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核그늘’에 얼어붙은 통일의 길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2.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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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북한·미국 ‘핵게임’에 밀려 조기 실현 난망

 휴전선에 가로질린 ‘핵빗장’은 남북통일 신시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여전히 완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정부가 그동안 “국내용이다” “조급하다” 등의 비난을 무릅쓰고 민족문제 해결의 돌파구로 암암리에 추진해온 남북정상회담은 미국과 북한의 제2라운드 핵게임에 눌려 조기실현이 어려워질 전망이다.

 설날 무렵까지만 해도 국내외의 일치된 분석은 빠르면 3월 중순께 정상회담이 성사될 것이며 이를 위해 남북한이 공식·비공식 접촉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2월13일 李東馥 총리회담 남측 대변인을 통해 “노대통령은 △북한이 시범 사찰을 받아들이고 △핵안전협정을 조기 비준·발효시키며 △핵통제공동위원회를 조속히 구성하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갖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식 발표했다. 정부가 이처럼 정상회담에 ‘신중한’ 자세를 취하기로 한 이유는 우선 북한이 “우리 정부가 정상회담을 절실히 원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이를 남북협상의 카드로 활용”하려 하고, 분위기 미성숙을 이유로 조기 회담에 반대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강한 입김 또한 뿌리치기 힘든 요인이다. 최근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개발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정부가 정상회담을 너무 서두르고 있다”며 자제를 요청해왔다. 한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1월22일의 북·미 고위급접촉에서 캔터 미국무부 정무차관은 “핵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할 사람은 김일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상회담은 유익하고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미국이 남북정상회담에 핵문제를 주의제로 끌어들이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됐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정상회담을 보는 우리 정부와 미국의 입장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가 정상회담을 상호 화해의 지름길이자 돌파구로 교류협력 사항을 주의제로 상정하는 반면, 미국은 정상회담이 북한에 대한 압력수단으로 사용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이 지난 1월30일 핵안전협정에 서명한 뒤 북한에 대한 핵압력의 ‘두가지 길’ 가운데 하나를 잃게 됐다고 한다. 협정의 국내비준은 순수한 국내문제이기 때문에 국제원자력기구를 통한 압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남북회담을 더욱 중시하게 됐다는 것이다.

 북한은 북한대로 새로운 핵카드를 준비중이다. 북한은 핵안전협정 서명으로 “핵문제는 완전히 해결됐다”고 공언하면서 협정의 비준·발효일정을 밝히지 않고 있다. 문제는 북한의 체제유지용 핵외교가 민족적 과제의 해결을 늦추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한국정부를 통해 ‘시범사찰’을 제시해 이를 정상회담과 맞바꿀 태세이고 북한이 이같은 내용의 정상회담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이에 따라 회담의 성사 여부가 불투명해진 것은 당연하다.

 정상회담이 국내용으로 악용되거나 실속없이 서둘러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정상회담의 역사적 의의가 한반도 및 주변국의 핵그늘에 가려져 퇴색한다면 그것은 분단 후 통일의 최대 호기를 맞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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