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 안왔다”
  • 김당 기자 ()
  • 승인 1995.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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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연수생들 “기술 안 가르치려면 노동자 대우를”



 1월9일부터 서울 명동성당 앞마당에서 시작된 네팔인 산업기술연수생 13명의 농성이 9일 만에 끝났다. 묵다 지엠씨(26)등 네팔인 기술연수생 13명은 1월 17일 밤에 푸루쇼탐 쉬레스타 일본 주재 네팔 대리대사의 중재로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중소기업중앙회) 박상규 회장과 8개 항의 합의문에 서명하고 농성을 풀었다. 이로써 농성 기간에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32개 단체가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 인권보장을 위한 공동대책위(공동위)'를 발족하는 등 사회적 관심을 끈 산업기술연수생 문제는 일단락 했다. 그러나 이같은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농성을 시작하면서 내세웠던 산업기술연수생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묵다 지엠씨 등 네팔인 산업기술연수생 13명이 '외국인 노동자 피난처'(소장 김재오 전도사)를 찾은 날은 1월 8일. 그 날 새벽 한국인 공장장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긴급 피난을 요청해온 네팔인 여자 연수생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여론에 호소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다음날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하며 이들이 내건 요구 조건은 다섯 가지였다. △기술연수생 비자로 데리고 왔으니 기술을 가르쳐줄 것 △기술을 안가르치고 하루 12~13시간 일을 시키려면 그만한 대가를 줄 것 △인력관리회사(동양인력개발)에서 빼앗아가는 월급을 본인에게 되돌려줄 것 △구타와 욕설을 하지 말 것 △여권을 돌려주고 감금하지 말 것이었다.

3개월 동안 한푼도 못받아

 이같은 문제 제기는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국립 네팔 대학 역사학과 2학년인 묵다 지엠씨가 한국에 온 것은 지난해 6월9일. 이번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한 모두 바자가이(20), 어닐 다칼(22), 프레임 라나(26) 등 다른 네팔인 연수생들과 함께 수색의 ㅂ가구에 배정된 묵다씨는, 회사를 탈출하기 전까지 자기가 한국에서 겪은 3개월을 이렇게 말했다.

 “만일 네팔에서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 한국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인력회사의 미스터 전(룸비니인력개발 서울사무소 소장 전영수씨)이 우리를 회사 밖으로 못나가게 해서 마음놓고 회사 밖으로 나다닐 수도 없었다. 회사에서는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9시간30분씩 일했지만 임금은 인력회사가 수령해 가는 통에 3개월 동안 한푼도 못받았다.”

 게다가 묵다씨와 동료 3명은 지난해 8월20일 인력회사에 끌려가 미스터 전과 직원들로부터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이들이 자신들의 임금을 회사에서 직접 받았기 때문이었다. '미스터 전'은 공장 사장에게 '인력회사에 월급을 주지 않으면 연수생들을 다른 회사로 옮기겠다'고 위협하고 나서, 이들의 손에 사제 수갑을 채워 양천구에 있는 인력회사 사무실로 데려가 다른 직원들과 함께 마구 때렸다. 결국 묵다씨와 그 동료들은, 한국 생활에 좀더 익숙해지면 네팔에서 한국에 올 때 진 빚(송출 계약비와 부대 비용 등 평균 2천달러)을 갚을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공장으로 옮기려고(불법취업) 탈출을 꾀하다가 외국인 노동자 피난처를 찾았고, 평소 연락을 하고 지내던 여자 연수생에 대한 성폭행(강간치상) 사건을 계기로 농성을 감행한 것이다.

 이번 농성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노동부와 중소기업중앙회 등 관련 기관도 비교적 신속하게 문제점을 인정하고 나름대로 개선책을 내놓았다. 거기에는 이들의 농성이 장기화하고 여론을 탈수록 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세계화라는 명분이 훼손된다는 우려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노동부·법무부·통상산업부 등 관계 부처 실무자회의에서 1월12일 내놓은 개선책은 △연수 수당 본인 지급 △여권 본인 소지 △비인도적인 연수 계약 개선 등이었다. 사안의 핵심인,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로 인정하는 근본적인 개선책은 상반기중 공청회 등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쳐 결정하기로 유보했다.

 그러나 해결 기미를 보이던 연수생 제도 개선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일부 보수 언론의 보도였다. 정부가 네팔 근로자들의 조건을 들어주자 이들의 농성이 정치 투쟁의 기미를 보이며 변질하고 있다는 식의 1월15일자 일부 보도를 시작으로 언론의 보도 태도는 반전되었다. 이를테면 △네팔인 여성 근로자 성폭행 공장장 긴급 구속(1.10) △검찰의 외국인 근로자 체임 수사 착수(1.10) △노동부의 올 상반기중 근로 조건 개선책 마련 약속(1.10) △검찰의 연수생 폭행 송출업체 임직원 구속(1.12) △외국인 연수생 임금 본인 통장 입금과 여권 본인 소지 허용(1.12) 같은 정부의 발 빠른 요구 조건 수용 및 조처에도 불구하고, 노동부장관의 공식 사과와 한국인 근로자들과 동일한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등 정치 투쟁 기미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9일 간의 농성은 문제의 시작일 뿐”

 그러나 이같은 지적은 본질을 흐리는 피상적인 보도라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이를테면 성폭행한 공장장과 감금 폭행을 자행한 인력회사 직원에 대한 구속 조처는 이들이 요구하지 않더라도 실정법상 당연하다. 게다가 검찰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한 인력회사 대표 '미스터 전(전영수씨)'과 직원들의 경우는 이미 석달 전에 외국인 노동자 피난처가 고발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때늦은 생색내기일 뿐인 셈이다. 외국인 노동자 피난처 김재오 소장에 따르면, 지난해 10월26일 전영수씨와 폭행에 가담한 인력회사 직원들을 불법 체포 및 감금 폭행, 임금 횡령 혐의로 고발했으나, 검찰은 이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통고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 문제가 되자 검찰은 똑같은 혐의를 가지고 구속한 것이다.

 이밖에 국내 노동자와 동등한 수준의 임금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는 지적도, 이것이 농성 연수생 13명의 요구가 아니라 공대위가 성명서에서 밝힌 요구라는 점에서 사실과는 다르다. 네팔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은'한국 노동법에 따른 노동자 자격 인정'이었다. 그 의미는 구체적으로 △실제로는 노동자이면서 형식은 연수생인 현행산업기술연수제도 철폐 △최저임금 수준 이상의 선에서 재계약 체결 △사용자 단체인 중소기업 중앙회의 인력 관리 금지와 노동부에 의한 인력 관리 등이었다.

 결국 경찰에 끌려가 강제 출국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한국에 들어와 있는 2만여 연수생의 처우개선을 위해 싸우겠다던 그들은 여론에 밀려 당초의 의지를 꺾고 합의문에 서명했다. 중소기업중앙회 박상규 회장과 이들이 합의한 내용은 △체불 임금 전액 지불 △급여 직접 수령 △여권 반환 및 본인 소지 △재취업 보장 및 주 44시간 근무외 초과 근무수당 지급 △초과 근로 강요 금지 및 근로후 자유 보장 △업무상 질병·재해에 대한 치료 및 적절한 보상 등이다.

 그러나 당초 이들이 내걸었던 요구 조건의 핵심은, 연수생을 데려왔으면 기술을 가르쳐주고 그렇지 않으면 한국 노동법에 따라 노동자 자격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근로자로 인정을 받으면, 이들이 중소기업 중앙회와 합의한 근로 조건들은 합의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지엽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합의에도 불구하고 제2, 제3의 명동성당 농성 사태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셈이다. 김재오 소장에 따르면, 실제로 농성이 끝나자마자 외국인 노동자 피난처에 10여 건의 감금·폭행 사례가 접수되었다. 김소장은 “여권 반환 및 본인 소지 방침이 발표되자 이미 업주들이 연수생의 사업장 이탈이 가속화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같은 반발은 연수생들의 이탈과 농성이 사회 문제화하는 것을 일단 봉쇄하려는 관리 감독 강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다

 게다가 노동 전문가들은 9일 간의 농성으로 얻은 합의가 이행될 가능성에도 회의적이다. 한마디로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처음부터 연수생 문제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사용자 단체인 중소기업중앙회와 기업주의 문제로 책임을 전가한 것도 이같은 우려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석운 소장(노동정책연구소)의 말대로 “이번 농성 해산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인 셈이다

앞뒤 다른 정부의 해결 자세

 박소장에 따르면 한국이 시행하고 있는 기술연수 제도는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기술연수(9개월)와 기능실습(15개월)방식으로 절충 운영하고 있다.

 즉 처음 기술연수 기간에는 3개월 간의 '좌학(공부)'과 6개월 간의 실무 연수를 거치도록 하되, 그뒤 15개월 간의 기능실습 기간에는 일반 노동자 자격을 부여하여 노동법의 보호를 받게 한다. 이는 내·외국인에 차별을 두지 않는 유럽 선진국에 견주어 노동 착취라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기술연수는 가능하도록 제도화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1월20일 공대위는 기독교연합회관에서 외국인 취업연수제도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주제로 한 첫 번째 공청회를 열었다. 이같은 공청회 개최는 명동성당 농성을 계기로 사태 해결을 위해 무릎을 맞댄 노동부·통상산업부·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들도 합의한 조처였다. 그러나 공청회에는 학계·노동계·시민단체를 대표한 토론자 일색이었을 뿐 통상산업부 중소기업국과 법무부 출입국관리국 관계자는 물론, 참석을 약속한 노동부 직업안정국과 중소기업중앙회 기조실 관계자와 사용자측은 1명도 나오지 않았다.

 발제자의 한 사람인 박석운 소장은 이를 두고 “화장실 갈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딱 그격이다”라고 지적했다. 일단 농성을 해제하고 제도 개선은 천천히 하자고 재촉하던 정부 관계자들이, 농성을 풀자 제도 개선을 논의하기위한 첫 자리조차 외면하는 현재의 무사안일한 사태 인식으로 볼 때 제2, 제3의 명동성당 농성은 필연적이라는 지적이다.
김 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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