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독재자’ 아우그슈타인
  • 베를린. 김진웅 통신원 ()
  • 승인 1995.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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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피겔>을 창간하여 이를 대언론으로 키워온 루돌프 아우그슈타인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1923년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2차대전 때 대학을 중퇴한 뒤 45년 하노버의 <하노버 뉴스>에 취직하여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다 46년 창간된 <금주(Diese Woche)>라는 시사 주간지로 옮겼다. 당시 영국인이 발행하던 <금주>는 비판적인 논조로 주둔 영국군의 비위를 건드리다가, 얼마 뒤 발행인이 물러났다. 주둔군은 독일인에게 이 신문을 맡기기로 하고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다 아우그슈타인의 탁월한 재능을 인정하여 그에게 발행· 편집권을 넘겨 주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아우그슈타인은 이듬해인 47년 <슈피겔>로 제호를 바꿔 발행하기 시작했다. 독일어로 ‘거울’을 의미하는 <슈피겔>은 처음부터 제호 그대로 정치· 사회 문제를 은폐· 왜곡 없이 사실 그대로 보도하여 당시 주둔군과 독일 정부에게는 가시 같은 존재였다. ‘민주주의의 자주포(自走砲)’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아우그슈타인의 언론관처럼, <슈피겔>은 다른 언론이 감히 다루지 못하는 정치· 사회 문제를 과감히 들춰내 폭로하였다.

<슈피겔>은 종종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특유의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논조와 줄거리식의 논리 전개로 독일 국민의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오늘날 독자 취향에 영합하는 상업적 언론의 속성을 과감히 떨치고 ‘<슈피겔> 독자’를 만들어가는 언론인으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아우그슈타인은 유감없이 발휘하곤 했다.

그의 독설적인 글은 종종 정치· 사회 집단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특히 62년에는 나토의 국방 기밀을 폭로해 아우그슈타인과 편집진 4명이 구속되어 2백92일 동안 조사를 받기도 했다. ‘<슈피겔>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아우그슈타인과 <슈피겔>의 주가를 더욱 높여주었고, 언론 자유 신장에 공헌한 <슈피겔> 신화로 기억되고 있다.

독일의 전설적인 언론인 아우그슈타인의 능력은 창간 당시 1만5천 부에 불과했던 <슈피겔>을 10년이 안돼 30여만 부로, 그리고 현재는 백만~1백20만부를 기록하는 대언론으로 끌어올린 것만 보아도 입증된다. <슈피겔>은 세계 1백50여 국에 고정 독자를 갖고 있으며, 7백50여 사원을 거느리고 있다. 단일 언론으로는 독일 최대 기업이다.

모든 언론 매체가 경영과 편집이 분리된 운영 체제를 유지하는 데 비해, 그는 경영과 편집권을 한손에 거머쥔 독일 언론의 마지막 ‘이중 권력자’이다. 72년 민자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해 잠시 외도한 것을 빼고는 줄곧 언론인으로서 외길을 걸어온 그는 겐셔 전 독일 외무장관과는 절친하지만 콜 총리와는 적대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우그슈타인은 <슈피겔> 자산을 사원들에게 배분해 공동 운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총 자산의 25는 자신이, 50%는 사원이 그리고 나머지는 주간 신문 <디 차이트>를 발행하는 ‘그루너-야르’가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슈피겔>의 중요한 결정은 발행인과 두 그룹대표가 합의해 결정한다. 하지만 ‘슈피겔 루돌프 아우그슈타인 신문사’라는 회사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슈피겔>에서 아우그슈타인의 입김은 절대적이다. 뛰어난 감수성,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지성 그리고 우수와 비관이 깃든 모습으로 예리한 필봉을 휘두르는 언론인 루돌프 아우그슈타인은 70이 넘은 노령에도 여전히 <슈피겔>에 고정 사설을 쓰고 있다. 일부로부터 독재자라는 비난도 받지만, 그는 자신의 거울 <슈피겔>을 ‘사회 기관’으로 성장시킨 주인공이자 독일 언론의 전설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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