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연극, 거장이 없다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2006.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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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성 부족·포르노 연극 기승…유덕형 등 복귀 기대


 

 70~80년대의 한국연극계는 화려했다. 그때도 물론 극단의 살림은 궁핍했고 비평가의 독설은 잔인했으며 문화면의 연극지면은 인색했다. 그러나 고급한 관객의 관심을 유지시키는 힘은 팽팽했다. 연극계 인사들은 그 시절을 ‘한국연극의 문예부흥기’로 회고한다.

 한국연극의 메카로 불리던 드라마센터가 연출가 柳德馨 安民洙 金雨玉 등을 배출하면서 황금기를 누린 것도 그 즈음이다. 유덕형은 대사 위주 신파연극의 구태에서 겨우 벗어나 있던 한국연극을 단숨에 현대연극으로 끌어올리면서 연출이 얼마나 창조적인 작업인가를 보여준 최고의 연극인이다.

 트리니티대학과 예일대학원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던 그가 귀국하여 68년부터 81년까지 창조해낸 일련의무대는 매번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생일파티〉〈초분〉〈태〉〈하멸태자〉〈자아비판〉〈봄이 오면 산에 들에〉등 16편의 작품들은 해외 순회공연 중 피터 브룩이나 그로토스키 등 세계적인 연출가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으며 소련연극제의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에 첫발을 내딛기도 했다.

유덕형 김우옥 표재순의 도전과 좌절

 그는 희곡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희곡이 주는 이미지와 상황만을 추출하여 ‘유덕형의 연극’을 만들어냄으로써 희곡을 극복하고 연기자를 장악했다. 교통정리식의 연출, 대사중심의 사실주의 연극 전통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극 밖의 인물이었던 홍신자 국수호 김영동 등을 연극인으로 포섭하였고 오태석 최인훈과 같은 작가들에게 ‘내가 작품을 쓰면 그것을 연출해낼 사람이 있다’는 믿음을 주어 왕성한 작품활동을 부추겼으며 전무송 이호재 윤소정 박근형 같은 큰배우들이 그의 작품을 연기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연극계에서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 질문에 대해 ‘공동연구(collaboration)가 불가능한 연극 현실’ 때문이라고 답변한다. “나는 늘 우리의 신화와 전설이 가지는 상징성과 제의성을 내 작품의 원형으로 삼아왔다. 귀국한 이후 몇 편의 번역극 외에 창작극에만 몰두한 것은 우리 것을 세계화하려는 도전이었다. 그러나 내 작업은 너무나 고독한 것이었다. 희곡이 전무했을 뿐 아니라 관객은 ‘메타포’를 이해할 훈련이 돼있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연극은 연출가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분야의 전문성을 요구했다. 결국 나는 소진했다.”

 무대에 올리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그가 더이상 ‘사기를 쳐서는 안 된다. 지금은 교육을 할 때’라고 판단한 것은 그 때문이다. 현재 실기 위주의 예술교육을 실시하는 서울예술전문대학의 학장으로 재직중인 그는 그러나 늘 연극으로 회귀하는 꿈을 꾸고 있다. 그의 책상 서랍 깊은 곳에는 〈따뜻한 강〉〈바리더기〉등 수십권의 희곡이 수집되어 있다.

 김우옥은 뉴욕대학에서 연극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지난 80년에 ‘구조주의 연극’이라는 첨단연극으로 큰 충격을 몰고 온 연출가이다. 무대 위에 비행기 모형, 실물 자동차가 등장하고 대사는 거의 배제한 채 연기 물 빛 세 가지 요소로 무대를 채운 작품 〈내물빛〉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제작비(1천만원)를 들였으나 관객동원에는 참패했다. 이듬해 〈춤〉〈겹괴기담〉등 일련의 구조주의 연극을 계속 내놓았으나 일반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후 〈자전거〉(83)를 끝으로 순수연극무대에서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유덕형이 한국연극을 신극에서 현대극으로 끌어올렸다면 그는 실험극의 단계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매우 전위적인 작가군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작업이 당시 관객들에게 납득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김우옥은 “10년이 지난 지금쯤 그 공연들이 나타났다면 수용의 질과 폭이 좀 나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연극은 문학이 아니다. 연극은 매우 낯선 것을 체험하게 하는 공연행위”라는 그의 시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값진 것이었으며 고급한 관객들로 하여금 세계연극의 현실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체험할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그는 순수연극에는 손을 떼고 있으나 85년부터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이름없는 별들〉시리즈를 비롯해 해마다 뮤지컬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대작을 남긴 연출가로서 기왕의 작품을 뛰어넘는 작품을 남겨야하겠다는 부담감,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자존심 등은 여전히 재기를 망설이게 하고 있다.

 김우옥이 ‘시대를 너무 앞서가 버린’ 연출가로서 좌절한 경우라면 表在淳(서울방송 전문이사)는 ‘시대에 지나치게 순응한다’는 비평 때문에 좌절한 경우라 하겠다.

 표재순은 텔레비전 드라마연출가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나 그가 무대에 바친 정열은 과소평가 되어 있다. 56년 〈비는 행운을 싣고〉로 데뷔한 이래〈노비문서〉〈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등 30여편의 연극을 연출했으나 ‘방송국 사람’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된 일이 거의 없었다.

“한국연극 몰락엔 평론가 책임도”

 그는 비교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작품을 제작했으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테크닉과 관객을 확보하는 재주는 당대 프로 중의 프로였다. 특히 무대형상화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여러 연출가가 포기해 빛을 보지 못했던 최인훈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말더듬이 연극으로 재구성하여 초연함으로써 창작극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작품은 국악기의 생음악을 음향으로 도입하고 탈을 연극에 응용한 첫 실험이기도 했다.

 ‘밥은 방송국 일로 먹고 예술적 성취감은 연극에서 얻겠다’던 그의 열정이 무너져 버린 것은 〈빠담 빠담 빠담〉(77년)의 ‘상업성 시비’ 때문이었다. 프랑스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일대기를 그린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큰 규모로 수많은 관객을 모았으니 윤복희 곽규석을 주연으로 발탁한 것이 시비의 초점이 되었다. 이태주를 비롯한 일단의 비평가집단은 이 연극을 가리켜 ‘유행과 시류에 아부한 상업근성의 신파악극’이라고 매도하였으며 한국 연극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연극 안보기 운동’까지 벌어졌다. 이 일로 깊이 상처를 받은 표재순은 80년 〈페드라〉를 끝으로 연극무대와는 단절한 채 지내고 있다.

 그는 “예술성이 깊어지면 대중성도 깊어지게 마련이다. 70~80년대에 싹튼 연극 문예부흥의 조짐을 압살하여 일단의 연극엘리트들을 대거 퇴장시킨 데는 평론가들의 책임도 크다”고 주장한다.

 우리 연극계가 이들을 잃어버린 지도 10여년이 흘렀다. 이제 이들을 되돌려 올 방안은 없는 것일까. 페미니즘으로 위장한 포르노연극이 일회성 관객에 기생하여 일체의 연극적 실험을 저지하는 90년대의 연극계가 이들의 복귀를 통해 회복의 실마리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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