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에 비상구는 없다
  • 베를린. 김진웅 통신원 ()
  • 승인 1994.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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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 회교도 운명 풍전등화… “비하치는 생지옥 ”



 보스니아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비하치 시에 대한 세르비아측의 총공세에 대해 유엔과 나토가 대응하기를 포기한 것은 전세를 침략자 세르비아측에 기울게 만들었다.

 중간선거에서 참패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선거 직후인 지난 11월 초 보스니아에 대한 무기봉쇄를 완화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해, 보스니아 정부군에게 무기를 공급할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 전환은 곧 세르비아군의 총공세를 불렀다.  세르비아군은 지난 10월 보스니아 정부군에 빼앗긴 지역을 탈환하는 한편, 유엔 보호 지역 비하치에 맹공격을 시작해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감으로써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고 있다.

 이들은 또한 자기네가 점령한 지역에 유엔군 3백50명을 인질로 잡아놓고 있다.  세르바아군의 지도자 카라디치는 “비하치에 있는 보스니아군이 무장을 해제할 때까지 전투를 계속하겠다 ”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나토군은 유엔 안보리의 공습 허용 결정을 바탕으로 우드비나 군 비행장을 비롯해 세르비아의 군사 요충지를 폭격하였다.  그러나 나토군의 공습은 세르비아의 공세를 막기는커녕 지연시키는 효과조차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 후에도 유엔이나 나토는 종이 호랑이처럼 세르비아에 대해 공습 위협만 되풀이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리 미 국방장관은 “세르비아는 이미 영토의 60%를 점령하였다.  회교계가 이를 탈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 말해 사실상 세르비아의 일방적 승리를 시인하였다.

 이로써 유엔은 비하치에 살고 있는 7만여 회교계의 생명 보호를 사실상 포기한 셈이다.  서방 언론에 비치고 있는 비하치 시의 광경은 생지옥이나 다름없다.  “시민들은 모든 희망을 포기한 채 울부짖고 있을 뿐이다.” 아비규환 상태에 빠져 있는 비하치의 상황에 대한 현지 시장의 언급이다.

 비하치에 주둔해 있는 유엔군(방글라데시군 1천1백27명)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방글라데시군 지휘관 살렘은 “우리는 먹을 음식도, 싸울 무기도, 부상자를 치료할 의약품도 없다 ”고 말했다.  그는 사라예보와 자그레브에 있는 유엔군 본부에 긴급히 구호 요청 전문을 보내는 한편, 구호 물자가 오지 않을 경우 7일 안에 철수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살육의 칼자루 쥔 세르비아
 보스니아 인구는 회교계 44%, 세르비아계 31%, 크로아티아계 17%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는 “세르비아를 위한 단일 국가 건설이 빵보다 더 중요하다 ”며 종족 추방 전쟁을 시작한 세르비아의 카라디치가 전국토의 약 3분의 2를 이미 수중에 넣고 비하치 정복을 앞둔 유리한 상황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원하는 국가를 법적으로 보장받을 때까지 현재 위치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태세다.

 그렇게 때문에 세르비아는 비하치에서 부분적 휴전을 하거나 군대를 철수하라는 유엔과 중재단의 요청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언재, 어떤 식으로 평화 협상을 할 것인가는 유엔이나 나토 또는 유럽 국가들의 소관에서 떠났다.  칼자루는 세르비아의 카라디치가 쥐고 있는 것이다.  미국 · 러시아 · 영국 · 프랑스 · 독일로 구성된 협상중재단이 내놓고 있는 평화 협상안이 앞으로 49 대 51이나 50 대 50, 혹은 제 3의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결정되든 세르비아측으로서는 유리한 고지를 굳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카라디치는 “러시아와 영국은 이미 우리 편에 서 있다.  독일도 우리가 회교계에 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며 앞으로 국제 중재단의 협상에서도 자신의 목표가 달성될 것임을 자신했다.

 그동안 유엔을 비롯한 국제 회교계와 중재단의 협상안에 어느 정도 동의해 왔던 크로아티아계는 세르비아의 총공격에 더 이상 당하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더구나 믿었던 유엔이나 나토가 비하치를 포기한 이후 이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들은 앞으로 무기 금수 조처가 해제되면 세르비아에 대해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설 방침이다.  크로아티아는 이미 “비하치가 함락당하면 우리는 비하치를 공격하겠다 ”고 선언하였다.

서방 동맹국, 미국의 강경 자세 못마땅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도 “어느 누구도 우리 15만 병사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강요할 수 없다 ”며 세르비아에 적극 대항할 뜻을 강하게 비쳤다.  과거와 달리 완전히 열세인 상태에서 평화 협상이 진행된다면 자기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할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최소한 이전 위치까지라도 전세를 되돌려 놓으려 하고 있다.

 비하치 위기로 드러난 유엔과 나토의 정책 실패는 미국과 유럽의 갈등을 더욱 깊게 하고 서로 간에 공방전을 불러 일르켰다.  미 공화당 봅 돌 의원은 영 · 불 유엔사령부에 대해 “시민 보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스스로 위험에 빠지는 실책을 자초하였다.”고 싸잡아 비난하고, 유엔군 사령과 미하엘 로스를 즉각 해임하라고 요구하였다.  지난 중간선거 결과 미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한 공화당의 실세이자 대통령 출마 야심을 갖고 있는 그는 한 술 더 떠 앞으로 유엔에 대한 재정 지원을 축소시킬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더 이상 정치적 해결 방안이 없다는 것이 보스니아 사태에 대한 미국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더구나 의회의 압력에 직면한 클린턴 정부는 유사시 독자적으로 보스니아에 대한 무기 금수 조처를 해제하고 회교계에 적극적인 군사 지원을 감해할 이른바 ‘과감한 수동적 정책 ’을 세우고 있다.  “미국인들이 이미 보스니아군 막사에서 생활하면서 그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다.  그들은 회교계 병사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치고 활주로 건설을 도와주고 있다 ”고 보스니아 중부 유엔군 보호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한 영국군 장교가 확인하기도 했다.  보스니아군에 대한 군사 지원에 필요한 예산으로 미국의 강경주의자들은 이미 50억달러를 책정해 놓고 있다.

 이에 반해 종전의 중립 정책을 고수하려는 서방 동맹국들은 미국의 이러한 강경 자세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서유럽 국가들은 세르비아의 공습보다도 미국이 보스니아를 지원해 군사 공격을 개시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다.  허드 영국 외무장관은 “이번 비극에 군사적 해결책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 미국측을 향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나토가 현재의 정책을 고수해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윌리 클로 나토 사무총장도 “미국이 무기 봉쇄 조처를 단독으로 해제할 경우 주둔 유엔군을 전면 철수시킬 것 ”이라고 경고하였다.

 특히 영국 · 프랑스 등 나토 강대국들은 자구 병력 철수 문제로 크게 고민하고 있다.  경무장 상태로 보스니아에 주둔하고 있는 2만4천여 유엔군을 철수시키려면 새로운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브뤼셀의 나토 전문가들은 유엔군이 안전하게 철수하려면 유엔군 주둔 지역마다 3∼5개 사단의 지상군 병력이 추가로 투입되어야 한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32개국에서 파견된 유엔군은 미국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곤란한 처지이다.

이슬람권 국가들 끼어들 가능성
 세르바아 쪽으로 기운 보스니아 내전의 전망은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있다.  알바니아 · 마케도니아 등 주변 국가로 확대된 가능성도 있다.  나아가 이슬람권 국가들이 적극 개입함으로써 해외, 특히 유럽에서 회교계의 테러 행위가 더욱 심해질 가능성도 커졌다.  영국 ·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들이 두려워하는 점도 바로 이러한 상황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발칸 반도의 분쟁이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되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들의 집안에까지 전쟁의 불똥이 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91년 여름 전쟁이 시작된 이후 3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유고 내전은 지금까지 엄청난 인적 · 물적 피해를 가져왔다.  특히 종족 추방을 목표로 한 정복 전쟁은 지금까지 약 30만명의 인명을 희생시켰다.  이 중 세르비아군에게 목숨을 잃은 회교도는 14만2천여 명에 달한다.  회교도를 말살하려는 세르비아군의 잔학상은 회교도 여성을 계획적으로 추행한 숫자가 무려 4만∼7만명으로 추정되는 사실에서도 짐작된다.  그리고 전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2백만명이 죽음을 피해 피난길에 올라 있다.  침략자 카라디치 집단 외에 강대국들도 이들의 피해에 대해 공동 책임이 있다고 서방 여론들은 질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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