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시비에 노·DJ 핫라인 불통
  • 김재일 정치부 차장 ()
  • 승인 2006.05.0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거 뒤’ 걱정하는 중립내각…형평 의심받을 사건 잇달아


 

 선거 종반까지도 정부의 중립성 문제는 시비거리였다. 노태우 대통령과 현승종 총리는 엄정 중립을 여러 차례 천명했지만, 정부의 중립성을 의심할 만한 현상이 나타난 데 대해 야당이 문제를 삼은 것이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민자당이 승리하면 중립성 시비는 선거 후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를지 모른다. 표차가 근소할 경우 낙선한 쪽에서 쉽사리 승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각 정당이 선거운동에 돌입한 후 첫번째 중립성 시비는 김복동 의원 ‘납치’ 사건으로 일어났었다. 대구 지구당에 내려가 민자당을 탈당하겠다고 발표하려던 김의원의 승용차를 경찰과 기관원들이 가로막고 그를 서울로 압송한 사건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주당 김대중 후보와 국민당 정주영 후보는 ‘가족 문제’라는 노대통령의 말을 애써 믿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김의원 사건이 벌어진 직후 청와대 회동에서 두 야당 후보는 관료 하부조직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노대통령과 현총리의 중립 의지를 믿는다고 말했다.

중립 첫시비 김복동 ‘납치’ 사건

 노대통령의 9·18 탈당 선언 직후부터 청와대와 동교동 사이에는 핫라인이 가동되고 있었다. 노대통령 직계 가족 중 한사람과 김후보의 비서가 수시로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양쪽 분위기를 전달함으로써 노대통령과 김후보 사이에 교감이 이뤄지도록 했다. 청와대측 인사는 가족끼리 이야기를 나눈 내용까지도 소상하게 동교동에 전달해 중립의지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김의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청와대측 인사는 노대통령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 ‘진짜 가족 문제’였다고 해명했다. 노대통령은 김의원의 탈당 소식을 처음 듣고 그를 만나 이야기나 들어보려고 한 것인데, 밑에서 난리법석을 피웠다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난 것은 노대통령이 중립을 지키려 했다 하더라도 집행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중립을 훼손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그룹 수사로 재발

 그후 당분간 잠잠했던 중립성 시비는 경찰의 현대그룹 수사로 다시 촉발됐다. 당사자인 국민당은 ‘편파 수사’라며 극심하게 반발했다. 민주당 역시 국민당과 보조를 맞춰 정부의 중립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국민당과 민주당의 불법 선거운동에 대해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적발하고 관련자를 구속까지 하면서, 민자당의 경우 신고된 불법 행위에 대해 늑장 수사를 하는 것은 명백한 특정 후보 편들기가 아니냐 하는 것이다. 민자당 불법 행위에 대해 정부 수사가 한박자 느렸다는 데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국민당은 특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관권 개입 사례를 폭로했다. 국민당측은 청와대와 안기부가 박태준 의원의 귀국과 국민당 입당을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의원은 현대 신화와 포철 신화를 접합해 우리 나라를 경제대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국민당에 입당하기로 정주영 후보와 합의했는데, 관권의 방해공작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주영 후보는 곧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주장을 철회했으나, 국민당 당직자는 여전히 “박의원을 설득하기 위해 이병기 의원 수석비서관이 동경을 다녀온 사실을 확인했다. 이는 청와대 관계자도 시인했다”라고 주장했다.

 김동길 선거대책위원장은 안기부가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직능·사회 단체를 지원하는 보좌관실을 운용한다고 폭로했다. 며칠 후 민주당은 국민당의 발표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정주영 후보는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손진곤 안기부 제1차장과 이건개 서울지검장을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뛰는 사람으로 지목했다. 특히 이지검장은 무리를 하면서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발벗고 나섰다고 국민당 당직자는 비난했다. 민주당의 생각도 국민당과 비슷했다.

 정주영 후보는 노대통령의 중립성에 대해 문제삼는 것을 되도록이면 삼가는 인상이 역력했다. 박태준 의원에 대한 외압설과 관련해 청와대를 물고들어갔던 부분을 즉각 철회한 데서도 노대통령에 대한 배려를 읽을 수 있다. 노대통령 중립을 대세로 몰고가는 편이 관료조직의 동료를 막아 선거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때문이었다.

 김대중 후보 역시 같은 인식을 했으나 선거 막판에 노태우 대통령의 중립의지가 훼손됐다고 비판했다. 이는 노대통령의 집권당 탈당 의도를 의심하고 있음을 말한다. 노대통령의 민자당 탈당은 김영삼 후보의 당선을 돕기 위한 고도의 전술이라는 해석에 더 큰 비중을 둔 것이다. 박태준 의원의 새 한국당행 좌절, 강재섭 의원을 비롯한 월계수회 소속 의원과 김복동 의원의 민자당 탈당 저지, 그리고 박태준 의원이 국민당 입당방해는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에 배신감 느낀 DJ

 김대중 후보의 한 측근은 “김후보는 이제 노대통령의 완전 중립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더욱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노대통령이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를 놓고 외형상 등거리 외교를 한다고 분석했다. 또 그가 양쪽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김영삼 후보 쪽에 타격이 갈 만한 움직임을 저지해 전체적으로는 그를 돕는다고 주장했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여권 인사도 노대통령은 김영삼 후보에 대해 ‘중립적 지지’입장이라고 말했다. 퇴임 후를 보장받기 위해서도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과연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지 단언할 수 없다.

 문제는 정부의 선거관리가 중립적이 아닌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데 있다. 최근 대륙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중립내각의 선거관리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응답자(37.7%)가 공정하다는 응답자(20.9%)보다 훨씬 많았다. 중립내각에 대한 직접 평가는 아니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여론조사도 선거 분위기가 공명하다는 응답보다 공명하지 못하다는 응답이 4대 6의 비율로 많았다.

 적지않은 전문가는 일각의 인식과는 달리 정부의 중립의지를 심각하게 의심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말한다. 국민당 후보를 총력 지원하는 현대그룹에 대한 수사가 정부의 중립을 현저하게 훼손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박찬욱 교수(서울대·정치학과)는 “경찰의 수사 태도 등 법 집행은 형평을 잃은 것 같다. 그러나 더욱 노골적인 관건개입이 있어야만 중립성 시비가 쟁점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외양적으로나마 중립 입장에 서려고 애썼고, 현승종 총리는 처음부터 선거관리를 위해 한시적으로 기용된 인물이다. 법률학자 출신인 현총리의 눈에는 현대의 지나친 서거운동 형태가 불법 행위로 보였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양심에 거리낌없이’ 선거를 관리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관료 경험이 없는 그는 중립성 유지와 관련해 본질적으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 왜곡된 보고 속에서는 조직의 포로가 되기 십상이다.

책임은 결국 ‘盧·玄’이 져야

 전문가들은 검찰과 안기부의 체제 지향적인 타성을 지적한다. 고위 관리들은 정권이 바뀌는 데 따른 신분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권력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편향된 신념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이 비교적 거부감이 덜한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해 음양으로 선거에 간여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일반적으로 비중립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치인에 대한 영향력 행사, 특정 정파에 대한 박해, 편파 수사 따위 처사는 노대통령이 현총리와 관계없이 기득권 세력에 의해 자발적으로 저질러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선거가 끝나고 중립성 시비가 일 경우, 그 책임이 노대통령과 현총리에게는 없는가.

 전문가들은 사후 책임은 결국 위로 올라간다고 말했다. 노대통령과 현총리는 천명한 입장과 동일하게 행동하고 감독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