출장간 큰손들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것은 미래를 한층 걱정스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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