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백여년 전부터 일본은 ‘한국연구’
  • 도쿄·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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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에서 출발, 인문·사회과학 연구 활발…정신대 자료도 먼저 발굴

 재작년 5월 방일한 노태우 대통령은 일왕 주최만찬회에서 한 일본인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과거 한때 불행했던 역사가 있었지만 한·일관계 발전에 적극 노력했던 사람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바로 아메모리 호슈이다. 3백여년 전 對馬藩의 유학자로 도쿠가와 막부를 왕래하던 조선통신사의 접대책임자였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 6대장군 이에노부 때 국학자 아라이 하쿠세키가 조선통신사의 접대가 너무 호화스럽다고 경비절감을 지시하자 이에 크게 반발했다. 그는 한국어와 중국어에도 능통한 학자였으며 한국통역관 양성을 위해 두권의 교과서를 남기기도 했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도쿠가와 막부를 왕래했다. 반대로 李朝는 對馬藩의 답례사절단이 서울로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에게 도로망 등을 염탐당해 또다시 왜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조의 조정은 대신 부산에 왜관의 설치를 허용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총영사관에다 상사의 기능을 겸한 이곳에 일본측은 항상 4백~5백명을 상주시키고 오히려 조선의 사정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들이 결국 그후 한반도 침략의 첨병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의 한국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이같이 에도시대부터라고 볼 수 있다. 주자학 연구에서 출발한 한국연구가 이후 식민지통치시대의 언어학 문학 역사학 연구로 이어졌고, 지금은 정치 경제 국제관계론 등 사회과학 분야에도 한국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또다시 되풀이된다. 지난 1월14일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을 하루 앞두고 우리 언론들은 갑자기 소학생 여자정신대 문제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소학생 여자정신대 문제는 이미 작년 여름 일본 후지TV 계열의 도야마TV가 특집보도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일본에서는 “한국정부가 대일교섭의 압력재료로 이용하기 위해 이를 의도적으로 언론에게 흘려준 것이다”라고 반발했다. 이에 질세라 한국언론들도 미야자와의 방한 직전에 종군위안부 관련자료가 일본에서 발견되고 즉각 일본정부가 사죄한 것은 일본측에 어떤 각본이 있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피상적 모방이 통용되던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본에서 자료가 먼저 발견되고 문제가 되자 우리 언론들이 뒤늦게 흥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도쿄에서 30년째 한국서적을 수입판매하고 있는 고려서점의 박광수 사장은 “한·일간 서적류 수출입액을 비교하면 20대 1 정도로 한국측의 압도적인 수입초과”라고 지적한다. 그만큼 한국의 일본연구가 왕성하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한국인은 현재의 일본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무역적자가 1백억달러에 이르고 외채가 5백억달러에 육박하자 한국에서는 지금 “일본을 배우자”는 구호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또 일본예찬론 계열의 책이 이러한 구호에 힘입어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자 이러한 주마간산식의 독서가 일본을 이해하는 데 어느정도 도움이 될까. 일본 아시아경제연구소의 동양부차장 노조에 시니치씨는 이렇게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출판된 일본관계 서적은 일어번역판이 주류였다. 이러한 책들은 일본책이지 한국책이 아니다. 이제 한국도 한국인 자신에 의한 독자적 일본연구가 필요하며 그래야만 체계적인 일본연구가 정착될 것이다.”

 우리가 과거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이웃에 일본이라는 경제선진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피상적 모방이 언제까지나 통용될 리 없다. 한 나라는 작년 사상최대의 1천억달러 무역흑자를 기록했고 또 한 나라는 사상최대의1백억달러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왜 그랬을까. 우리 한국인들이 일본을 동렬로 생각하는 착각도 그 이유의 하나이다. 일본모델이나 일본적 시스템이 꼭 한국에 최선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체계적인 일본연구가 절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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